#234
다시 사는 인생 - 234
‘이런 젠장!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2010년 한해를 정리할 12월이 다가왔음에도 경환은 집무실을 서성이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보여 비서실을 긴장시켰다. 며칠 전부터 경환의 심기는 좋지 못했다. 비서실을 맡은 김혜원은 평소와 다른 경환의 모습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하루나였다면 경환의 생각을 쉽게 읽었을 거란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들었다.
“김 실장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닙니다. 회장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경환은 김혜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순간, 당황한 김혜원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급히 옷매무새를 고쳐잡았다. 오만가지 상상이 김혜원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30대 후반이긴 하지만, 휴스턴의 사교계에서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미모만큼은 자신 있었다. 수정을 제외하고 여자를 돌 같이 보는 경환의 시선이 오늘은 달랐다. 자신을 여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김혜원의 얼굴을 붉어지고 있었다.
“김 실장,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합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린다와 카일 좀 불러줘요.”
“네. 네?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바로 쿡 사장과 디푸어 사장을 부르겠습니다.”
평소답지 않은 김혜원의 태도에 경환은 고개만 갸우뚱거릴 뿐이었다. 부끄러움에 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가던 김혜원의 하이힐이 삐끗거렸다. 자칫, 바닥에 큰 대자로 넘어질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문고리를 부여잡은 탓에 대형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자리에 돌아온 김혜원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책상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젠장, 있는 쪽 없는 쪽 다 팔리게 생겼군.’
이마를 손으로 눌렀지만, 두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했어야만 했다. 너무 자신의 경험에만 치우쳐 주위의 의견을 무시했던 게, 이런 사고를 일으킨 원인이다는 점에 경환은 크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거상 임상옥은 매가 마당의 닭을 채가는 모습에 자신의 운이 다했음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경환도 자신의 운이 다한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회장님,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아닙니다. 어서들 오세요. 커피나 같이 한잔하고 싶었습니다.”
린다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뜬 경환은 직접 내린 커피를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믿었던 북한의 연평도 도발은 벌어지지 않았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존 매케인과의 관계를 의식해 백악관의 대북특사자격을 받아들인 경환으로썬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천안함 침몰사건이 예정대로 이뤄진 것을 통해 경환은 연평도 포격사건을 예상했고, 이를 통해 방북을 자연스럽게 취소시킨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었다.
“카일, 북한의 특이동향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까?”
“김정일의 건강이상설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3대 세습체제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워낙 정보수집에 어려움을 겪는 곳이다 보니.”
NSA도 한 수 접어준다는 SHJ시큐리티지만, 북한에 대한 정보는 오직 위성과 한국의 국정원을 통한 정보뿐이었다. 북한에 대한 정보수집은 인적 인프라 구축이 필요했지만, 경환은 북한에 대한 관심을 애당초 갖고 있지 않았다.
“백악관에서 일정을 확정해 달라는 요청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계속 미룰 수는 없을 거 같은데요.”
“골치 아프네요. 너무 제 판단에만 의존했던 거 같습니다. 변명할 여지도 없으니, 이거 참.”
경환은 자신이 만든 자충수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백악관은 경환이 특사를 받아들인 것을 근거로 방북을 종용하고 있었다. 작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은 6자회담을 경색시켰고 올해 있었던 천안함 침몰은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북한과의 단독협상은 한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이 요청한 경환의 방북은, 막힌 북미 관계를 간 보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었다. 보내려는 백악관과 버티려는 SHJ와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갑시다. 내가 뱉은 말이니 책임을 져야겠지요. 내년 1월로 준비해 주십시오.”
“제가 동행을 할게요.”
“저도 가겠습니다. 특수한 지역이니 회장님의 경호를 위해서라도 알과 제가 수행하겠습니다.”
린다와 카일이 경환의 방북을 수행하겠다고 나섰지만, 경환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의 요청을 막았다. 북한 정부가 신변안전을 보장한다고는 했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지역에 SHJ의 핵심 인물을 대동한다는 건 그만큼 부담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다는 부회장님은 휴스턴을 지키세요. 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회장님을 수행할 사람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방북은 서산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잭과 코이치와 방북할 생각이니 모든 제반 사항을 SHJ아시아본사에 일임시키세요. 경호는 알이 있으니, 카일까지 나설 필요는 없습니다.”
경환의 결심은 린다와 카일의 얼굴에 그늘을 지게 했지만, 애당초 반대를 무릅쓰고 방북을 결정한 경환에겐 백악관의 독촉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SHJ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이 알던 경험은 점차 무용지물이 되어 간다는 사실에 경환의 얼굴에도 큰 그늘이 드리워졌다.
급히 학교를 방문해 달라는 교장의 요청에 수정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사춘기로 힘들 게 하던 희수는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착한 딸로 돌아와 있었고, 요즘 들어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까지 보여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늘 아침 학교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교장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인 수정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문을 열었다.
“미시즈 리, 바쁘신데 오시게 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 희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반갑게 맞이해 주는 교장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남학생들과 싸움을 벌인 건 아닌지 수정은 초조하기만 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이걸 좀 보십시오.”
다행히 희수가 싸움을 벌인 건 아닌 거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수정은 교장이 건넨 서류를 받아보고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시험의 성적이 A+입니다. 오답 하나 없이 모든 시험이 만점이었습니다. 그동안 중간 정도의 실력을 보인 희수의 성적치고는 너무 이상해서······.”
교장은 뒷말을 흐렸다. 차마 커닝이 의심된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학교에 대한 자율권을 학부모와 이사진에게 보장한다고는 했지만, 수정이 SHJ그룹 총수의 부인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수정도 교장의 다음 말을 모르진 않았다. 성적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눈부신 성과를 보인다면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었다.
“희수가 요새 공부에 집중하고는 있어요. 희수가 다른 여학생들과는 다르지만, 그렇다고 커닝할 정도로 막 자란 아이는 아닙니다.”
“저도 그건 미시즈 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제가 염려스러운 점은 정우로 인한 희수의 스트레스가 과중한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수정의 미간이 좁혀지면서 인상이 굳어지는 모습에 교장은 긴장하고 있었다. 정우의 천재성이 희수를 극한으로 몰아세운 게 아니냐는 교장의 말에 수정은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희수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진 않은 거예요. 희수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저, 그게. 모든 과목에 대해 재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곧 끝날 시간입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는 수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수정이 교장을 노려보자, 어색한 미소와 함께 교장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한 방울씩 맺혀갔다. 정당한 학교의 조치라 하더라도 희수가 받았을 모욕감에 수정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동안 조용히 내조에만 힘쓰며 SHJ타운 일에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던 수정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전 제 딸을 믿습니다. 학교의 조치를 이해할 수도 없고요. 만약 희수의 무고가 밝혀진다면,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진 않을 거예요.”
“미, 미시즈 리. 그, 그게 무슨 뜻인지.”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던 교장은 불을 내뿜는 수정의 눈빛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내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자신을 들어내기보단 조용히 SHJ타운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수정이 이렇게 자신을 몰아세울 줄 몰랐다. 아무리 학교의 자율권이 보장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SHJ타운의 주인은 엄연히 경환이었고, 경환을 꼼짝없게 만들 사람은 자신의 앞에 있는 수정이었다.
“엄마! 학교엔 무슨 일로 왔어?”
재시험을 마치고 희수가 급히 교장실로 들어섰다. 사면초가로 퇴로가 막힌 교장은 희수의 등장에 깊은숨을 들이 내쉬었다.
학교의 일을 수정을 통해 전해 듣고 서둘러 저택에 도착한 경환은 희수의 영악함에 한동안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회귀는 오로지 희수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으로 얻은 선택이었다. 자신의 영혼을 마몬에게 팔아치웠지만, 희수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희수를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건지, 경환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희수야. 엄마는 몰라도, 아빠에겐 말해 줬어야지. 왜 아빠를 속인 거니?”
“아빠, 미안해.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공부에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오빠처럼 주위의 관심을 받는 것도 부담스러웠어.”
“그건 아빠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는 거니?”
“응,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싶어졌어. 내 일도 하고 싶어졌고.”
경환은 부드러운 눈으로 희수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희수를 서재로 부르기 전, 장남인 정우를 통해 대강의 내용은 이미 들은 상태였다. 경환의 추궁에도 정우는 희수와의 의리를 생각하며 입을 굳게 걸어 잠그려 했지만, 경환은 정우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경환은 정우의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도저히 아이들의 생각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얘기들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희수 네 일이라는 게, SHJ를 경영하고 싶다는 거였니?”
“치, 정우 오빠가 얘기한 거야? 남자가 입도 싸네.”
“오빠는 잘못 없다. 왜 희수 네가 재능을 숨겼는지가 궁금한 거야. SHJ는 아빠 개인만을 위한 곳은 절대 아니야. 아빠와 더불어 15만 명이 넘는 동료들과 같이 일하는 곳이야. 희수 널 목숨보다도 사랑하지만, 네가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절대 SHJ를 넘겨줄 생각이 없어.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야. 단지 머리가 똑똑하다고 해서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거든.”
경환은 희수를 더 이상 어린아이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재시험을 통해 모든 테스트를 만점으로 통과한 희수가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기의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던 희수가 한편으로 대단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빠한테 미리 말하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해. 오빠 때문에도 고민을 많이 한 아빠를 나까지 힘들 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건 진심이야. 황 박사님이 연구하시는 핵융합에너지나 앤 언니가 개발하는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 그리고 SHJ유니버스까지 이 사업들은 하루아침에 되는 사업이 아니잖아. 엘리시움이나 컴페니언, 그리고 SHJ구글만으로는 한계에 도달할 거고. 하루라도 빨리 아빠 일을 도와주고 싶었어.”
경환은 희수의 당돌한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희수의 긴 생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새 희수는 부쩍 커 있었다.
“그래서 오빠도 박사 논문이 통과되면 바로 SHJ테크놀러지에 입사하겠다고 한 거니?”
“응. 앤 언니의 연구가 벽에 막혀있는 거 같아서.”
“그럼 희수야. 왜 SHJ시큐리티에 들어갈 생각을 한 거니?”
정우의 답변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어느 부분에선 희수가 정우를 앞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경환은 다른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그랬지만, 희수도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경환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말처럼 재능이 없는 사람이 SHJ를 이끈다면 SHJ의 명성은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빠 일을 도우려면 화려한 시작보다는 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게 정답이라고 결론을 얻었거든. 그리고 SHJ의 중심은 SHJ홀딩스가 아니라, 모든 정보를 쥐고 있는 SHJ시큐리티라고 판단했어.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SHJ시큐리티의 인정을 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한 거야.”
경환은 대답이 끝나는 순간에도 희수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희수의 진심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희수의 판단은 도저히 14살 아이의 생각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냉철한 분석이었다. 경환은 목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자신의 염려가 사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경환은 그날 저녁 오랜 시간을 희수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