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3화 (210/264)

#233

다시 사는 인생 - 233

11월의 휴스턴은 간혹 시원한 바람이 불 정도로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화창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휴스턴을 찾은 잭은 자신에게 성공과 좌절을 안겨준 휴스턴의 전경에 주위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져들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다시 돌아오고 싶으신 겁니까?”

“아! 회장님. 너무도 변한 SHJ타운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경환은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잭의 손을 힘껏 잡아주었다. 넋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잭의 한국어 실력은 일취월장해, 간혹 중요한 한국어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경환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둘의 대화엔 영어가 필요 없었다.

“휴스턴도 많이 바꿨죠? 서산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만큼요.”

“그렇습니다. 회장님.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휴스턴은 이젠 SHJ타운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되는 도시가 되었더군요.”

SHJ는 휴스턴 시 정부의 도시개발 계획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물론 휴스턴 시 자체가 재정적으로 어려운 도시는 아니었지만, 단지 NASA 이외에는 휴스턴을 대표하는 마땅한 기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휴스턴 서쪽 외곽에 위치한 SHJ타운과 도심을 연결하는 계획이 시 정부를 통해 추진되었고, SHJ도 자금지원을 통해 한팔 거들고 나섰다. 지금은 NASA를 제치고 미국인들의 머릿속엔, 휴스턴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SHJ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다운타운과 SHJ를 연결하는 중간에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었습니다. LA나 뉴욕, 애틀랜타와 비교하면 크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세력을 넓히고 있고요.”

서산과 교류하는 SHJ로 인해 한인들의 유입은 급속도로 팽창되었고, 상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했던 히스패닉계와 중국계는 서로 다른 행보를 보였다. 히스패닉계가 한인들과의 공존을 선택하며 서로 발전을 꾀했지만, 뿌리 깊은 중화사상에 물든 중국계는 공존을 거부하고 독자세력을 형성하려 애썼다. 그러나 SHJ와 중국의 잦은 대립에서 중국계를 향한 시선은 곱지 못했고, SHJ와 밀착한 시 정부가 중국계에 대한 지원을 축소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수의 중국계 이주자들은 휴스턴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중국계의 힘은 한국계를 능가하고 있었다.

“SHJ가 휴스턴에 버티는 한, 휴스턴 시 정부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국적을 바꿨다지만, 잭은 자신의 청춘이 묻혀있는 휴스턴을 잊을 수는 없었다. 이미 배신자라는 주홍글씨는 지워진 지 오래였지만, 한국은 잭의 제2의 고향이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잭을 향해 경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중국과 일본이 미국정부를 압박하며 유치전에 뛰어들었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잭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싱가포르, 태국과 말레이시아가 적극적인 유치의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도도 접촉을 제의한 상태이고요. 동남아시아의 거점을 확보한다는 애초 계획으로는 싱가포르나 태국, 말레이시아가 적격이지만, 구매력과 기술력을 앞세운 중국과 일본도 무시할 수만은 없기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잭이 건네준 그동안의 진행과정과 분석보고서를 경환은 세세히 읽어 내렸다. 중국이 대규모의 정부의 실무진이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은 차기 총리로 정치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노다 요시히코가 협상을 주도하고 있었다. 경환은 시선을 보고서에서 돌리지 않은 채, 질문을 이어갔다.

“한국정부가 신중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요?”

“SHJ타운이 중국이나 일본에 건설된다면 동북아시아의 경제권 싸움에서 한국이 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 같습니다.”

“주는 것도 없이 달라고만 하는군요. 한국정부의 요청은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른 요청도 있었습니다.”

보고서를 살피던 경환이 눈을 들어 잭을 바라봤다. 보고서에는 특별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SHJ는 철저한 중립을 표방하며 현 정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면에는 심석우란 히든카드의 극적인 연출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한국정부와는 일정 부분 선을 긋겠다는 경환의 의도도 숨어있었다. 잭이 급히 말을 이어갔다.

“SHJ타운 건설과 SHJ에너지 지분을 넘기면서 확보한 원유의 판로에 대해 협상을 하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경환은 그제야 이해를 했다는 듯, 읽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이라크 전쟁으로 시작된 중동의 불안한 정세와 침체한 세계 경제를 이어 OPEC의 감산 정책에 따라 원유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급상승하고 있었다. 연간 8억 8천만 배럴을 소비하는 한국 경제는 원유가격의 상승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SHJ가 확보한 북해 브렌트유는 안정적인 장기 공급원이란 사실에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수입한 브렌트유는 지금까진 전무한 상태였다.

“내년 EU와 FTA가 발효되면 브렌트유도 좋은 수입처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겠죠. 우리가 확보한 원유와 호주의 유연탄은 좀 묵혀놓은 게 좋을 거 같은데.”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은 제일그룹이 총대를 메고 달려든 거 같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서산을 찾아오는 통에 귀찮을 정돕니다.”

“미국의 경제위기로 2009년 50불대로 내려간 원유가격은 올해 들어 90불을 위협하고, 내년엔 120불로 예상하는 분석이 나오니 한국정부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겠죠. 원유와 유연탄은 아시아본사와는 관련이 없는 점을 분명히 하시고, 잭은 발을 빼세요.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수입처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역시, 때를 기다리시는 겁니까?”

시선이 마주치는 두 사람의 표정엔 알 수 없는 미소가 흘렀다. SHJ에너지의 지분 5%를 넘기며 50불대에 확보한 2억 4천만 배럴의 원유와 STATOIL과의 합작으로 앞으로 공급될 원유는 에너지의 30%를 석유에 의존하는 한국에 있어선 탐나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은 유연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경환은 아직은 한국에 풀 생각이 없었다. 노르웨이정부는 땅을 치고 후회할 수밖에 없었지만, SHJ가 원하는 시기에 원유를 넘긴다는 조건을 바꿀 수는 없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갑시다. 중국의 구매력과 경제력은 무시할 수 없지만, 중국에 SHJ타운을 건설하는 건 큰 모험이라고 봅니다. 중국정부가 준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말도 저는 솔직히 믿지 못하겠고요.”

“저도 회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국민성을 본다면 중국보단 일본이 통제하기에는 수월하다고 봅니다. SHJ타운이 건설되면, 싫든 좋든 70% 이상은 중국인들로 꾸려져야 하는데, 통제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중국정부가 준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말엔, 우리가 중국인들을 통제하지 못할 거란 노림수가 있다고 봅니다.”

경환은 중국과 일본에 대해 자신과 같은 판단을 한 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국적만 바꾼 게 아니라 한·중·일 삼국의 역사와 국민성까지 파악하고 있는 잭이 이젠 진정한 한국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SHJ에 접근하고 있었다. 경제력과 구매력으로는 SHJ를 강요할 수 없다는 경험이 작용했는지, 중국정부는 유럽과 호주와 같은 조건으로 SHJ타운을 유치를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노림수는 잭과 경환에 의해 걸러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겠죠. 어차피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는 분명 다르니까요. 더욱이 중국정부가 우리에게 보장한 내용을 지킬지도 의문이고요.”

“그렇지만, 중국을 계속해서 무시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내용을 일부 수정하면 어떻겠습니까?”

“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을 말씀하시나 보군요.”

“그렇습니다. 어차피 아시아본사의 통제를 따르는 SHJ타운인 만큼, 명분은 우리에게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일본도 같은 조건을 든다면 반대할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습니다. 이 문제는 잭이 알아서 매듭짓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린다도 잭을 기다리고 있으니, 우선 쉬시고 저녁이나 같이 합시다.”

경환의 무관심에도 중국은 막강한 구매력을 바탕으로 SHJ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건 SHJ를 향한 끝없는 구애라기보단, SHJ기술연구소에서 개발되고 있는 핵융합에너지가 상용화에 성공하고 개발된 신무기가 군사대국으로 성장하려는 중국에 큰 걸림돌로 작용해, 한국이 중국의 통제권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에 의한 조치였다. 두려운 적일수록 가까이 두고 배워야 한다는 영화 대부의 대사처럼 중국은 껄끄러운 SHJ를 중국 안에 두길 원했다. 그러나 잭의 제안을 중국이나 일본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경환은 미련을 버릴 생각이란 걸 두 정부는 알지 못했다.

“부회장님! 아니, 형님! 너무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제게 뭘 바라시는 겁니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SHJ기술연구소와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술협력 협상을 주도한 황태수는 야심한 시각, SHJ시큐리티의 철통 같은 보안 속에 은밀히 찾아온 박화수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박화수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황태수의 얼굴엔 당혹함이 서려 들었다.

“박 이사, 성질 좀 죽여. 회장님도 자네에겐 정말 미안해하신다고.”

“미안해하시면 약속대로 이번 대선을 끝으로 휴스턴으로 불러주면 되지 않습니까!”

박화수는 황태수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타의에 발을 담근 정치판은 자신의 예상대로 개판이었다. 소신 있는 정치가보단 계파의 수장에 복종하는 인간들이 대다수였고, 80년대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학생운동을 주도한 군상들은 권력에 취해 젊은 시절의 열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루라도 빨리 냄새나는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제 2년만 참고 기다리면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는 박화수에게 황태수의 제안은 청천벽력일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박화수를 황태수가 급히 끌어당겼다.

“자네 왜 이렇게 경솔해? 말을 끝까지 듣고 결정해도 늦지 않잖아! 회장님은 자네의 의견을 최대한 중시하라고 지시하셨네.”

“제 결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이 절 버리지 않겠다시면, 예정대로 2년 후엔 복귀시켜 주십시오. 휴스턴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SHJ홀딩스의 지분 2%는 자신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 끈이었다. 그걸 내어 달라는 황태수의 제안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돈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미 쓰고도 남을 돈이 자신의 수중에 있었다. 지분 2%는 아직도 자신이 SHJ 사람이라는 소속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박화수는 자신을 잡아끄는 황태수의 손에 이끌려 일어섰던 몸을 의자에 다시 앉혔다.

"자네 객관적으로 심석우를 어떻게 판단하나?"

"무슨 말씀입니까?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감이냐고 묻는 걸세."

"지도자감도 안되는 사람을 대권에 도전시킨 저의가 뭡니까!"

아직도 날 선 박화수의 목소리는 황태수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박화수는 황태수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황태수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심석우는 SHJ에 의해 철저히 만들어지고 있는 인물이었지, 한나라를 이끌 수 있는 개인적인 역량은 부족한 인물이었다. SHJ의 힘이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기존 기성정치인들의 노련함에 국회의원 배지도 건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박화수의 화가 가라앉았다고 판단한 황태수는 말을 이었다.

"5년 단임제로는 그 어떤 정책도 펼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잘 알 거야. 회장님은 심석우를 대권 주자로 키우면서, 사실은 자네를 트레이닝 시킨 걸세. 심석우로 5년 동안 틀을 닦은 다음, 다음 5년은 자네가 맡아주길 원하고 계시네."

"저는 썩어빠진 정치판에서 하루라도 빨리 몸을 빼고 싶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부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쩌실 겁니까?"

"자네 뜻이 확고하다면 대선을 끝으로 휴스턴으로 복귀하게. 내가 부회장직을 맡으면서도 SHJ플랜트 부문을 겸임한 이유는 자네의 자리를 대신한 거야. 그리고 SHJ는 심석우를 끝으로 한국에서 완전히 발을 뺄 걸세."

황태수의 말이 사실이란 걸 박화수는 모르지 않았다. SHJ의 큰 축을 담당하는 SHJ플랜트의 수장자리에 많은 인물의 하마평이 오르내렸지만, 끝까지 황태수의 겸임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이유가 자신의 자리를 보존시키려는 경환의 뜻이란 사실을 확인한 박화수는 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젖혔다. SHJ아시아본사가 규모를 축소하거나 호주로 이전할 수 있다는 소문은 은밀하게 퍼져나가며 주가가 널뛰기하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박화수는 경환이 진심으로 한국을 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회장님은 제가 지도자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기존 정치인들보다는 자네가 낫다고 보시네. 자네의 지분 2%를 뺏는 게 절대 아니란 걸 자네도 알 거야. 자네의 유일한 약점을 제거하며, 부족한 자금을 합법적으로 지원하고 싶으신 걸세. 자네의 지분은 SHJ가 망하지 않는 이상, 영원하다는 것을 회장님 본인이 보증한다셨네."

"지금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황태수는 고개를 숙인 채, 축 늘어진 박화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성건설 시절부터 자신의 부사수로 생사고락을 같이 한 박화수에게 매번 짐만 지우는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황태수는 직접 따른 양주잔을 박화수에게 건네며 오늘만큼은 예전의 사수와 부사수의 관계로 회포를 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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