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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32화 (20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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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32

    2009년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합내각은 반세기에 이르는 장기 집권체제의 막을 내렸다. 8월에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과 사회민주당 연합이 전체 480석에서 300석 이상을 확보함으로써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기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이 지난달 물러나고 현재는 간 나오토 내각이 정부를 구성해 이끌고 있었다.

    기업 우대정책을 편 자민당 정권의 붕괴로 탄생한 민주당 정권은 기업보단 가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분명히 하며, 높은 법인세 부과와 제조업과 등록형 파견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여 기업에 냉랭한 정책을 연이어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5.2%라는 최악의 실업률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계속되는 엔고와 중국과 한국 등 신흥국들의 거센 추격에 부품의 해외구매가 늘어나고 급기야 제조업들의 탈일본이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수요급감은 물가하락을 부추겼고 기업수익이 악화하면서 임금과 고용이 불안정하게 만들어 일본은 심각한 디플레이션에 봉착해 있었다.

    간 나오토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경제문제에 골머리를 썩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진행된 경제부서 회의는 지루한 원론들만 오가는 상황에서 아무런 결론도 없이 산회하고 말았다. 집무실 문이 열리며 노다 요시히코 재무대신이 급히 들어섰다.

    “총리, 심각한 실업률로 인해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라면 정권 교체에 성공한 의미가 상실됩니다.”

    간 나오토의 얼굴에 짜증이 그려졌다. 같은 민주당이라 해도 노다 요시히코는 자신의 정적이었다. 집단적 자위권 주장과 과거사를 부정하는 그의 태도는 자민당의 극우 계열과 흡사했다. 그의 방위대신 임명을 자신이 반대한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 아는 얘기 꺼내지 맙시다. 경기는 살아나고 있지만, 기업들이 신규채용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는 이유 때문 아니겠습니까? 재무대신은 우려되는 디플레이션을 극복할 대안이 있으신 겁니까?”

    “저, 그게.”

    노다 요시히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총리라곤 하지만, 계파를 움직이는 자신의 면전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간 나오토가 마땅치 않았다. 차기 내각을 이어받기 위해 당내 중진들과 물밑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는 시점에서 불필요한 언성으로 중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던 노다 요시히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총리, 중국정부가 SHJ타운 유치를 위해 대규모의 유치단을 한국 SHJ아시아본사에 파견한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SHJ타운만 일본에 유치할 수 있다면 막힌 경제나 정치상황은 바로 역전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국이 유치단을 보낸다고요? SHJ와 중국은 앙숙관계가 아닙니까?”

    “SHJ는 철저히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입니다.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국이 외환위기를 벗어나고 경제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SHJ타운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노다 요시히코의 답변을 반박할 수 없었다. 외환위기를 벗어난 한국은 쓰러지지 않았고 SHJ타운과 MS의 데이터센터 유치에 성공하면서 IT 강국의 위세를 지속할 수 있었다. 특히 SHJ의 생산기지 역할로 인한 경제적 이익과 기술력 확보는 일본의 목덜미를 내려칠 거리까지 좁혀진 상태였다. 중국과 한국의 무서운 추격에 일본의 경제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SHJ타운을 유치할 명분이 일본엔 없다는 게 간 나오토의 고민이었다.

    “누가 모른답니까? 그러나 명분이 없습니다. 엘리시움만 봐도 일본 점유율이 15% 밖엔 되지 않습니다. 플랜트도 합작을 진행하는 기업도 달랑 JSC 한 곳입니다. 중국과 앙숙이라 하더라도 엘리시움의 중국 점유율은 35%가 넘습니다.”

    일본의 국수주의는 외국산 제품의 배척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SHJ타운이 들어선다는 건 지나가는 개도 믿지 않을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았다. SHJ는 아시아 시장을 강화할 목적으로 노르웨이에 건설된 SHJ타운을 벤치마킹해 SHJ아시아본사의 지사를 SHJ타운 형식으로 설립하기 위해 선정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이번 선정작업은 SHJ그룹이 아닌 SHJ아시아본사에서 주관한다는 것이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유일한 동맹국은 우리 일본밖에 없습니다. 백악관에 요청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지난 방미 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존 매케인이 한 발 빼더군요.”

    간 나오토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없었다. SHJ가 플랜트로 사업을 시작할 무렵, 미쓰비시중공업을 지원하며 SHJ를 방해한 전력이 지금처럼 후회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노다 요시히코는 간 나오토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총리의 과거 전력이 문제라면 정식으로 유감을 표명하면 되는 일이라고 봅니다. SHJ는 엘리시움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의 검색엔진 1위는 구글이고 사이보그폰 점유율 1위인 소니도 결국은 SHJ퀄컴의 칩을 수입하는 처지입니다. 총리가 힘들다면 제가 유치전을 맡겠습니다.”

    “뭐요? 지금 뭐라 하셨소?”

    노다 요시히코는 쓴웃음을 남긴 채, 총리 집무실을 벗어났다. 자신의 장기집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SHJ타운 유치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간 나오토의 시대가 끝나감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지금, 자민당이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은 절대 민주당에 유리하지 않았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SHJ타운은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끌고 와야만 했다. 그러나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도 노다 요시히코와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 떡을 손에 쥔 경환의 의중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정우 오빠, 이거 좀 먹고 해요.”

    경환의 불호령에 정우는 마지못해 연구소를 떠나 집에서 통학하는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제니퍼가 건네주는 커피와 과일을 받아든 정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결같은 제니퍼의 모습에 정우의 마음도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여대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정우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한국적인 사고방식을 경환과 수정에서 물려받은 탓에 미국 여대생들은 눈에 차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한국인보다 더욱 한국적인 제니퍼가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우의 시선이 제니퍼의 잘록한 허리선에서 풍만한 가슴까지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공부는 힘들지 않니?”

    “충분히 따라갈 정도는 돼요. 오빠처럼 좋은 머리는 아니지만.”

    “왜 휴스턴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해? 대학 가서 만나도 되는데.”

    제니퍼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은 정우가 야속했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숙였다. 부모님과 동생들이 보고 싶지 않다면 그건 자신을 속이는 거였다. 제니퍼 자신도 왜 정우가 자신의 마음을 독차지했는지, 자신에게 되묻고 싶을 정도로 고민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이 현재 휴스턴에 있고 정우가 자신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만족할 뿐이었다.

    제니퍼의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바라보던 정우가 의자에서 일어나 제니퍼를 가볍게 안았다. 제니퍼의 떨리는 심장박동을 느끼면서 둘의 시선이 마주쳤고, 제니퍼가 고개는 내리지 않은 채, 눈을 살며시 감았다. 바싹 마르는 입술을 혀로 적신 정우의 떨리는 심장은 제니퍼와 다르지 않았다. 제니퍼의 입술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숙이던 정우는 노크도 없이 열리는 문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제니퍼를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끈적끈적한 분위기, 어쭈? 둘이 영화 찍고 있었어? 이 기집애, 얼굴까지 벌게서 도대체 둘이 뭐한 거야?”

    “우, 우리가 뭘 했다고 그러는 거야? 넌 왜 노크도 안 해?”

    “오호! 오빠까지 얼굴이 벌건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성질 내기는. 좀 안 보이는데 가서 해라. 사람 염장 지르지 말고.”

    눈치도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친 희수로 인해 둘의 첫 키스는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연신 시시덕거리는 희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충동에 정우는 손을 머리 위로 쳐들었다가 한숨과 함께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제니퍼, 오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피해줄래? 시간 얼마 안 걸릴 거니까, 못했던 건 나중에 다시 하면 되잖아.”

    “오, 오해야. 나 먼저 나갈게.”

    부끄러움에 식은땀까지 흘리는 제니퍼는 정우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침대에 다리까지 꼬고 앉아 범죄자 대질신문을 하듯 정우를 요리조리 살피던 희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제니퍼 아직 9학년 이거든? 3년만 기다리면 될 걸, 뭐가 그리 급하냐? 하긴, 제니퍼의 발육상태가 남다르긴 하지.”

    “너 괜한 소리 하려면 빨리 나가. 연구 과제 때문에 정신없으니까.”

    “우리도 이젠 정리를 좀 해야 하지 않겠어?”

    “무슨 소리야?”

    좀 전의 시시덕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차갑게 바뀐 희수의 모습에 정우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런 날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최소한 희수가 고등학교는 졸업한 후의 일이라고 애써 외면할 뿐이었다.

    “경영이야? 연구야? 둘 중 하나만 선택해.”

    “넌 뭘 하고 싶은데?”

    “선택은 오빠에게 맡길게. 나도 내년이면 고등학생이야.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잘난 오빠 때문에 IQ 120에 맞추려고 아주 힘들었거든.”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우는 마땅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내년부턴 자신도 준비를 하겠다는 말에 정우의 고민은 깊어졌다. 희수의 실력으로는 정규교육이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자신이 너무 일찍 실력을 드러내는 바람에 희수는 보통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둘 만의 무언의 약속이기도 했다.

    “잘 생각해야 해. 아빠가 키운 SHJ를 지키기 위해선, 경영과 연구 둘 다 포기해선 안 되잖아. 오빠가 경영을 선택한다면 난 미련없이 연구 쪽으로 방향을 돌릴 거야. 오빠랑 싸우자는 게 아니라, 우리 둘이 현명한 결정을 내리자는 거야. SHJ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연구를 선택한다면, 넌 어떤 준비를 할 건데?”

    “고등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대학은 한국에서 다니려고 생각 중이야. 할머니와 한 약속은 지켜야 할 거 같아서. 그런 다음에 SHJ시큐리티에 들어가려고.”

    “SHJ홀딩스가 아니고?”

    희수의 선택은 의외였다. 경영을 준비하려면 SHJ홀딩스가 적격이었지만, SHJ시큐리티를 선택한 희수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SHJ가 버티는 이유도 SHJ시큐리티가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야. 뭐, 한 사오 년 정도 바닥에서 굴러 보려고. 그다음에 린다 아줌마를 찾아가도 늦지 않으니까.”

    희수의 철두철미함에 정우는 손을 들어 항복하는 시늉을 희수에게 보였다. 자신이 실력을 드러낸 후부터 희수는 알을 졸라 호신술과 격투기에 빠져 살았다. 덩치에서 상대되지 않는 자신과의 대련에 코피를 쏟는 날이 계속되어도 희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이젠 단독 대련에서 승패를 가를 수 없을 정도로 희수의 성장세는 빨랐다. 이런 과정이 지금을 위한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우는 두 마리의 토끼를 쫓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졌다. 너 경영 수업받아라. 난 연구에 올인할 테니까.”

    “흐흐흐, 잘 생각했어. 아무리 봐도 오빤 모범생 타입이거든. 그 대신 하나는 약속할게. 나 다음번은 오빠의 2세 중에서 선택을 할 거야. 물론 이어받을 똑똑한 애들이 태어나야 하겠지만.”

    “왜? 넌 2세 볼 생각이 없냐?”

    “내가 워낙 출중하잖아. 그냥 즐기며 살려고.”

    정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자신도 아직 성인이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14살인 희수의 당찬 말엔 통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오빠 나 고민 많이 했다. 오빠가 경영을 선택한다면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솔직히 난 공부엔 취미가 없거든. 결정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그리고 앤 언니가 인공지능과 양자컴퓨터 개발로 히스테리가 늘어가고 있는 거 같던데, 오빠도 연구에 속도 좀 내봐.”

    “뭐야? 아직 아버지 정정하시다. 가시나가 벌써부터 사람을 잡기 시작하네. 그나저나 사춘기 흉내는 언제까지 계속 할 거야?”

    “왜? 티 났어? 아빠나 엄마, 충분히 즐기셨겠지? 곧, 아빠하고 담판도 지어야 하니, 사춘기 이쯤에서 종료하려고.”

    정우는 어이가 없어 허탈한 웃음을 희수의 얼굴에 뿜었다. 자신은 경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해도 장남이란 의무감은 항상 자신을 짓누르며 따라다녔다. 그런 의무감이 희수로 인해 해방을 맞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SHJ 경영은 희수가 적격이었다. 무거운 짐을 벗게 된 정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참, 그리고 한국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더라. 제니퍼, 오빠에겐 아까운 아이니까 울리지 마. 그리고 우리와 MS는 같은 길을 가긴 어렵다는 건 오빠도 잘 알 거야. 나중에라도 제니퍼 상처받지 않게 오빠가 힘이 돼줘.”

    “그래 알았다. 너나 걱정해라. 아버지 아시면 쓰러지신다.”

    “아빠는 내 말이라면 뭐든 오케이잖아? 나 나간다. 제니퍼 다시 불러줄 테니까, 아까 못했던 거 다시 해.”

    “야! 너 이리 와봐. 이게 귀여워해 줬더니!”

    본래의 모습을 다시 찾은 희수는 혀를 날름 내밀더니 쏜살같이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이젠 연구소 생활을 접고 SHJ테크놀러지에 자리를 잡을 결심을 굳힌 정우가 책장 깊은 곳에서 자신의 연구노트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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