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1화 (208/264)
  • #231

    다시 사는 인생 - 231

    “이건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겁니까?”

    경환은 심석우의 행적을 추적한 보고서를 살피며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정아의 출산까지 심석우의 이미지 메이킹에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정치적 기반이 약하고 40대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했습니다. 덕분에 심석우의 호감도는 급상승 중입니다.”

    “이런 꼼수보단 국민들의 실생활에 접목될 수 있는 법률제정을 통해 인지도를 높이는 방법도 있지 않나 해서 하는 말입니다.”

    “한국의 정치상황을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라도 정당에 소속되지 않는다면 밟힐 뿐입니다. 그동안 심석우는 법률제안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여당과 야당의 철저한 무시에 제출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률을 만들더라도 국회의원 10명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제출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었다. 차기 대선 주자로 고개를 들고 있는 심석우는 여당과 야당의 견제에 무소속의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황태수의 답변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출산하며 서러웠을 정아를 생각하니 맘이 편치 못했다.

    “그래도 될 수 있으면 직계가족은 이용하지 말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좋은 약도 두 번 쓰면 내성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심석우를 키우기 위해 투자한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이번 한 번은 참아야 했다. 회귀전과 크게 달라진 희수의 사춘기에 경환은 수정과 희수 사이를 오가며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눈 밑으로 길게 뻗어 내린 다크서클을 만지작거리는 경환의 모습을 황태수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피곤하신 거 같으십니다. 좀 쉬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요샌 집보다 사무실에 있는 게 오히려 쉬는 겁니다. 부회장님이야말로 건강에 신경 쓰십시오. 내년이면 환갑이십니다.”

    경환은 황태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황태수의 건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경환은 래리와 세르게이에 했던 것처럼 개인 트레이너와 주치의를 황태수와 린다에게 붙여 두 사람의 건강을 일일이 챙기는 모습을 보여 직원들의 감동을 얻었지만, 실상은 자신이 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국의 여당과 야당 대표들이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고 있습니다. 심석우를 견제하며, 2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을 준비하기 시작한 거 같습니다.”

    “아직은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형우 회장도 보통은 아니더군요. 신한국정치포럼이 오성그룹의 도움을 받는 건 사실이니까요.”

    2007년 심석우가 L&K재단에서 독립한 후로 오성그룹은 발 빠르게 심석우를 물밑에서 자금과 인력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SHJ가 친인척이란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오성의 지원은 심석우를 수월하게 국회에 입성하게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경환은 국정원도 한 수 접어 주는 오성그룹의 정보 수집능력을 간과하지 않았다.

    “오성을 끌어안으실 생각이십니까?”

    “싫든 좋든 한국의 경제에서 오성을 제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경계는 하면서 언제든 싹을 잘라낼 준비는 하고 있어야겠지요. 심석우의 행보는 어떻게 예정되어 있습니까?”

    “신한국정치포럼을 이용해 여야 소장파 의원들 위주로 작업을 시작한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내년 하반기에 본격적인 총선체제로 신당을 결성한다는 계획입니다. 오성그룹에 주도권을 준 게 아쉽긴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도 본격적으로 심석우를 지원할 예정입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익은 밥을 먹지 않게 시기를 최대한 조율할 필요가 있었다. 시기를 잘못 선택해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닌 만큼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만 했다.

    “내년부턴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할 텐데, 우리 계획을 박화수 이사에게 전달은 했습니까?”

    “미묘한 내용이 많아서 아직 연락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국방부와 무기 개발 건으로 한국에 들어가야 하니 그때 만나서 설명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5년 가지고는 너무 짧습니다. 최소한 10년은 보장돼야 합니다. 이 점을 설명하면 박화수 이사도 이해하리라 봅니다.”

    황태수는 경환 앞이었지만,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화수는 대선이 끝남과 동시에 SHJ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황태수에게 밝혔다. 자신은 정치보단 기업경영, 그것도 세계를 아우르는 SHJ에서 마지막 인생을 불태우겠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어 황태수를 난처하게 하고 있었다. 한국이 미국과 같이 4년 중임제였다면 이런 고민도 하지 않았겠지만, 5년 단임제는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아주 짧은 시간이란 사실이 경환의 고민인 것을 황태수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서 방방 뛸 박화수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황태수는 고개를 흔들었다.

    “백악관이 다른 제안을 해 왔는데, 골치 아프네요.”

    황태수의 난처한 모습을 발견한 경환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화제를 바꿨다. SHJ에너지의 지분 15%를 500억 불에 넘기고 신무기에 대한 개발과 판매를 승인받은 일은 미국 경제계의 큰 이슈였다. ITER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ITER 자금의 한 축을 담당하는 미국이 SHJ에너지 지분을 인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이 SHJ의 개발상황에 따라 ITER를 탈퇴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ITER와 연합한 방산업계의 집요한 로비에 직면한 백악관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무리한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북미 관계가 교착된 상태에서 우리에게 이 문제를 풀라는 얘기가 저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 회장님을 초청했다는 명분이라고는 하지만, 방산업계의 압박을 다른 쪽으로 풀겠다는 생각이라고 봅니다.”

    “등 떠밀며 가긴 싫은 곳인데, 이거 참.”

    “북한은 우리에게 득이 하나도 없습니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니 제안을 거절하시죠.”

    북한의 핵문제가 미국 정치계의 화두로 잡아가면서 제네바 핵합의를 거부한 앨 고어 행정부가 다시 도마 위에 올려졌지만, 북미 간 상호 불신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이라크 전쟁에서 아직 미군을 빼지 못하고 있는 백악관은 북핵 해결을 위해 우선 협상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북한에게 끌려다닐 수 없다는 공화당 내부의 반발에 부딪혀 협상시도도 제대로 준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마침, 경환은 초청하고 싶다는 북한 정부의 의사를 접한 백악관은 특사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SHJ에 했지만, 경환은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회장님, 3대 세습체계를 인정받으려는 꼼수인데 우리가 들러리 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도 딱히 갈 생각 없습니다. 무턱대고 백악관의 요청을 거절하는 거보다는 방문일정을 12월 초로 미루세요. 두 달 사이에 미국이나 한국에 상황이 발생하면, 자연스럽게 취소될지도 모르니까요.”

    황태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끔은 경환의 말이나 결정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경환의 뒤에 보이지 않는 정보조직이 있을 거란 생각도 했었지만, 경환을 가까이에서 봐온 15년 동안 SHJ시큐리티를 제외하곤 다른 조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경환의 개인적 능력이라고 치부하기엔 어딘가 이상했지만, 황태수는 경환의 지시에 토를 달고 싶진 않았다.

    스위스 남동부에 위치한 생모리츠는 유럽의 부호들이 즐겨 찾는 고급 휴양지로 숲과 호수, 특히 알프스 영봉에 둘러싸여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사계절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생모리츠에서도 최고급 호텔인 수브레따 하우스엔 서너 명의 사내가 모여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호텔 전체를 철통같이 경계하는 경호원들 사이에서 호텔 출입은 통제되고 있었고 회의실에선 간간이 SHJ란 이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거 같습니다. SHJ가 이렇게 클 줄은 예상 밖이네요.”

    “조지 부시가 낙마했을 때 강하게 쳐 내야 했습니다. 지금은 백악관까지 움직이고 있고, 특히 FRB마저 존 매케인의 기세에 눌릴 정도로 SHJ의 영향력이 커졌습니다.”

    “바보 같은 딕 체니를 위시한 네오콘 놈들이 일을 꼬이게 만들었어요.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무턱대고 덤벼들다니. 그나저나 제임스란 인간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입니까? 차입금이 1불도 없다는 사실이 정말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사내들의 분기탱천한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팔짱을 낀 채, 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SHJ가 퀄컴을 인수했을 때만 해도 크게 신경 쓰이는 기업은 아니었다. SHJ구글을 설립하고 기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려 할 때, 자신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기업의 확장은 필연적으로 자금이 동반되어야 했고 자금이 SHJ에 들어가는 순간, SHJ에 대한 통제권도 자연스럽게 딸려 온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SHJ는 철저한 자금운용으로 차입금 없이 기업을 확장했고, 겨우 앨 고어를 통해 SHJ퀄컴의 지분 15%가 공개됐을 뿐이었다. 긴 침묵을 깨고 사내의 입이 열렸다.

    “SHJ의 자금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SHJ시큐리티의 보안 능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자세한 수치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현금과 일년내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을 포함하면 최소 1조 불에서 최대 2조 불까지 보고 있습니다.”

    기가 막혔다. 2조 불 정도는 대세에 큰 영향을 줄 자금력은 아니었지만, 일개 사기업이 2조 불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경환의 개인적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SHJ를 무너트리겠다는 마음만 먹는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뒷수습이 만만치 않았다. SHJ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었고 미국이 아닌 세계 경제에 끼칠 여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일 시급한 건 철저히 가려진 SHJ의 내부 정보를 어떻게 입수하느냐에 있었다. 사내의 미간이 좁혀졌다.

    “네오콘과 딕 체니가 벌인 일로 인해 제임스 리의 경계심이 지금 이 모양을 만든 원인입니다. SHJ 내부 정보를 입수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겁니까?”

    “그게 SHJ시큐리티의 보안이 워낙 철저하고, SHJ 내부자를 매수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SHJ타운을 천국으로까지 표현하더군요. 어렵사리 내부에 진입한 인원들도 빠르게 적발되거나 스스로 자수를 하는 형편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NSA도 실패한 곳이 SHJ란 사실을요.”

    사내의 고민이 깊어져 갔다. 버리자니 후폭풍이 감당이 되지 않았고, 끌어안자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험성이 존재하는 SHJ였다. 딕 체니가 나서지만 않았다면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후회해봐야 엎어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었다.

    “저, 우선 회유를 시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SHJ시큐리티도 배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는 모습이지 않습니까?”

    “그렇겠죠. 그렇지 않았다면 존 매케인을 통해 FRB와 대립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말을 계속해 보세요.”

    “강압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내전까지 각오해야 합니다. 전투인원만 만 명이 넘어가는 SHJ시큐리티의 능력은 그만큼 우리가 우려할 수준까지 도달했다는 분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의 피해도 각오하지 않는다면 쉽게 선택할 방법이 아니죠.”

    “서론이 너무 깁니다. 다 아는 사실을 들추지 말고 요점만 말하세요!”

    수장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방안을 제시하던 사내가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탁자에 떨어트렸다. SHJ시큐리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공권력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긴장하던 사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현재 SHJ는 우리가 통제하는 대체에너지 개발뿐만 아니라 우주왕복선 개발과 인공지능, 양자컴퓨터 개발에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또한, 보잉과의 합작으로 전투기 사업을 포함한 신형무기 개발까지 진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임스 리를 우리 조직이 품을 수만 있다면, 그 기술은 고스란히 우리의 통제에 놓이게 됩니다. 결론은, 우리의 조직과 연이 있는 빌 게이츠를 통해 많은 것을 던져주며 회유를 시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빌 게이츠요?”

    MS가 SHJ와 협력을 하면서 IT를 주도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빌 게이츠 개인만 보더라도 SHJ홀딩스의 지분 5%를 가지고 있었고, 장녀인 제니퍼가 SHJ타운에 거주하며 MS와 SHJ가 혈연으로 엮이게 될 거란 보고를 받은 기억을 떠올렸다.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해도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해 보였다. 이 제안이 먹히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다른 방안을 찾아도 늦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부조직을 이용해 빌 게이츠에 접근해 보세요.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요즘 들어 서버가 다운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어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있었다. 당연히 SHJ시큐리티 도발이란 심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SHJ시큐리티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사내는 피식 웃음을 보였다. 손아귀에 쥘 수 없다면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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