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30화 (207/264)
  • #230

    다시 사는 인생 - 230

    ‘삐, 삐, 삑~.’

    강남 테헤란로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기도 전에 유턴을 시도하던 승용차 한 대가 콘솔박스로 신호등을 조작하는 교통경찰에게 적발되어 갓길로 끌려 나왔다. 검은색 중형차로 다가선 경찰이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거수경례를 보냈다.

    “신호 위반을 하시면 어떡하십니까? 사고가 날 수도 있었습니다. 면허증 제시해 주십시오.”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바쁜 일이 있어, 마음이 조급했나 봅니다.”

    운전석에서 차 문을 열고 나온 사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지갑에서 꺼낸 면허증을 건네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내가 급히 다가가려 했지만, 운전자의 제지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벌점 15점과 벌금 6만 원입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시오.”

    “아, 네. 면목없습니다. 제가 큰 실수를 범했네요.”

    “의, 의원님!”

    조수석에 있던 사내의 의원이란 소리에 교통경찰은 면허증에 적혀진 이름을 다시 살핀 후, 운전자를 바라보다 사색이 되었다. 방송과 신문지상에 큰 이슈로 자리 잡고 있는 인물이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모습에 범칙금 고지서를 들고 있던 교통경찰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발행된 고지서를 찢을 수도 없던 교통경찰의 당황한 모습에 국회의원인 운전자가 고지서를 뺏다시피 받아들었다.

    “제가 워낙 급해서 그럽니다.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심, 심 의원님, 제, 제가 오히려 실수를······.”

    말까지 더듬는 교통경찰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심석우가 고지서를 손에 쥐고 급히 차에 올라타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통경찰은 한참을 자리에서 뜨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목격하던 소수의 행인 뒤에서 연신 카메라 셔터가 터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10년간의 야당생활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재탈환해 여당의 대표를 맡은 황국철은 깊은 감회에 빠져들어 있었다. 2007년 대선은 여당의 경선에서 이미 판가름나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여당의 경선은 그만큼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장의 경험으로 지지도에서 앞선 이상민은 당내 보수파와 보수언론을 앞세워 치밀하게 경선을 준비해, 당 지지도에서 앞선 현 대통령의 발목을 잡았다. 그때 배후를 알 수 없는 서류가 자신의 손에 들어오지 못했다면 지금 청와대 주인 자리는 이상민의 것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상민의 비리를 낱낱이 밝힌 서류를 적재 적기에 터트려 이상민의 후보사퇴를 종용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정치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천운이었다.

    황국철은 자신의 그릇이 청와대 주인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단지 여당을 장악해 차기 대권 주자를 자신의 손으로 키워 영향력을 지속하려 했지만, 2008년 총선에 무소속으로 등장한 심석우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무소속인 심석우의 등장을 애써 무시했었지만, 신한국정치포럼이란 모임을 주도하면서 각계각층의 전문가 모임을 형성하더니 지금은 여야 젊은 의원들과 교분을 나누며 그 세를 넓히는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마땅한 당내 차기 대선 주자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심석우의 행보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SHJ가 심석우의 배후란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대표님, 지금 인터넷과 신문이 난립니다.”

    “무슨 소리요? 안 의원.”

    여당의 사무총장인 안변수가 대표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엘리시움을 급히 황국철에 보여주며 눈이 나쁜 황국철을 위해 손가락으로 화면까지 확대해 주었다.

    “심석우가 신호위반을 해 경찰에 적발되었다고 하네요. 사진과 함께 평소 고상하게 떠들던 심석우를 비판하는 댓글들이 엄청나게 달리고 있습니다. 하하하.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합니다.”

    황국철은 말없이 보도기사를 읽으며 교통경찰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안변수의 말처럼 국회의원이 교통법규를 위반해도 되냐는 댓글과 심석우에게 실망했다는 댓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간혹 잘못을 인정하고 교통경찰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우호적인 댓글도 있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자식, 자주국방과 복지가 어떠냐는 둥 떠들더니, 한 방에 가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당 차원에서 절대 이 문제에 나서지 마세요.”

    “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넘어가라는 말입니다.”

    정색하는 황국철이 이해가 되지 않던 안변수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대표실에 오기 전 이미 대변인을 통해 심석우를 교묘히 비난하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안변수가 말을 얼버무리자 낌새가 수상하다고 느낀 황국철의 노기 띤 음성이 다시 들렸다.

    “이 기사를 실은 곳이 오중일보 아닙니까? 오중일보 뒤에 오성그룹이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고요. 신한국정치포럼을 누가 지원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사무총장이란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짧으니.”

    “그, 그럼. 이 기사가······.”

    “이 기사는 심석우가 본격적으로 포퓰리즘을 시작했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당신 국회의원 배지 달고 신호위반 한 적 없습니까? 경찰에 단속되더라도 심석우처럼 고개 숙인 적이 있기나 합니까?”

    신한국정치포럼을 오성그룹이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성그룹을 시작으로 대현중공업그룹과 대현자동차그룹, 대후그룹, 제일그룹까지 이 모임에 전문가 내지는 관심을 보내고 있어 여당의 고민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자신의 실수를 직감한 안변수는 기자실로 들어가는 대변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대표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신문기사와 댓글을 살피던 황국철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아버렸다.

    화무십일홍.

    꽃이 아무리 붉어도 십 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10년간의 꿈같은 여당생활을 접고 돌아온 야당생활은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을 연이어 패배하면서 야당의 살림살이는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정권 재탈환을 목표로 대선을 준비하고 있다곤 하지만, 누구도 성공을 확신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박원빈 당 대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표님, 이 기사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원내대표인 강영수가 건네준 태블릿 PC에 박원빈이 시선을 돌렸다. 심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박원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신한국정치포럼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의원들 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저, 그게, 10여 명의 의원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계파를 통해 설득작업은 하고 있지만, 큰 이슈가 한번 터지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여당에서도 5명 정도가 줄타기하는 거 같습니다.”

    “심석우 이 친구,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군요.”

    “아직은 세가 적지만, 보궐선거를 통해 의원 수를 확보해 지지를 굳혀간다면 원내 교섭단체로 성장할 수도 있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박원빈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신한국정치포럼이 정당 역할을 할 수는 없었지만, 의원 수를 20명으로 확보하게 된다면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2년 앞으로 다가온 총선과 대선이 심석우가 이끄는 신한국정치포럼에 의해 소용돌이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SHJ는 어떻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심석우가 L&K재단을 나오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해 아직은 서로 각을 세우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피는 물보다 진할 테니까요. 전임 대통령과 이경환 회장은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SHJ를 통해 심석우와의 연합을 추진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라고 보는데.”

    박원빈의 머리에 퇴임해 고향으로 귀향한 노기찬이 떠올랐다. 노기찬을 통해 경환과 선을 대려는 생각을 해봤지만, 노기찬은 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며, 자신의 제안을 거절해 버렸다. 자신의 이상이 기득권과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을 자책한 노기찬은 고향에 칩거하며 저술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박원빈의 입에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리와의 연합이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현재 심석우는 보수진영의 지지도를 갉아 먹고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 중국과의 영토분쟁에 소극적인 청와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세를 키우는 중입니다. 비판대상엔 야당인 우리도 포함되어 있고요.”

    “심석우가 L&K재단에 있으면서 제일 신경을 썼던 게 직업훈련원과 경제연구소였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수도권과 호남에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호남에서의 심석우 이미지는 나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 지지세 일부도 잠식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박원빈도 심석우가 쉽게 연합에 응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심석우의 행보는 당내 계파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을 박원빈도 모르지 않았다. 심석우의 꿈이 대권을 향한 것이라면 자신의 무덤이 될 수밖에 없는 여당 혹은 야당과의 연합은 안중에도 없어야 했다. 아무리 대중적 지지도가 높더라도 정치적인 뒷받침이 없고는 대권 도전은 불가능했지만, 심석우의 뒤를 신한국정치포럼이 받쳐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박원빈의 머릿속으론 SHJ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팟, 팟.’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기자실에 심석우의 모습이 나타나자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를 터트렸다. 며칠 잠을 자지 못했는지 심석우는 초췌한 모습으로 단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심석우의 등장에 기자들의 질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질문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우선 국회의원 신분으로 물의를 일으킨 점 국민께 사죄합니다.”

    말을 잠시 끊은 심석우가 단상을 비켜서 90도 각도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혔지만, 심석우를 물어뜯기 위해 기자들의 눈은 더욱 날카롭게 빛날 뿐이었다. 단상의 중앙으로 다시 자리를 잡은 심석우가 마이크로 입을 가져다 댔다.

    “9월 19일 오전 10시경 강남 테헤란로 사거리에서 교통위반을 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법을 수호해야 할 국회의원 신분으로 이 같은 범법행위를 한 제 행동을 변명하진 않겠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국민들의 질타를 겸허히 수용하며, 저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로 삼겠습니다. 저는 잘못된 제 행동을 반성하며, 앞으로 일 년 동안 대중교통을 이용해 의정활동을 하겠습니다. 국민들께 실망을 드린 점,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의원님의 지지도가 하락하고 있는데, 오늘 기자회견은 지지도를 의식한 것인가요?”

    “대중교통을 이용하시겠다는 말씀, 믿어도 됩니까?”

    신호위반 하나로 기자회견까지 열린 상황이 우습긴 했지만, 차기 대권 주자로 심석우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모두 호의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결과는 있는데 과정이 빠진 거 같습니다. 평소 의원님의 성격으론 교통위반을 할 상황이 아니었는데 무슨 이유가 있으셨던 건가요?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 저는 오중일보 곽순길 기자입니다.”

    보수의 중앙에 있던 오중일보는 기존 보수언론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며 보수진영의 분열을 획책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다른 기자들의 눈총이 곽순길에게 집중되었지만, 곽순길은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심석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지도를 위한 기자회견은 절대 아닙니다. 국민들의 질타에 용서를 구하기 위해 나선 거뿐입니다. 무소속인 제가 찾은 방법이 이거밖엔 없었습니다. 복지 관련 법률을 제안하기 위해 전날 밤을 새웠습니다. 공교롭게 19일 아침에 제 아내가 늦둥이를 출산하고 말았습니다. 아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과 출산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맘이 너무 급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잘못된 제 행동을 두둔할 생각은 없습니다. 분명 제 행동은 법을 위반한 잘못된 것입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쉴새 없이 터져 나오던 기자들의 질문은 심석우의 답변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법률제안 때문에 밤을 새우고 아내의 출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말에 반박할 정도로 머리 나쁜 기자들은 없었다. 고개를 90도로 다시 숙인 심석우가 기자실을 빠져나가자, 심석우를 잡아먹으려던 기자들은 허탈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내의 출산을 지키지 못한 건 좀 심했습니다. 제가 요새 와이프의 등쌀에 잠도 제대로 못 잡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원실로 향하는 심석우의 뒤에서 그를 보좌하는 박화수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다음날 오중일보 정치면엔 심석우의 기자회견 소식과 함께 늦둥이를 안고 있는 심석우의 사진이 실렸다. 잠시 떨어지던 지지도는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고, 신한국정치포럼을 정경유착으로 해석하던 국민들의 시선이 심석우 개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피곤함에 절어 버스와 지하철에 널브러져 잠들어 있는 심석우의 사진이 개인 블로그를 통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고, 심석우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는 온라인의 댓글 수와 비례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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