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29화 (20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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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29

    “SHJ타운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임스 맥너니 회장님.”

    “하하하, 오히려 제가 감사드립니다. 과연 SHJ타운은 제 상상을 초월하네요. 오늘의 만남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보니 회장님과 저는 같은 이름이군요.”

    넉살 좋은 웃음으로 경환과 악수를 한 제임스는 경환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휴스턴이 10기, 서산이 5기, 총 15기의 전용기를 운용하고 있는 SHJ는 독일과 노르웨이, 호주의 SHJ타운이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하면서 노후기종의 교체를 포함해, 20기의 전용기와 15기의 헬리콥터를 구매할 계획을 세우고 각 항공기 제작사의 견적을 받는 중이었다.

    현재 SHJ에서 운영하는 전용기는 경환의 개인 전용기인 글로벌 익스프레스를 포함해 대부분 봄바르디에와 에어버스의 손을 거친 것들이었고, 보잉의 전용기는 단 2기밖에 없었다. 미국기업인 보잉을 무시하고 캐나다의 봄바르디에와 특히, 보잉의 최대 경쟁사인 프랑스의 에어버스의 전용기를 구매한 SHJ가 제임스는 맘에 들지 않았다. 경환의 개인 전용기 교체를 시작으로 대규모의 구매의사가 시장의 화두로 부상되면서, 제임스는 보잉의 실추된 이미지를 만회하기 위해 이 사업을 손에 쥐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태연한 경환과 달리 제임스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수없는 구애에도 경환과의 만남은 쉽게 이뤄지지 않아 제임스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봄바르디에와 에어버스가 휴스턴에 지사를 설립해 SHJ와의 물밑협상에 사활을 걸고 있었지만, SHJ는 보잉사의 견적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펜타곤과 백악관의 연줄을 동원해 겨우 만남이 성사된 만큼 제임스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어려운 발걸음을 하셨습니다. SHJ매니지먼트를 통해 보잉의 견적은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조건이더군요. 제가 말을 잘 돌리지 못합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이해를 부탁합니다.”

    “어디나 장사는 똑같지 않습니까? 금액은 사람이 결정하는 겁니다. 우리 보잉은 SHJ의 조건을 100%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임스는 반짝거렸다 사라지는 경환의 눈빛을 미처 보지 못했다. 최대한 태연하기 위해 애쓰는 제임스였지만, 어색한 웃음은 숨길 수 없었다. 경환은 제임스의 초조함에 불을 지필 필요를 느꼈다.

    “이번 전용기 구매는 SHJ그룹에게도 중요한 사업입니다. 아시겠지만, SHJ그룹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지역에 SHJ타운을 설립할 예정입니다. 지금 운영하는 전용기는 최대 3배로 확대를 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더군요. 그렇다 보니 이번 구매는 신중히 결정할 생각입니다.”

    “그, 그러셔야죠. 전체 견적금액에서 10%를 인하하겠습니다. 그리고 리 회장님의 전용기를 보잉 B787 VIP급으로 개조 및 내부 인테리어를 SHJ가 원하는 조건으로 우리가 제공하겠습니다.”

    “개조와 인테리어만 해도 6천만 불이 넘는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회장님의 배팅이 너무 크군요. 하지만 저는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전용기 선정은 철저히 안전성과 효율성에 기초를 두고 선정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SHJ매니지먼트는 경환의 전용기를 놓고 에어버스의 A380과 보잉의 B787을 비교하고 있었지만, 실무진의 의견은 A380으로 기울고 있었다. B787의 가격은 1억 5천만 불로 A380에 비교해 월등히 저렴했지만, 그룹 회장의 전용기란 자부심에 가격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제임스는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1불의 차입금도 없이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는 경환에게 할인을 운운한 것은 분명 자신의 실책이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봤지만, 능구렁이를 삶아 먹은 경환의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맥너니 회장님, 제가 다른 제안을 할까 합니다. 사실 미국을 대표하는 보잉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요.”

    “그, 그야 그렇죠. 플랜트와 IT, 무선통신을 대표하는 곳이 SHJ라면, 항공기 제작을 대표하는 곳은 분명 보잉이니까요. 말씀드렸듯이 우린 SHJ의 조건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제안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천하의 보잉이 지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민간항공기 제작은 에어버스, 전투기 제작은 록히드마틴과의 경쟁에서 보잉은 예전의 명성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SHJ의 발주량 20기는 사실 보잉의 경영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세계기업으로 성장한 SHJ가 주는 영향력은 200기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경환의 전용기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했다. 제임스의 화려한 미사여구에 경환의 미소가 입에 걸렸다.

    “보잉이 6세대 전투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전투기라는 명성이 록히드마틴의 F-22에 넘겨주고 5세대 전투기 사업도 F-35에 넘어가면서 보잉의 전투기 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보잉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를 개발하자는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경환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제임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SHJ의 영향력을 이용할 생각뿐이었지 전투기 사업은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동의한다더라도 BCA(민간항공제작)와 IDS(종합방위시스템)로 나뉜 보잉에서 IDS는 자신의 권한만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사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풍부한 자금력을 갖춰다 하더라도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고요. 지금 이 제안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전용기 판매가 물 건너가더라도 경환의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상을 구기며 미간을 좁히는 제임스의 모습을 보는 경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제임스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았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록히드마틴은 6세대 전투기를 인공지능에 의한 무인기를 개념으로 잡고 있더군요. 이에 반해 보잉은 X-32가 패배한 후, 야심 차게 준비하는 6세대 전투기 사업으로 F/A-18을 2030년까지 대체한다는 명분으로 F/A-XX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계시더군요. 제가 만약 펜타곤이라면 록히드마틴의 손을 다시 들어 주겠습니다.”

    “어떻게? 그, 그걸.”

    “전투기 개념은 아니지만, HTV-2 프로젝트는 로켓에 의해 대기권 밖에서 마하 20의 속도로 비행하는 항공기 개념이고, 내년에 실험한다지요? 그리고 UCLASS는 정찰과 감시, 타격이 가능한 무인기고요. 보잉이 유인기에 의존할 때 록히드마틴은 무인기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싸움이 된다고 보십니까?”

    제임스는 할 말이 없었다. 6세대 전투기 사업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밀이었지만, 경환은 세세한 부분까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SHJ시큐리티의 정보력이 NSA나 CIA와 비등하다는 소문을 새삼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보만 가지고는 될 수 있는 사업이 아니었다.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보잉의 IDS사업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SHJ의 참여를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SHJ엔 이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SHJ기술연구소와 SHJ테크놀러지가 개발을 시작한 지, 5년이 넘었습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F-35에 필적할 만한 기술력을 확보했다고 자신합니다. 보잉이 아니더라도 자체 제작을 할 여건이 되었단 말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그 큰 파이를 왜 우리와 나누려고 하는 겁니까?”

    경환은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목을 축인 경환이 서류철을 제임스에게 건넸다. 별 뜻 없이 서류철을 건성으로 넘기던 제임스의 몸이 의자에서 떨어져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전투기 제작의 인프라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막강한 보잉의 로비력도 필요했고요. 이 정도면 질문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까?”

    경환의 대답에도 제임스의 시선은 서류철에 묶여있었다. 세세한 기술은 당연히 감췄겠지만, SHJ테크놀러지의 인공지능과 결합한 전투기 제원과 설계도 일부는 제임스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기술적 검토만 통과한다면 F-22와 F-35에 뺏긴 명성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개발 중인 6세대 전투기에도 접목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침내 제임스가 고개를 들어 경환을 바라봤다.

    “기술적 검토를 할 수 있게 자료를 줄 수 있습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직 보잉이 우리의 파트너는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지분 50 대 50으로 신규법인을 만들고, 경영과 인사는 보잉이 재무와 기술연구소는 SHJ가 가지는 조건입니다. 또한, 생산은 보잉이 주관하되, SHJ의 인력이 참여해야 하고, 판매에 대한 권리는 보잉에게 있지만, 미국을 제외한 SHJ타운이 있는 지역의 판매는 SHJ가 가지는 조건입니다. 물론 판매원가 산출은 공동으로 작업해야 하고요.”

    “검토해 보겠지만, 나쁜 조건은 아닌 거 같군요.”

    “보잉의 엔진기술만 접목된다면, 일 년 안에 최종 설계도는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이미 시뮬레이션까지 마친 상태니까요.”

    지루했던 제임스와의 협상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판매지역 일부를 SHJ에 넘긴다는 게 제임스를 찝찝하게 했지만, 지금은 찬반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혹시라도 록히드마틴에 이 기술이 들어간다면 보잉의 IDS는 헤어날 수 없는 침체기에 들어설 수도 있는 문제였다. 법인 설립에 대한 인허가작업과 로비를 보잉이 맡기로 하고, SHJ의 전용기 12대의 발주서를 손에 쥔 제임스는 의기양양하게 SHJ타운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도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너무 나서다가는 뒤에서 총 맞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를 내 준 것도 아니니 아쉬워하지 마세요.”

    경환을 보좌해 이번 협상에 참석한 최석현이 입맛을 다셨다. 수많은 토론과 회의를 거쳐 보잉을 SHJ의 전투기 사업 파트너로 선정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단지 엔진기술과 생산라인만 제공하는 보잉에게 너무 큰 떡을 안겨줬다는 생각이 최석현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봐온 경환의 이기심으론 통 이해되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제작에 대한 인프라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술만 가지고 덤빌 사업이 아닙니다. 보잉과 공동으로 제작할 전투기는 우리가 가진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잉과의 합작으로 인프라를 구축하고 로비력을 확보한 다음, 보잉의 태도를 봐가며 천천히 움직여도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를 주고 둘을 얻으면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니까요.”

    최석현은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산업계 진입은 다른 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벽이 높았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라도 판매할 곳이 없으면 그 기술은 사장되거나 뺏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경환은 보잉을 방패로 삼아 높은 벽을 넘을 생각이었다. SHJ기술연구소엔 제임스에게 보여준 모델보다 최소한 2세대 앞선 모델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제니퍼, 부모님에게 연락은 자주 드리고 있니?”

    “네, 아저씨. 매일 전화를 드리고 있어요.”

    한식으로 차려진 식탁에서 경환은 희수의 옆에 가지런히 앉아 식사하는 제니퍼를 기특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모를 떠나 먼 휴스턴까지 온 강단 있는 제니퍼는 경환과 수정의 우려와는 달리 휴스턴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다고는 하지만, 제니퍼의 한국어 실력은 희수에 못지않았다.

    “여보, 희수 좀 어떻게 해 주세요. 여자애가 매일 싸움만 하고, 내가 창피해서 학부모 회의에 참석할 수도 없다고요. 희수 별명이 뭔지 아세요? 타운의 마녀라고 합디다. 여자애 별명이 마녀가 뭐예요? 마녀가.”

    “치, 엄만 나만 가지고 뭐라 그래. 두들겨 맞는 거보단 낫잖아.”

    “어머, 어머. 얘 말하는 거 좀 봐. 너하고 제니퍼 둘을 섞어서 딱 반으로 쪼갰으면 좋겠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는 희수는 수정의 과보호에 부쩍 말대꾸가 늘고 있었다. 수정의 말처럼 다소곳한 제니퍼와는 정반대로 희수는 와일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건 경환의 머릿속에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희수의 죽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을 통해 호신술과 격투기를 가르친 탓도 없지 않았다. 경환은 두 모녀의 말다툼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난 지금의 희수 모습 보기 좋아. 제니퍼는 제니퍼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 희수는 희수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잖아. 희수 너 그렇다고 엄마한테 말대답하는 건 아빠가 용서 못 해. 아빠하고 평생 살아줄 사람은 엄마니까 난 엄마 편이야.”

    경환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싸해진 분위기에 수정과 희수의 눈치를 살폈다. 경환의 말은 수정과 희수의 불만만 키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눈까지 흘기는 수정의 싸늘함에 경환은 이해하기 힘든 여자의 속마음에 고개를 흔들다 화살을 정우로 돌렸다.

    “정우 너는 연구도 좋지만, 아직 미성년이야. 연구에 매달리지만 말고 매일 집에 오도록 해. 제니퍼가 이 집에 왜 있는지도 좀 생각해 보고.”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정우가 식사에 열중하자 경환은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봤다. 아이들이 자신의 품을 떠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썰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은 철없는 희수와 너무 철이 든 정우, 정우만 바라보는 제니퍼, 수정과 함께 지켜야만 할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들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경환도 집에서만큼은 수정과 희수에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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