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28화 (20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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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28

    SHJ그룹 본사가 있는 휴스턴은 호주와 유럽의 SHJ타운이 완공됨에 따라 대규모의 파견인원을 선발하고 있었다. 계열사에서 모집된 2천 명의 인원을 유럽과 호주로 1차 파견을 완료했고, 지금은 같은 규모의 2차 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의 서산 SHJ타운도 호주와 유럽에 파견될 직원을 선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SHJ의 방침은 직원 단독 부임을 불허하고 있었기에, 아무리 파견을 원하는 직원이라도 가족의 동의를 얻지 못한 직원은 이번 파견에서 제외됐다.

    “회장님, 커피 한 잔 드십시오.”

    “고마워요. 혜원 실장.”

    전용기 사무장으로 경환을 수행했던 김혜원이 머그잔을 조심스럽게 책상에 내려놓고는 계열사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정리해 머그잔 옆에 가지런히 올렸다. 하루나가 SHJ유럽본사 사장으로 휴스턴을 떠나며 자신의 후임으로 김혜원을 추천했고 경환은 두말없이 하루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김혜원의 비서수행 능력은 흠 잡을 곳이 없었지만, 하루나의 그것과는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부회장과 쿡 사장이 올라오고 계십니다. 회의가 끝나시면 바로 제임스 맥너니 회장의 방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알았어요. 사무실에서 한국말을 쓰니 한국에 있는 기분이 드네요. 고마워요.”

    김혜원이 비서실을 맡으면서 달라진 점이라면 한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내년이면 20년이 되지만, 한국은 경환에겐 애증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모국이었다. 세계지도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 정도로 작은 땅덩어리였지만, 그 작은 땅도 남북으로 갈리고, 갈라진 남에서도 동서로 쪼개지고 이념으로 부딪히며 서로 대립하는 모습에서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계는 빠르게 변화되어가고 있었지만, 소모적인 대립으로 정체하는 한국을 포기하려 했지만, 가슴에 흐르는 뜨거운 피는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뭘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들 앉아서 같이 커피나 한잔 합시다.”

    우두커니 창밖을 바라보던 경환은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15만 명을 넘는 SHJ의 직원 중에서 황태수와 린다는 경환의 부재 시에 SHJ를 끌고 나가는 중심이 될 인물들이었다. SHJ의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일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두 사람은 애당초 권력엔 관심이 없는 듯, 협력을 통해 경환의 보좌에만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유니버스 1호는 ISS와의 도킹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예정된 작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NASA에선 오비털사이언스로 우리의 지원이 끊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고요.”

    “지원은 예정대로 진행하세요. 언젠간 우리 스스로 일어서야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볼튼 사장이 많이 초조해하던데, 두 분이 잘 다독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우주정거장 계획이 발표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만큼 조급해하지 않도록 조처를 하겠습니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SHJ는 막대한 자금을 분산하며 내실을 다지는 작업에 전념했다. 이 면에는 보수적인 자금운용이 필요한 때라는 린다의 강력한 주장을 경환이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HJ유니버스와 SHJ테크놀러지, SHJ에너지 등 미래사업에 대한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내실작업은 존 매케인과의 밀착된 관계에서 정부의 보이지 않는 지원으로 더욱 그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2년 후면 존 매케인도 백악관을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경환은 차기 정부와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부회장님, 백악관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SHJ에너지의 지분 15%를 넘긴다 해도 경영권 방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차피 핵융합발전소가 상용화에 성공하더라도 미 정부의 지원이 없다면 쉽게 판로를 찾기 어려우니까요. 적성국을 제외한 동맹국에 무기판매를 허용하겠다는 조건이 250억 불의 가치가 있는지는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백악관은 SHJ에너지의 지분 15%를 500억 불에 인수하는 조건으로 기술연구소의 무기개발을 인정하고 미국이 인정한 동맹국에 대한 수출을 인정하겠다는 제안을 던졌다. 경환은 존 매케인의 얕은수에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SHJ도 핵융합발전소만큼은 미국의 막후 지원이 절실히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린다가 급히 황태수의 말을 이어받았다.

    “우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250억 불에 5%의 지분을 인수한 노르웨이와 호주가 반발할 수도 있습니다. 개발무기에 대한 내막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래저래 백악관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든 기분입니다.”

    “이 제안이 우리의 일방적인 손해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가요? 당장 250억 불이 허공에 뜨게 됩니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레임덕이 시작될 존 매케인을 버리고 차기 정부와 판을 다시 짜는 게 어떻겠습니까?”

    “차기 정부가 우리에게 호의적이란 보장은 없습니다. 이 문젠 존 매케인이 백악관에 있을 때, 마무리를 져야 합니다.”

    린다는 경환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딕 체니와 앨 고어로 인해 정부의 간섭과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SHJ의 사활을 걸고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며 소모전을 벌인 일들이 린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존 매케인과의 밀월 관계는 SHJ의 성장과 발전에 한 축이 되었지만, 린다는 경환이 무턱대고 존 매케인을 밀어주진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존 매케인은 기술연구소의 개발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조건을 들고 나왔겠지요. 받아들입시다. 무기개발에 대한 족쇄가 풀리는 거니, 우리도 손해 보는 건 아니니까요. 그 대신 조건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동맹국 개념에 SHJ타운 혹은 SHJ지사가 설립된 곳을 포함하도록 협상하세요.”

    “후후, 기술연구소에서 개발될 신형무기를 본다면 존 매케인도 입에 거품을 물겠군요.”

    SHJ지사는 일부 위험지역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 퍼져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손실이 엄청난 건 사실이지만, 신형무기의 우월성만 입증할 수 있다면 250억 불 이상의 가치는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경환의 복안이었다. 황태수와 린다를 통해 존 매케인의 얼굴을 살려주면서 죽는시늉만 하면 되었다.

    “자, 이 건은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호주와 유럽으로 빠져나간 인원을 충당할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겠죠?”

    “제일 급한 게 SHJ시큐리티입니다. 휴스턴에서 2천 명, 서산에서 천 명이 빠져나가는 바람에 경비팀 인원이 많이 부족하다는 보고입니다.”

    “미국과 한국에 국한된 인원 선발을 다른 지역까지 확대하라고 하십시오. 물론 철저한 충성심과 인격을 갖춘 자에 한한다는 선발기준은 절대 변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L&K재단에서 운영하는 직업훈련원의 인원을 잘 활용한다면, 인원수급엔 큰 차질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25개 주와 한국 4개 지역에 분포된 직업훈련원의 인원 대부분이 SHJ에 흡수되고 있습니다. 충성심도 남다르고요.”

    L&K재단이 운영하는 직업훈련원을 졸업한 학생들은 80% 이상 SHJ로의 취업을 희망했고, SHJ는 성적보단 인물의 됨됨이를 가려 그들의 취업을 받아들였다. 사회의 하부계층이었던 직업훈련원 학생들은 자신에게 기회를 제공한 SHJ에 대한 충성도가 다른 직원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경환이 십 년 넘게 직업훈련원에 공을 들인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이었고, 독일과 노르웨이, 호주도 각 지역에 L&K 직업훈련원이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미래를 대비하는 건 사업만이 아닌 사람도 포함된다는 경환의 생각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야! 존, 저 애는 누구야? 우리 학교에 저런 애가 있다니, 내가 휴스턴에 오길 아주 잘한 거 같다.”

    “케빈! 정신 차려, 인마. 다른 여자애들은 넘봐도 되지만, 딱 두 명은 접근불가야. 저 애가 그중 한 명이니까 신경 끄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내 사전에 접근 불가능한 여잔 없다. 햐, 정말 볼수록 죽인다.”

    갈색의 긴 생머리를 휘날리고 학교 정원을 가로지르는 여학생이 케빈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입까지 벌린 채로 여학생을 쫓아가려는 케빈을 존이 막아섰지만, 9학년 답지 않게 큰 덩치를 자랑하는 케빈을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야! 케빈, 쟤는 정말 안된다니까!”

    샌디에이고 지사에서 근무하던 아버지가 본사로 발령받았을 때만 해도 친구들과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던 케빈이었지만, 휴스턴에 온 게 자신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꼬리가 하염없이 위로 치솟았다. 케빈의 시선을 의식한 여학생이 뒤를 힐끗거리며 걸음을 빨리 옮기자, 케빈은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

    급히 뛰어 나가려던 케빈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바닥을 굴렀다. 풀밭이 아닌 아스팔트 위였다면 얼굴이 망가질 수도 있을 정도로 케빈의 얼굴은 잔디밭에 파묻혀 있었다.

    “꼴에 남자라고 침을 질질 흘리니, 아주 가관이네.”

    “희수, 오해야. 난 케빈을 말리려고 했다고.”

    희수의 늘씬한 다리에 걸려 케빈이 바닥에 엎어져 있었지만, 존은 희수의 등장에 사색이 되어 자신의 무관함을 설명하기에 바빴다. 존은 인상을 구겼다. 8학년이긴 하지만, 165를 넘는 키에 어려서부터 호신술을 익혀 자기보다 덩치가 큰 남학생들과도 무술대련을 밥 먹듯이 하는 희수는 9학년인 자신도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희수에게 덤벼들었다가 깁스한 남학생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젠장! 운 좋은 줄 알아라. 네가 예쁘니까 참는 거라고.”

    학생들의 시선이 엎어져 있는 자신에게 쏠리자 케빈은 급히 일어나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 바빴다. 자신의 발을 걸어 넘어트린 희수의 늘씬한 외모에 케빈의 눈이 잠시 반짝거렸다.

    “참지 않으면 어쩔 건데?”

    “뭐? 하, 정말 어이가 없군. 여자와 싸우는 놈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게 우리 아버지의 말씀이라 참는 거니까. 혹시 미안한 생각이 든다면, 데이트 한 번으로 용서해 줄 수도 있고.”

    “케빈! 너 잠깐 나 좀 봐.”

    케빈의 어이없는 말에 헛웃음을 보이며 케빈에게 다가서려는 희수의 모습에 존이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어 케빈을 낚아챘다. 한동안 존의 과도한 몸짓을 동반한 설명을 듣던 케빈의 얼굴이 흙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케빈의 양손은 자신의 낭심을 덮고 있었다.

    “야! 사과하든지 아니면 한 판 붙든지 빨리 결정해. 나 바빠!”

    양손을 팔짱 낀 채로 케빈의 결정을 독촉했고, 케빈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여학생이 희수의 팔을 붙잡아 끌었지만, 희수는 그 자리를 벗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희수의 독촉에 식은땀까지 흘리는 케빈이 너무 가깝지 않게 자신의 낭심을 보호하며 희수에게 다가왔다.

    “미안, 내가 전학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실수했어. 용서해줘.”

    “게슴츠레한 눈으로 침 질질 흘리며 위협감을 준, 얘한테도 사과해야지 않아?”

    “내가 사과할게.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

    “빨리 가라.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일이 반복되면, 너하고 나, 둘 중 하나는 요단강을 건너야 할 거야.”

    우물쭈물하는 케빈을 존이 끌고 사라졌다. 지나가던 학생들은 희수에게 대들어 본전도 찾지 못한 전학생을 향해 혀를 찼다. 소란을 정리한 희수는 자기의 뒤에 서 있는 여학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호신술 배우라고 했잖아.”

    “희수 네가 있는데 호신술 배워서 뭐하게? 한국어 선생님 기다리시니까 빨리 집에 가자.”

    “내가 제니퍼 너 때문에 아주 팍팍 늙는다 늙어.”

    혀를 날름 내밀며 희수의 등을 집 방향으로 밀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제니퍼는 SHJ타운 중학교에 보내달라며 부모님을 졸랐다. 그 내면엔 제니퍼를 부추긴 희수의 공도 있었지만, 빌과 멜린다는 단식투쟁까지 불사하는 제니퍼의 강경한 자세에 결국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우를 사윗감으로 내심 욕심내고 있던 빌의 찬성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오늘은 정우 오빠 집에 오겠지?”

    “내가 어떻게 알아? 연구소 일에 푹 빠진 거 같던데. 적당히 좀 해라. 여잔 좀 뺄 줄도 알아야 하는 거야.”

    정우는 마커스 브라운 박사의 간곡한 요청으로 라이스 대학 천체물리학과에 입학했다. 학사과정을 2년 만에 졸업한 정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라이스 대학은 부랴부랴 천체물리학 연구소를 캘리포니아 공대 수준으로 확장했고 정우는 자연스럽게 연구소에서 석사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정우는 부전공으로 선택한 양자물리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연구소에서 밤을 보내는 일이 허다해 제니퍼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제니퍼 넌 생긴 거 답지 않게 완전 현모양처 감이다. 정우 오빠가 그렇게 좋냐?”

    “현모양처란 말 한국어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어. 좋은 말인 거 같아.”

    “어휴, 내가 너만 보면 아주 답답해 죽겠다.”

    얼굴을 붉히는 제니퍼를 위아래로 훑은 희수가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제니퍼의 굴곡진 몸은 여자인 자신도 감탄할 정도였다. 특히 가슴이 절벽인 자신에 비해 제니퍼는 티셔츠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확연한 가슴선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헐렁한 티셔츠를 내려다본 희수의 얼굴에 짜증이 배어 나왔다.

    ‘기집애, 발육은 좋아서.’

    희수와 제니퍼를 기다리던 통학버스가 클랙슨을 빵빵거리자 희수는 제니퍼의 가슴을 손으로 툭 치고는 앞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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