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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26화 (203/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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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26

    핵융합로 테스트를 끝으로 경환은 가족들을 한국에 남겨둔 채, 서둘러 휴스턴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핵융합로 성공에 따라 ITER에 참여하지 못한 각국의 공동연구 제안이 봇물 터지듯 들어오고 있었고 ITER 참여국인 미국과 일본, 중국도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더욱이 호주와 유럽의 SHJ타운 건설과 관련한 본 계약이 진행됨에 따라 경환은 휴스턴을 비울 수 없는 처지였다. 바쁜 업무를 끝낸 경환은 자신의 최측근인 황태수와 린다를 저택으로 불러들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루나는 언제쯤 돌아온다고 했습니까?”

    “많이 불편하신 가 봅니다. MOU 체결을 마치고 돌아오라고 했는데, 본 계약서 조항까지 협의를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해서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나가 내려주는 커피가 맛있었는데, 많이 아쉽네요. 그렇다고 커피 내리러 오라고 할 수도 없고.”

    경환의 하소연에 황태수는 지긋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경환도 몰랐지만, 하루나의 빈자리는 너무도 크게 다가왔다. SHJ에서도 최고의 인재들만 모여있는 비서실이었지만, 경환의 세세한 감정까지 챙기는 하루나를 대신할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본의가 아니더라도 하루나를 유럽으로 내친 사람은 자신이었기에 경환은 맘 놓고 하소연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경환의 빈 잔에 술을 반쯤 채운 후, 술병을 탁자에 올려놓은 황태수가 화제를 돌렸다.

    “프레드 톰슨이 두 가지 안건으로 제게 연락을 취했습니다. 하나는 핵융합로 프로젝트에 한국과 같은 15%의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연구소에서 개발하는 신형무기를 전량 정부에서 구매할 의향이 있다고 합니다.”

    “ITER 사무국에서도 연락을 해왔습니다. 국가 단위의 사업이지만, 만약 SHJ가 ITER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면 지분을 인정하겠다고 하더군요.”

    황태수의 말을 급히 린다가 이어받았다. 발 빠르게 움직이는 미국과 ITER의 행동에 경환은 실소를 머금었다. 미국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ITER에서 지분을 인정하겠으니 참여를 해 달라고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경환의 생각은 달랐다.

    “핵융합에너지의 상용화에 성공해 판매망을 구축하기 위해선 어차피 미국의 힘은 필요하다고 봅니다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몸값을 최대한 올리기 위해선 우리의 기술이 정점을 찍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부회장님이 미국정부와의 협상을 맡아, 시기를 2010년 정도로 조율해 주세요. 그리고 ITER와의 기술제휴는 거절하십시오. 일본과 EU가 이끌고 있는 ITER에 참여해 들러리 설 생각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정부를 상대하겠습니다. 그러나 신형무기 개발은 우리도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신형무기 개발은 3년 후에나 시작할 생각이니, 우선은 오리발을 내밀고 봐야겠지요.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개발하는 모양새를 취한다면, 명분을 우리가 가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황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SHJ가 무기 개발까지 손을 댄다는 소문이 나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무한 확대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사업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기존 기득권 세력의 집중 견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독자 개발이 아닌 한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공동으로 개발하는 모양새를 취한다면 미국 정부의 압력과 방산업계의 견제를 무마시킬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만큼 미국 정치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방산업계의 로비력과 인맥은 SHJ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박화수 이사는 요즘 어떻습니까?”

    “심석우 본부장의 독립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 대선이 시작되면 본격적으로 정치권 입성을 준비해, 차차기를 노린다는 전략으로 인맥을 구성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SHJ와 각을 세우면서 국민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은 찍었다는 판단입니다.”

    “SHJ시큐리티를 통해 심석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지금보다 더욱 강하게 관리하라고 전하십시오. 뭐 하나라도 걸리는 게 있다면, 그동안 우리가 준비한 계획에 차질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겉으론 힘들겠지만, 경제연구소와 정치연구소 등으로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심석우 본부장의 외가 팔촌까지 모두 검증을 한 상태입니다. 흠이 될 건 이미 다 털어버렸기 때문에 앞으로만 신경 쓰면 될 겁니다. 그리고 40대 대세론을 일으킬 수 있는 이미지 메이킹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심 본부장 주위엔 이미 우리 사람들로 철의 장막을 친 상태이니, 크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비록 심석우와 혈연관계로 맺어졌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속마음은 알 수 없는 거였다. 더군다나 권력의 단맛에 취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 권력을 휘두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경환은 알고 있었다. 한국정부가 어찌해볼 수 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SHJ였지만, 경환은 심석우를 자신의 손바닥에서 놓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토문제로 일본과의 불협화음은 상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일본 자민당의 극우파 계열의 내각이 들어설 경우 일본의 역사인식과 영토에 대한 도발은 필연적입니다. 이를 잘 이용한다면, 심석우의 이미지 메이킹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아! 무기개발을 3년 후로 미룬다는 말씀이 이런 포석을 두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황태수는 경환의 음흉한 미소에 몸서리를 쳤다. 물과 기름인 한일관계를 이용해 심석우의 이미지를 제고시키고, 한국정부의 의뢰를 통해 방산업계에 진출하겠다는 경환의 복안에 황태수는 혀를 내둘렀지만, 린다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초기만 해도 중국과 일본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저술된 역사를 찾아본 후에야 린다는 겨우 경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SHJ타운을 유치하기 위해 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는데, 일본은 모르더라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은 검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린다의 말이 일리가 있긴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의 의견입니다. 일본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겠지만, 중국인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만약 중국정부가 SHJ타운에 거주할 인력 대부분을 제삼국 인력으로 채운다는 것에 동의하기 전에는 그 어떤 제안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 우선은 호주와 유럽에 건설될 SHJ타운에 집중합시다.”

    경환은 일본과 중국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한국이 SHJ타운을 유치하고부터 경제적 이득과 고용창출, 신기술 메카로 자리 잡아가는 모습에 일본과 중국의 마음은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SHJ타운을 유치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SHJ에 접근하고 있었지만, SHJ는 두 나라의 제안을 외면한 채, 호주와 유럽으로 그 방향을 돌려버렸다. 특히, SHJ가 핵융합로 실험에 성공하고 상용화를 위해 대규모의 투자를 집행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이후, 일본과 중국정부는 국빈 자격으로 경환을 초청하며 조급함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환은 손에 쥔 떡을 아직은 줄 생각이 없었다. 그때 서재 문이 조용히 열리며 크리스토퍼가 들어섰다.

    “회장님, 손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 그래요? 어서 모시세요.”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 경환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황태수와 린다도 엉겁결에 경환을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토퍼의 뒤에서 서재로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인물이 그들의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환한 웃음을 악수를 청하며 그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그동안 신경을 못 써드려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공직을 그만두고 바로 사기업으로 들어간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습니다. 사실 지금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입니다.”

    “아! 서로들 인사 나누십시오. 호주 SHJ타운을 맡게 될 분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분의 명성은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트 기븐스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황태수와 린다는 어거스트의 뒤에 서 있는 알을 노려 바라봤지만, 알은 급히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의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두 사람은 그제야 호주를 맡을 인물의 천거를 뒤로 미뤘던 경환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황태수와 린다는 허탈한 눈빛을 서로 교환하며, 전직 NSA 국장까지 수하로 받아들인 경환의 광적인 인재수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어거스트를 관리해오고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자, 다들 앉읍시다. 부회장님과 린다는 이 자리가 낯설겠지만, 기븐스 사장이 아니었다면 앨 고어의 표적수사에 우리가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NSA 국장이란 자리가 쉽게 드러나면 안 될 자리다 보니, 오늘에서야 자리를 만들 수 있게 되었네요.”

    “회장님. 그래도 이건 좀 심하셨네요.”

    입술을 뾰로통하게 모아 눈을 흘기는 린다의 모습에 경환은 급히 손사래를 치며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난처한 경환의 모습을 확인한 어거스트가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회장님께 부탁했습니다. NSA 입장에서 저는 배신자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국가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 조직을 움직이는 것에 찬성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요. 두 분 모두 상황을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기븐스 사장이 노출되었다면,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황태수는 섭섭해하는 린다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경환의 조치를 이해하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앨 고어와의 피 말리는 싸움에서 어거스트가 SHJ의 비장의 한 수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거스트 기븐스 사장의 능력으로는 호주가 그리 큰 무대는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계획이 있으신 건 아니십니까?”

    “호주에 SHJ타운을 건설할 계획은 기븐스 사장의 제안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하는 거보다는 직접 설명을 듣는 게 좋을 거 같군요. 부탁하겠습니다.”

    경환은 황태수의 질문을 어거스트에 넘겼다. 호주에 건설될 SHJ타운은 소비시장과 비교해 엄청난 규모였고, 아직도 경영진들 사이에선 그 규모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미래 식량을 확보한다는 차원이었다 하더라도 휴스턴의 20배에 해당하는 부지가 필요한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전 세계의 정보를 담당하던 어거스트가 맡기에는 어딘가 모양새가 맞지 않는다는 게 황태수의 생각이었다. 경환이 건네준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어거스트가 긴 한숨과 함께 답변을 시작했다.

    “호주는 석탄과 풍력으로 에너지 대부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우라늄 매장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 기의 원자력발전소도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호주정부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라늄을 이용한 원자력발전소 건립엔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선 현재 검토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적 저항과 안전성 확보라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SHJ가 개발 중인 핵융합에너지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호주정부의 고민을 해결해 주면서 우리가 얻는 게 무엇입니까? 확보한 부지가 휴스턴의 20배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생산되는 식량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뉴질랜드까지 포함해도 인구수는 2천5백만 명밖에 되지 않는 시장입니다.”

    어거스트의 답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주정부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까지 호주에 집착할 필요에 대해선 답변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HJ의 모든 자금을 주관하는 린다 입장에선 막대한 투자에 비해 떨어지는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환은 두 사람의 논쟁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쿡 사장의 의견도 맞습니다. 시장으로만 봐선 호주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SHJ가 처한 상황을 먼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플랜트와 IT업계와의 동맹으로 SHJ의 위상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외부 적대세력에 의해 휴스턴과 서산은 서서히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마 회장님이나 SHJ시큐리티는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어거스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경환은 어거스트의 문제 제기를 이해하는 듯 두 팔을 팔짱 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존 매케인 정부와 밀월 관계로 정부의 눈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다. 존 해밀턴의 암살 사건 후부터 SHJ와 관련된 첩보가 배 이상 증가하고 있어 SHJ시큐리티를 긴장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태수가 급히 말을 이었다.

    “몇 달 전에 SHJ구글의 1선 방화벽이 뚫린 일이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보군요.”

    “그렇습니다. 단순 해킹이 아닌 전문가 집단이 SHJ를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주에 건설될 SHJ타운은 SHJ의 마지막 방어선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휴스턴의 일부 기능을 호주로 옮겨, 전 세계로 퍼지게 될 SHJ타운의 후방 지원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호주는 SHJ시큐리티의 제2 정보조직과 함께 외부의 지원 없이도 자체 운영이 가능하도록 설계될 겁니다.”

    “앞으로 몇 년간은 미래 사업에 집중하면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위기를 대비해야 할 겁니다. 우주항공과 인공지능, 핵융합에너지에 투자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실패한다더라도 그 실패가 쌓여 결국은 성공의 기초가 될 거란 생각에 변함없습니다. 자, 인사는 이 정도로 마치고 오늘은 술이나 마십시다.”

    서재에 모인 네 사람의 굳은 얼굴이 술잔에 투영되었다. 닥칠 위기를 대비하며 긴장하는 건 필수조건이지만, 오늘은 긴장의 끈을 풀고 싶었다. 경환은 죽음이 두렵진 않았다. 이제부턴 머리가 없어도 스스로 돌아가는 SHJ가 필요할 때였다. 원하는 이상을 손에 쥔 경환은 제2의 인생은 어떤 삶이어야 할지 고민하며,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가는 술 향기를 음미하기 위해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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