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25화 (202/264)
  • #225

    다시 사는 인생 - 225

    “회장님, 그럼 테스트를 시작하겠습니다.”

    “첫술에 배를 불릴 생각은 없습니다. 실패의 결과물이 성공 아니겠습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 소장님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술연구소 지휘본부에는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었고, 그곳으로 핵융합로의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지름 10M, 높이 6M의 핵융합로는 한눈에 보기에도 육중해 보였다. 연구원들의 손길이 바빠지며 스크린 우측에 걸려있는 전자시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핵융합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는지 스크린으로 비추는 영상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몸으로 느낄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경환은 숨을 죽이고 스크린으로 비친 영상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주시하고 있었다. SHJ의 미래가 이 실험에 달려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

    스크린으로 파란색의 불꽃이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경환은 뭘 잘못 본 건 아닌지 눈을 깜빡여 메마른 동공에 수분을 공급하려 했지만, 갑자기 들리는 환호성에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와!”

    “회장님, 성공했습니다.”

    황정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릴 틈도 없이 경환을 세차게 얼싸안았다. 경환이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눈물을 글썽거리는 황정욱의 모습에서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경환과 황정욱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자 주변의 연구원들도 서로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기쁨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찰나에 지나가 버린 성공이 경환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요? 제가 아는 게 너무 없다 보니.”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번 실험으로 플라스마 전류 133 KA와 플라스마 지속시간 0.3초, 온도 섭씨 천만 도에 성공했습니다. 올해 말까지 플라스마 전류 300 KA, 플라스마 지속시간 3초를 목표로 계속 실험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상용화를 위해선 3억도 이상의 플라스마를 300초 이상 유지할 기술을 확보해야만 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게 경환을 한숨짓게 했지만, 기뻐하는 황정욱과 연구원들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아무런 기술도 없이 맨땅에 헤딩하면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만으로도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소장님, 이 사업은 SHJ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사업입니다. 필요한 지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3대 핵융합로인 미국과 일본, EU의 토카막 수명이 내년이면 끝납니다. 그리고 그 3대 핵융합로보다 우리의 핵융합로가 30배 이상 성능이 뛰어납니다. 내년이면 아마 ITER도 눈이 뒤집히게 될 겁니다. 2008년까지 H-모드 플라스마를 20초 이상 유지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비장한 황정욱의 답변에 머릿속으로 상용화만을 생각하고 있던 경환은 급히 화제를 돌려 자신의 속물근성을 감추고자 했다.

    “가장 중요한 게 플라스마 불순물 제거 기술과 플라스마 형상 제어 최적화 기술이라고 들었습니다. 문제가 없겠습니까?”

    “플라스마 노심에 불순물이 축적된다면 에너지 손실과 고성능 운전을 방해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선 붕괴까지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연구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장님,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ITER보다 앞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기술로만 연구를 진행했을 때, 3억도 300초를 지속시켜 2MA(메가암페어)의 전류를 발생하는 것은 언제쯤 성공할 수 있을까요?”

    경환은 상용화라는 말로 황정욱을 압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방 열강들의 기술 공개요청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대략적인 타임스케줄은 반드시 필요했다. 예상 못 한 질문을 받은 황정욱은 망설임 없이 답해 나갔다.

    “단언하겠습니다. 세계 최초로 니오븀 주석을 초전도 전자석의 재료로 이용하고 있어, ITER보다 기술, 성능 모두 앞섭니다. 그리고 정확한 연구일정은 단언하기 힘들지만, 2020년 안으로는 상용화가 가능하도록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황정욱의 자신에 찬 목소리는 상용화까지 험난한 길을 준비하려는 경환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는 것이었다. 오늘 시험조작은 첫걸음마를 뗀 정도에 불과했지만, 경환은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만 했다. 15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린다를 급히 곁으로 불렀다.

    “린다, 황 소장님의 계획으로는 2020년이면 상용화에 필요한 기술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와 ITER 및 서구 열강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면 좋을 거 같나요?”

    “흠, 쉽지 않은 문제네요. 우선 우리 기술이 월등하다고 판단된다면 본국에서의 압박이 심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겠죠. 미국으로 기술을 옮기거나, 적어도 정부와 기술을 공유하라는 요청을 해 올 수도 있겠군요.”

    미국과 ITER의 압력이 두려웠으면 시작도 하지 않을 사업이었다. 이라크와 전쟁으로 국민적 지지를 얻은 존 매케인이었지만, 딕 체니와 앨 고어의 말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SHJ와는 척을 지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아닌 한국에 기술연구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SHJ의 약점이기도 했다. 만약 존 매케인이 국민적 여론을 등에 업고 국익을 앞세워 협조를 요청해 온다면 SHJ도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었다. 황정욱과 린다 사이에서 고민하던 경환이 결심을 굳혔는지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소장님은 핵심기술은 뺀 상태에서 연구자료를 정리해 보시고, 린다는 워싱턴포스트지에 이번 성공적인 실험결과를 넘겨주시고, 바로 특허 출원을 준비하세요. 어렵게 얻은 기술인만큼 받을 건 제대로 받아야겠습니다.”

    “ITER에서 우리 기술을 외면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외면하라고 하십시오. 상용화는 성능과 가격, 효율성으로 결판이 나는 겁니다. ITER는 모래알 같은 집단이기 때문에 결속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본으로 상용화까지 이끌 수 있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오성과 대현이 땅을 치고 통곡할 수도 있겠군요. 저는 워싱턴포스트지에 정보를 넘겨주면서 바로 특허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경환은 묘한 웃음으로 린다의 말에 답을 대신했다. KSTAR의 실패와 한국정부의 지분이 SHJ에 넘어가면서 노기찬 대통령과의 밀약을 알 수 없었던 오성과 대현은 자신들의 지분을 정리하길 원했고, SHJ는 헐값에 그 지분을 사들일 수 있었다. 한국정부의 지분 외에 거칠 게 없었던 경환은 다음을 준비해야만 했다. 황정욱이 급히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현재 핵융합로는 토카막 형태의 자기밀폐방식이지만, 고출력 레이저를 이용한 관성밀폐방식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관성밀폐방식은 군사적인 목적에서 연구하고 있는 국가가 대부분이지만, 미래 에너지를 생각한다면 관성밀폐방식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핵융합과 관련한 연구는 소장님께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SHJ타운 밖으로 연구결과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만 해 주십시오.”

    기술연구소의 연구분야는 에너지를 시작으로 식량, 우주, 물리이론 등 다방면으로 그 영역이 세분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경환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사업도 있었다. 노쇠한 황정욱이 모든 분야를 담당하기에는 벅차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당장은 기술연구소를 맡길 만한 인물이 없었다.

    “소장님, 다른 연구는 어떻습니까?”

    “설계는 이미 끝낸 상태입니다. 아직은 국제정세와 기존 방산업체들의 눈치를 봐야 할 상황이라 본격적인 개발은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수정과 보안작업을 마쳤기 때문에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습니다.”

    “호주와 유럽의 SHJ 완공일정에 맞춰, 신형무기를 선보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핵융합 사업은 독자법인을 신설해 기술연구소의 뒤를 받치는 모양새를 취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좀 더 수고해 주십시오.”

    황정욱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중국과 NSA와의 사이버전을 통해 얻은 방대한 무기자료는 이미 설계변경으로 업그레이드된 상태였고, SHJ 자체기술로 새로운 형태의 신형무기도 개발 중이었다. 경환은 기술연구소의 연구개발을 에너지와 신형무기로 이원화해 황정욱의 짐을 덜어줄 생각이었다.

    “제임스 그 친구는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군. IT도 모자라 이젠 대체 에너지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으니 말이야.”

    국민적 지지를 통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백악관은 기대했던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증가하는 전사자로 지지도가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존 매케인이 던진 워싱턴포스트지엔 SHJ 독자기술로 성공한 핵융합로 관련 기사와 함께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2020년까지 핵융합발전소에 따른 기술을 확보하고 발전용과 가정용으로 상용화를 추진하겠다는 SHJ의 발표를 부연해 설명하고 있었다.

    “앞으로 15년 동안 100억 불의 자금을 쏟아 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더군요. ITER에서 많이 당황하는 모습입니다. 기사에 보면 핵융합로를 소형화하는 기술도 동시에 연구 중이라고 하던데, 만약 소형화에 성공하게 된다면 그 여파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일부는 불가능하다는 의견도 있기는 합니다.”

    “SHJ가 헛소리를 떠드는 곳은 아니지 않소. 만약 소형화에 성공하게 된다면 석유재벌들은 곡소리가 나겠구먼.”

    “그렇겠죠. 이 기사가 발표된 후부터 정유업계의 주가가 소폭으로 하락하고 있으니까요.”

    비서실장인 프레드 톰슨이 말을 이어받았다. ITER가 추진하는 핵융합실험로는 일본과 프랑스의 치열한 유치전 끝에 프랑스 카다라슈로 결정되었고, 총 사업비는 35년간 110억 불로 책정되었다. 이에 비해 SHJ는 15년간 100억 불을 사업비로 책정한 만큼 자금과 규모 면에서 ITER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정유업계는 전문가들을 동원해 SHJ의 발표를 격하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다른 한편에선 SHJ의 핵융합 사업에 참여하려는 물밑접촉을 시도하고 있었다.

    “왜 하필 한국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골치 아프게 하는지 모르겠어. 단순히 제임스가 한국계라는 이유는 뭔가 부족한데 말이야.”

    “미확인 상태긴 하지만, 핵융합뿐만 아니라 식량과 의약, 신형무기까지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거대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기업들의 눈에서 벗어나 개발할 필요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SHJ의 기술력과 능력이라면 앞으로 큰 변화가 예상되는데, 손 놓고 있으면 안 될 거 같습니다.”

    “SHJ시큐리티는 아직도 요지부동인가? NAVY SEAL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데, 일부 특수작전에 투입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중동에 위치한 SHJ 사업장의 경비만 담당할 뿐, 직접적인 용병으로 참여하지는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단지, NSA와 협력해 예상되는 테러움직임에 대한 정보 교환만 하는 상태입니다.”

    “그것참.”

    존 매케인은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만 명이 넘어가는 SHJ시큐리티의 전투 요원을 후방 게릴라전에 투입할 수만 있다면 늘어나는 전사자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기회였지만, SHJ는 사업장을 지키는 인력도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 백악관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처럼 SHJ를 몰아세울 수도 없었다. 그 결과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도 SHJ의 최신 기술이 한국이나 제삼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안전장치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신형무기가 개발된다면 우리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공동연구 내지는 판매 경로를 정부가 통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프레드 자넨 너무 방산업계를 의식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우리를 지원한 세력이었다고 해도 너무 한쪽에 치우치지 말게. 제임스 그 친구 그렇게 만만한 친구가 아니야. 그렇지만, 무기는 우리가 통솔하는 게 좋겠지. 비용은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는 뜻을 SHJ에 전달해 보게.”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그리고 핵융합로 사업에 한국정부가 지분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한국정부와 같은 지분을 확보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이 맞아. 난 ITER보단 SHJ의 손을 들어주고 싶으니까. 일본과 EU에서 나서는 것도 솔직히 맘에 들지 않았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더라도 핵융합에너지 사업의 지분을 반드시 얻어내도록 해 보게. 여차하면 ITER에서 우리가 발을 빼도 상관없겠지.”

    플랜트와 IT를 넘어 우주항공과 인공지능, 대체에너지, 방산업종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SHJ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이미 존 매케인의 머리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라크 전쟁으로 SHJ와 잠시 의견 충돌이 생기긴 했지만, 미국의 미래와 자신의 재선을 위해선 경환과의 밀착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존 매케인의 지시를 받고 집무실을 나서는 프레드 톰슨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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