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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224화 (20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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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24

    한국의 여름은 습하고 뜨거웠다. 어둑어둑 해가 저문 방배동 거리는 퇴근 후 술 한잔 하려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간혹 띌 뿐, 과거 젊은이의 거리로 유명했던 카페 골목의 위상은 압구정동과 청담동으로 옮겨갔는지 90년대의 화려함은 예전만 못했다.

    청바지 차림에 텍사스 레인저스의 모자를 깊게 눌러쓴 한 쌍의 연인이 습한 날씨에도 서로 팔짱을 낀 채, 방배동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간혹 그 두 사람을 힐끗거리는 행인들이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은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둘만의 데이트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기야, 저 두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지 않아?”

    “잘 모르겠는데. 데이트 나온 연인이겠지.”

    “아니야. 아무리 봐도 SHJ 이경환 회장 부부 같은데······,”

    “이경환 회장 부부가 뭐 먹을 게 있다고 방배동에 나타나? 여긴 우리 같은 서민들이나 다니는 곳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술이나 마시러 가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여자의 손목을 낚아챈 남자가 그녀를 끌고 한 아귀찜 식당으로 사라졌다.

    “우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 비슷하다고만 생각하겠지. 오랜만에 자기하고 같이 방배동을 걸으니, 대학 다닐 때 생각이 나네. 그땐 내가 너무 어렸었지?”

    “아이고, 그걸 지금 아셨어요? 애 데리고 다니면서 연애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풋, 내가 그 정도였으려고?”

    수정이 경환의 허리를 슬쩍 꼬집으며 눈을 흘겼다. 경환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 팔짱 낀 수정의 손을 잡아끌었다. 수정도 싫지 않은지 경환의 허리춤을 손으로 감싸며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SHJ기술연구소의 핵융합로 시험조작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경환은 한국정부의 협조를 얻어 비밀리에 들어왔다. 마침 아이들도 학기를 마친 관계로 경환은 식구들과 함께 한국을 찾을 수 있었고, 둘만의 데이트를 위해 아이들은 부모님께 맡긴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두 사람의 데이트로 SHJ시큐리티 한국지사는 경환의 동선에 맞춰 평상복 차림의 직원 백여 명을 배치하는 호들갑을 떨어야만 했다.

    “어머? 이곳이 아직도 있었네.”

    한 주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수정은 신기한 듯 가게 안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렸다.

    “여보, 우리 여기서 술 하잔 해요. 나 여기 레몬소주 좋아했었는데.”

    “그러자. 우리 첫 키스도 이곳 덕에 하게 된 거잖아.”

    경환은 수정과의 옛 기억을 떠올리며, 수정의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이고는 수정의 손을 잡고 달빛한스푼 안으로 들어섰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빈 좌석은 딱 한 곳만 있을 정도로 주점 안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가게 안을 살피던 경환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대각선 자리에 알과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보, 왜요?”

    “어? 아니야. 오랜만에 왔는데도 예전 모습 그대로라 좀 놀라서 그래. 주문할까?”

    레몬소주와 주문한 안줏거리가 탁자 위에 차려지자, 경환은 자연스럽게 레몬소주를 잔이 넘치도록 부었다. 15년 만에 찾은 주점은 세월의 무게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수정을 다시 잡고 희수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만,

    “당신하고 이런 데이트를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이런 자리 좀 자주 좀 만들어 주세요. 잡은 물고기라고 등한시하면 어항을 탈출할 수도 있다는 거 몰라요?”

    “햐,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내가 자기 말이라면 끔뻑 죽는 거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해?”

    “치,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천하의 SHJ 회장님이 어련하실려구요. 술 한잔 더 주세요.”

    경환은 양어깨를 우쭐해 보이고는 수정의 빈 잔을 내미는 수정에게 잔이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었다.

    “자기도 바쁜 남편 만나 고생 많았어.”

    “여길 오니 옛날 생각이 나요. 내가 유학 간다고 했을 때, 당신이 날 잡아 주지 않았다면 아마 오늘 이 자리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죠? 고마워요. 여보. 날 잡아줘서.”

    수정이 두 손으로 주전자를 집어 경환의 빈 잔에 술을 부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서인지 수정은 불그스레한 얼굴을 연신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고, 그런 수정을 경환은 애정을 담아 바라보았다.

    “내가 오히려 고마워. 자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수도 있었어. 아이들도 그렇고. 정우와 희수가 독립하고 제 앞가림할 정도만 되면, 자기한테 충성하면서 살게.”

    “그때까지 기다릴게요. 그러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건강해야 해요. 그리고 미안해요. 제가 너무 속이 좁은 여자라서요.”

    수정의 얼굴에 그늘이 스쳐 지나갔지만, 경환은 그 의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수정과 함께 한 시간은 서로의 마음을 공유할 정도로 깊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수정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별말을 다 한다. 자기와 아이들이 있어 내가 지금까지 버틴 거야. 뭐, 그래도 자기가 정 미안하다면, 오늘 밤 황제서비스로 퉁치면 어떨까?”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불그레한 수정의 얼굴이 더욱 빨개지며 당황한 듯 주위를 연신 둘러보았지만, 두 사람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줍어하는 수정의 얼굴이 귀엽게 느꼈는지 경환은 싫다는 수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수정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희수가 찾겠어요. 서산까지 다시 가려면 시간이 걸리니 어서 일어나요.”

    “뭘 이리 서둘러? 주위에 모텔도 많은데, 우리도 다른 연인들처럼 모텔에서 잠깐 쉬었다 가고 싶은데.”

    “이이가 정말. 빨리 일어나기나 하세요.”

    주위를 정리한 수정이 먼저 일어나 경환을 일으켜 세웠고, 경환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수정과의 짧은 데이트는 앞만 보고 달려온 경환에게 작은 휴식을 제공하며 그동안의 일을 정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두 사람이 빠진 주점에서 십여 명의 인원들이 급히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기술연구소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황태수를 제외한 SHJ의 경영진 대부분이 비밀리에 서산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하루나는 유럽 본사 설립을 위해 대규모의 실무팀을 이끌고 노르웨이에 도착해 있었다. 노르웨이 정부에서는 최선을 다해 실무팀을 맞이했지만, 경환의 비서실장이 실무팀을 이끌고 왔다는 사실에 처음엔 큰 실망감을 보였다. 그러나 하루나가 유럽본사 사장으로 내정되었고, 위치선정이 하루나의 결정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부턴 에르나는 하루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미스 야마시타, 노르웨이는 SHJ타운을 맞이할 모든 준비가 되었습니다. 노르웨이 국민들 모두 SHJ에 대한 우대정책을 특혜가 아닌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번 노르웨이 정부가 준비해 주신 모든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네요. 에르나 장관님.”

    노르웨이 정부에서 제공한 헬기를 이용해 오슬로 근교의 SHJ타운 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노르웨이 국민들의 기대감이 반영되었는지, SHJ 실무팀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일정을 무사히 수행했지만, 하루나는 에르나의 애간장을 태우며 최종 협의를 뒤로 미뤘다. 정치권에서 잔뼈가 굵은 에르나였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하루나를 독촉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하루나 역시 대규모의 부지와 세금 혜택, 자치권 문제에서 SHJ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 야마시타,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정치적인 야심으로 SHJ타운 유치를 주관하고 있지만, 노르웨이의 미래 후손들을 위해선 반드시 SHJ타운을 유치하고 싶은 생각이 우선입니다. 물론 지리적인 위치나 모든 면에서 노르웨이가 타 유럽국가보다 미흡한 점이 많은 거 압니다. SHJ의 고민을 모르는 바 아니니, 우리 서로 솔직해졌으면 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실 저희는 노르웨이 정부에서 이렇게 빨리 우리의 제안을 대폭 수용한 결정을 하실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에르나는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이 여러 조건을 놓고 본다더라도 노르웨이는 SHJ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과도한 포장보다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있는 그대로를 실무팀에게 보여주었다. SHJ타운 유치가 독일로 결정됐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에르나는 하루나라는 끈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에르나의 애절한 표정을 읽은 하루나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유럽 본사는 독일이 가장 유력합니다. 그 이유는 장관님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그러나 노르웨이 정부에서 보여주신 진심과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게 저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석유와 가스가 대대손손 영원할 수 없다는 게 노르웨이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제조업이 무너진 상태에서 SHJ타운은 돌파구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거대 석유 기업들의 로비를 무시하고 SHJ에 이런 제안을 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가진 건 석유와 가스니까요.”

    하루나는 솔직한 에르나의 답변을 인상 깊게 듣고 있었다. 감추려 하지 않고 협상의 주도권을 쥐려는 생각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감정에 호소하는 에르나의 전략이 하루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로 결정된 상황에서 에르나에게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게 하루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장관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노르웨이의 인구는 500만 명이 채 안 됩니다. 같은 규모의 SHJ타운을 건설한다면 노르웨이나 SHJ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요. 만약 한국 서산 규모의 반 정도 수준의 SHJ타운이면 어떨까요?”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저도 장관님께 솔직하겠습니다. SHJ도 사실 석유와 천연가스 사업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에너지만 가지고 유럽 본사를 노르웨이에 건설한다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흠.”

    하루나의 답변에 에르나의 얼굴은 급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산의 절반 규모라 하더라도 SHJ타운을 유치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은 있었다. 이어지는 하루나의 말에 에르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전 타협점을 장관님께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SHJ엔지니어링과 새롭게 세워질 에너지 관련 기업 위주로 SHJ타운을 건설하고, 투자금 20억 불 규모의 SHJ구글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면서 셰일가스와 북극 연구로 그 규모를 키워가는 게 지금으로선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SHJ유럽본사는 독일로 결정이 되었나 보군요.”

    얼굴이 굳어지며 깊은 탄식을 쏟아내는 에르나를 향해 하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열고 다가서려는 에르나를 더는 속일 수 없었다. 잠시 허공을 쳐다보던 에르나는 입술을 굳게 닫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쉽긴 하지만, 작은 규모라도 SHJ타운이 노르웨이에 들어선다는 명분이 중요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규모가 작긴 하지만, 노르웨이에 SHJ타운이 들어서고 그 끈을 이어간다면,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는 유럽에서 SHJ와 많은 협력을 이뤄나가는 관계가 될 거로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 그렇게 될 겁니다. 처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그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요.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실망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 에르나는 그제야 미소를 띨 수 있었다. 사실 누구도 노르웨이의 SHJ타운 유치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SHJ타운과 20억 불 규모의 데이터센터 유치만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의회를 설득할 일이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미스 야마시타와의 협상은 너무 즐거웠습니다. 제임스 회장이나 다른 경영진들은 노련한 협상가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미스 야마시타는 따뜻한 사람이란 느낌이네요. 앞으로 일이 아닌 개인적으로도 자주 만나길 바랍니다.”

    “저도 그런 기회가 자주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장관님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갑니다.”

    두 사람은 협상 결과에 만족하며 뜨거운 악수를 나눴다, 지루한 머리싸움보단 진심을 공유하는 것도 때로는 좋은 결과를 보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협상이었다. 세부적인 사항을 실무팀으로 넘긴 두 사람은 자리를 정리하고 회의장을 나섰다.

    이른 시간에 호텔로 돌아온 하루나는 호텔 밖으로 보이는 유럽식 경치를 감상하며 유리창 앞에 섰다. 경환을 떠난다는 건 마음 한구석을 도려내는 큰 아픔이었지만, 현실은 결국 자신의 편이 아니었다. 다시 부르겠다는 경환의 말이 하루나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경환과의 입맞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루나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하루나의 흐느낌은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묻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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