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다시 사는 인생 - 223
“드디어 터졌군요.”
“존 매케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때부터 충분히 예상한 시나리오입니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여론을 조성하던 미국은 주체가 확인되지 않은 쿠웨이트 미국대사관의 폭탄테러 사건의 배후를 후세인으로 지목하는 무리수를 감행했다. 이라크 정부는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며 외교장관까지 파견해 미국과 UN을 설득했지만, 미국은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사찰을 받으라는 말로 이라크의 화해노력을 일축해 버리고, 5함대를 걸프만에 파견함과 동시에 태평양의 7함대까지 이동하는 강수를 두었다. 이라크가 자존심을 버리고 사찰을 받아들일 거라는 외신의 보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바그다드의 공습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이라크 침공을 개시했다.
“쿠웨이트 대사관 폭탄테러에 이라크가 개입된 정황이 있습니까?”
“이라크를 지목하기엔 무리수가 있습니다. 아직 배후에 대한 확인도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테러라고 보는 시작이 많은데, 좀 더 파 볼까요?”
“국민들의 여론이 전쟁 지지를 돌아섰습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중동에 분산된 현장과 법인 경비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할 겁니다. 테러의 불똥이 우리에게 튀지 않도록 당분간 보안팀 업무를 중동에 집중시키세요.”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미국은 자국 내 여론을 등에 업고 이라크 침공을 감행했다. 이라크 침공은 필연적으로 중동의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일으켜 테러는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중동 지역에 많은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SHJ플랜트는 테러 조직의 좋은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경환을 고민에 빠트렸다.
“회장님, 모두 회의실에 모여 있습니다.”
“수고했어요. 하루나.”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가는 하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입술을 가져다 댔다. 경환은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중국에서 돌아온 린다를 비롯해 SHJ의 중추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엔 새롭게 조직된 SHJ구글의 테크놀러지 팀을 이끄는 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경환은 주위에 포진한 인물들과 눈을 맞춘 후,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쟁도 시작되었고요. 2005년은 우리에게 위기이면서도 기회를 제공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린다는 수익이 없는 사업에 손을 대지 말고 지키면서 안정을 취하자며 절 쪼아댑니다. 요샌 제 아내보다도 제일 무서운 사람이 린다입니다.”
“하하하. 회장님이 여자에게 너무 약하셔서 그렇습니다.”
경환의 농담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됐고, 린다는 자신이 지목당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경환을 쏘아보았다. 경환은 린다의 서늘한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말을 계속 이었다.
“가끔 SHJ의 목표가 어디인지 잊어버릴 때만 있습니다. 그만큼 우린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난관도 많았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어렵지 않게 헤쳐나갈 수 있었고요. 앞으로의 SHJ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지 고민할 시기라고 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막대한 금액이 투자되는 기술연구소와 SHJ유니버스, 이번에 새롭게 만든 SHJ테크놀러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분들이 계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플랜트와 무선통신, IT에 안주만 한다면 애플과 야후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SHJ퀄컴과 SHJ구글 역시 오랜 기다림 끝에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의 투자가 10년 후엔 몇백 배의 이익으로 SHJ의 주도 사업이 될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한뜻으로 뭉쳐 주시길 바랍니다.”
평소답지 않은 긴 연설에 웃음이 넘쳤던 회의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SHJ그룹의 경영진들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의견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다. 조그만 구멍을 모른 척 방치해 댐을 무너트리기보다는 서둘러 봉합을 하는 것을 경환은 선택했다. 경환의 신호를 받은 하루나의 의해 대형스크린으로 잭의 모습이 나타났다.
“잭, 좋은 소식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먼저 소식을 들려주십시오.”
‘회장님, 황정욱 소장과 같이 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자주 있던 화상회의라 회의에 참석한 경영진들은 잭과 황정욱의 등장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지만, 좋은 소식이란 말에 모두의 시선은 스크린으로 향해 있었다.
‘회장님, 핵융합로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오차를 잡아가고 있지만, 다음 달 시험 조작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저온핵융합 연구도 큰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SHJ의 미래를 책임질 사업인데 당연히 제가 참석을 해야지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짧은 보고를 끝으로 스크린의 영상이 사라진 회의실엔 침묵이 가득했다. 매년 80억 불이란 거금이 투자된 기술연구소에 대한 경영진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경환이 준비한 계획은 마무리만 남겨둔 상태였다.
“SHJ홀딩스는 핵융합로 기술에 대한 특허출원을 준비하시고, SHJ시큐리티는 핵심기술이 유출되지 않도록 보안을 강화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다 같은 SHJ의 식구입니다. 형이라 해서 동생에게 주는 떡이 많다고 시샘하면 안 됩니다. SHJ유니버스나 테크놀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고 기다린다면 큰 성과를 우리에게 가져다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경환이 적자계열사와 기술연구에 무한한 신뢰를 밝히자, 회의실 끝에 앉아있던 앤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자신이 제출한 사업계획서를 변경 없이 승인한 경환에 대한 믿음이 불안하던 앤의 가슴을 뚫리게 하고 있었다. 앤은 경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았다.
“린다, 금년도 매출은 이상 없이 달성하고 있나요?”
“순조롭습니다. 예상 총 매출은 2,252억 불입니다. 퀄컴이 906억 불, 구글이 759억 불, 플랜트가 456억 불로 매출을 주도하고, 영업이익은 780억 불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가용자금은 1,260억 불이며, MS 5.5%, 버크셔해서웨이 6.2%, 오성전자 10.8%, 알리바바 40%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아마존과 야후, 애플 등 5% 이하의 지분을 가진 기업은 뺐습니다.”
“제 개인 재산은 어느 정도입니까?”
“계산 불가입니다. SHJ퀄컴의 시가총액은 5,300억 불을 넘어섰습니다. 지분의 65%가 사장님 명의고, SHJ구글과 플랜트, 유니버스의 기업가치는 아직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쉽게 SHJ퀄컴만으로도 회장님의 재산은 3,000억 불이 넘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등록금 백만 원을 벌기 위해 화성플랜트에서 아웅다웅했었던 때와 비교한다면 엄청난 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돈으로도 채워줄 수 없는 허전함이 경환에겐 남아 있었다. 경환은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머리를 흔들었다. 자신의 삶보다는 이 세상에 남을 정우와 희수를 위해 SHJ를 더욱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포스트에서 재미난 기사를 실었더군요. 다들 보셨습니까?”
경환의 엄청난 재산에 말문이 막혀있던 사람들의 미간이 좁혀졌다. 미국 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SHJ가 기부에 인색하다는 기사가 실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괘씸해하면서도 경환 앞에서 말을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할 뿐이었다.
“일정 부분 인정은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죽어서 관에 돈을 싸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의 기부를 좀 더 세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L&K재단을 확대해도 좋고, 별개의 기부시스템을 만들어도 좋습니다. 단, 미국에 국한하지 말고 전 세계를 기준으로 확대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부에 인색한 기업이란 이미지는 SHJ에게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경환의 기부 확대정책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적어도 이 회의장엔 없어 보였다.
“회장님, 노르웨이 정부에서 정식 공문이 도착했습니다. 독일정부도 준자치권과 함께 세금혜택을 주겠다는 답변을 받았는데, 한입 가지고 두말할 수도 없고 입장이 난처합니다.”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내린 노르웨이정부가 협상한 내용을 전폭적으로 수용하겠다는 뜻을 보내면서, 일은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이미 SHJ는 독일과 큰 뜻에 합의하고 세부조항을 협의하던 중이었다. 좋았던 회의 분위기가 최석현으로 인해 어두워지면서 모든 사람의 원망 섞인 눈빛은 최석현을 향했다. 그러나 위기에 몰린 최석현을 살린 건 묵묵히 있던 황태수였다.
“독일과의 협상을 중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에르나 장관과 약속한 내용도 지켜야 하고요.”
노르웨이의 석유와 가스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적은 인구수나 지리적 한계는 경환을 고민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유럽을 관장할 SHJ타운을 유럽의 변방, 그것도 EU 가입국도 아닌 노르웨이건 건설된다는 건 얻는 거보단 잃는 게 더 많은 형국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독일의 16개 주는 SHJ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뮌헨이 주도인 바이른 주 정부는 자치권을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독일정부를 긴장시키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노르웨이로 결정한다면 SHJ의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건 입만 아플 지경이었다.
“간단하게 푸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노르웨이 정부와 STATOIL의 뜻이 명확하다면 독일과 노르웨이 두 곳에 SHJ타운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검토해 봅시다.”
“회장님, 두 곳에 SHJ타운을 조성하는 건 무리입니다.”
린다가 강하게 반대의사를 보였다.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유럽 두 곳에 SHJ타운을 조성하는 것은 효율성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도 무리란 건 압니다. 그러나 석유와 천연가스, 더욱이 셰일가스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사업입니다. 노르웨이에 건설되는 SHJ타운의 규모를 축소해 SHJ엔지니어링 위주로 진출하고, 20억 불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면 우리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고 봅니다.”
“노르웨이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협상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루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경환은 고개를 돌려 하루나를 바라봤다. 이미 유럽본사 사장으로 내정된 만큼, 이 문제는 하루나가 풀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루나의 경영능력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영진들 앞에서 의구심을 해소하는 좋은 기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시선이 하루나를 향해 집중되었다.
“노르웨이도 적은 인구수와 지정학적 위치로 큰 걸 바랄 수는 없는 처지입니다. 더욱이 살인적인 물가는 배보다 배꼽이 클 수도 있고요. 이 점을 부각해 독일에 SHJ유럽본사를 설립하고 노르웨이엔 유럽지사를 설립하는 쪽으로 설득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럼 하루나 실장이 이번 협상을 주관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무팀을 꾸려 보세요.”
“제, 제가요?”
“유럽본사 사장으로 내정된 만큼, 이 문제부터 직접 풀어가는 게 모양새가 좋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회장님.”
하루나를 떠나 보낼 수밖에 없는 경환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하루나를 바라봤다. 경환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회의에 참석한 인원 중에서 오직 알만이 경환의 애틋한 마음을 이해하는 정도였다. 조용히 한숨을 내쉰 경환은 화제를 급히 돌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SHJ는 미래 사업에 투자를 집중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SHJ구글에서 새롭게 팀을 구성한 테크롤러지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앤, 사업방향에 대해 간단한 설명 부탁합니다.”
경환이 자신을 호명하자, 앤은 심호흡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중앙에 위치한 단상 앞으로 걸어나갔다.
“테크놀러지팀을 맡은 마리사 앤 메이어라고 합니다. 테크놀러지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연구에 매진할 예정입니다. 그 하나는 SHJ퀄컴에서 연구 중인 양자통신기술과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양자컴퓨터의 개발입니다. 두 번째 연구는 인공지능 로봇의 개발입니다. 두 연구 모두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하지만, 무선통신과 IT에 기반을 둔 SHJ가 반드시 확보해야 할 기술이기도 합니다.”
기존 슈퍼컴퓨터는 100 자릿수의 인수분해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2001년 IBM에 의해 개발된 양자컴퓨터가 15=3X5의 인수분해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긴 했지만, 아직은 초보단계였다. SHJ퀄컴에서는 효율성을 높이고 절대적인 통신보안을 위해 양자의 얽힘효과를 이용한 양자통신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핵융합로의 테스트를 앞에 두고 플라스마 핵융합의 시뮬레이션을 위해선 필요한 연구이기도 했다. 어윈이 급히 나서 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만, 아직 우리도 연구인프라 구축에 큰 어려움을 겪는데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생각입니까?”
“양자물리학을 선도하고 있는 JILA(물리학 합동연구소)와 콜로라도 대학, 메릴랜드 대학의 연구진을 일부 흡수했습니다.”
앤의 철저한 준비에 어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앤의 철저한 준비 뒤엔 경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SHJ의 미래를 주도하기 위한 계획은 그 열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