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20화 (197/264)
  • #220

    다시 사는 인생 - 220

    워싱턴포스트가 SHJ를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하면서 대대적인 개혁작업과 이에 따른 해고사태를 우려한 노조는 SHJ의 경영계획을 문의하는 동시에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노조의 파업은 야후와 스페이스X를 인수를 준비하는 SHJ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고, 야후와 스페이스X의 노조와 연계할 움직임까지 보이자, 경환은 경영진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노조를 직접 방문하는 강공을 선택했다.

    린다와 하루나가 경환을 보좌해 노조를 방문했고, 워싱턴포스트 사장에 임명된 칼 에드워드가 일행과 함께 노조사무실에 들어섰다.

    “워싱턴포스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노조위원장인 벤 존슨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임스 리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진 언론사 노조답게 벤 존슨은 차분하게 경환을 맞이했다. 공개 토론을 요청해서 그런지 노조 사무실과 주변에는 많은 직원이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일부 기자가 녹음기까지 준비한 모습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제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궁금하신 점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기업에 통제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가입니다. 기업가의 시각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봅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수입구조는 급격히 악화하고 있어, 올해는 적자경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위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경환의 말은 적자로 인해 대대적인 개혁과 해고는 불가피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유능한 기자들이 뉴욕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에 애정을 가진 기자들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 점은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터넷 미디어 방송과 교육사업에도 진출했고 수익이 개선되고 있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언론사의 사명은 권력과 공공기관의 감시와 비판이 그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내가 사는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지, 적어도 살만한 곳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이 언론사와 기자의 의무라고 봅니다. 따라서 제가 워싱턴포스트의 사주로 있는 이상, 적자경영을 인정할 생각입니다. 수익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언론이 가진 진정한 사명감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웅성거리던 주위에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경환의 말이 틀렸다고 반론할 기자는 없었지만, 미국은 수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경환의 연설에 감동하였다고 해서 현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리 회장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회장님의 지론에 따를 주주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그 점은 SHJ홀딩스의 린다 쿡 사장이 설명하겠지만, SHJ의 방침에 불만을 가진 주주들의 지분은 모두 공개 매수할 생각입니다. 아울러 경영과 편집국을 분리, 편집국에 독립적 지위를 부여할 것이며, 마틴 배런에 편집국을 맡길 예정입니다.”

    “마틴 배런이요?”

    뉴욕타임스의 계열사인 보스턴글로브의 편집국장으로 일하면서 퓰리처를 6번이나 수상한 경력이 있는 마틴 배런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하루나의 쪽지를 받아든 경환은 서둘러 정리해야만 했다.

    “저는 워싱턴포스트가 가진 가치와 원칙의 중요성을 잘 압니다. 마틴 배런과 함께 그 가치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지금의 자리에서 미국의 미래를 비추는 등대가 되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걱정하는 해고는 SHJ의 이름을 걸고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세한 내용은 쿡 사장과 에드워드 사장이 설명할 것입니다.”

    경환이 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하루나와 함께 노조 사무실을 나서려고 하자, 뒤에서 두 사람의 토론을 듣던 기자 한 명이 급히 손을 올려 경환의 발걸음을 잡았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권력과 공공기관의 감시와 비판에는 SHJ도 포함되는 것입니까?”

    경환은 질문한 기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기자가 손을 든 채로 경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경환은 나가려던 발을 멈춰 그 기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연합니다. SHJ도 감시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감시와 비판은 음해와 무고와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증거와 사실이 없는 기사는 쓰레기란 것을 잊지 마시길 당부합니다.”

    말을 마친 경환이 하루나와 함께 급히 노조 사무실을 벗어나자, 한두 명으로 시작된 박수가 노조원 전체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링컨기념관 옆으로 1995년 조성된 한국전쟁기념관엔 한국전쟁에 참가한 19명의 미군 동상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공원의 한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동상 맞은편엔 전사자의 얼굴이 조각된 검은 대리석벽이 길게 뻗어있었고, 대리석 벽면을 통해 제이 존슨의 얼굴이 들어왔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서의 감동적인 연설 인상 깊었습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양측 경호원들의 대립 속에 경환은 악수를 청하는 제이 존슨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경환의 워싱턴 방문을 입수한 제이 존슨을 급히 만남을 제의했고, 그동안 NSA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경환도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이 존슨의 말로 자신이 NSA의 감시대상이란 사실을 확인한 경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리 회장님이 워싱턴을 떠날 때까진 철저히 경호하라는 대통령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 기분 좋은 경호는 아니군요. 만남을 제의하신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잠시 걸으시겠습니까?”

    제이 존슨과 경환이 자리를 이동하자, 경호원들의 움직임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양측 경호원 모두 중무장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경호에 신중을 기하고 있었다. 경환은 제이 존슨과의 만남을 길게 끌고 싶지 않았다.

    “NSA와 SHJ와의 신경전은 이번 정부에선 더는 없을 겁니다. 이건 제가 아닌 대통령님이 직접 내린 지시입니다. 서로의 장점을 하나로 묶는다면 미국은 정보전에서 앞설 수 있다고 보는데 리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NSA에 대한 신뢰는 경환의 안중에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달콤한 말로 합작을 제의해온 제이 존슨을 향해 경환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양 속담에 토사구팽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냥이 끝난 개는 삶아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로 답변을 대신하겠습니다. 에셜론으로도 SHJ를 뚫지 못하자, 엘리시움과 사이보그 OS를 해킹하기 위해 별도의 프로그램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이름까지 알려드릴까요?”

    “하하하, 지금 리 회장님의 말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역시 SHJ시큐리티의 정보능력도 대단하군요. 대응 프로그램을 이미 만드신 거 같습니다.”

    NSA의 이중적인 모습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자, 제이 존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프리즘으로 명명된 새로운 프로그램은 이미 개발을 완성해 시험가동 중에 있었지만, SHJ가 이 정보를 알고 있다면 프리즘도 SHJ에겐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간보는 일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NSA의 수장이 만남을 요청했다면 적어도 이거보단 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좋습니다. 대통령은 백악관과 SHJ 간의 밀접한 관계를 원하고 계십니다. 또한, SHJ가 국익을 우선시하는 데 일조하기를 원하시기도 하고요. 문제는 한국에 있는 기술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핵융합에너지 연구와 무기개발을 우려하는 세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군산복합체의 로비가 상당한가 보군요. 국방부와의 독점계약이라도 제안하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도대체 SHJ의 정보능력이 어느 선까지 손을 대고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백악관 집무실에서 은밀히 논의했던 내용이 경환의 입에서 터져 나오자, 강심장인 제이 존슨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불법행위로 체포하고 싶다는 생각보다 어떤 기술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다. SHJ시큐리티에 매년 50억 불 이상의 자금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제이 존슨으로선 알 수 없었다.

    “개발 무기의 판로를 어려움 없이 확보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백악관을 밀고 있는 군수업체를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는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저는 SHJ의 이익이 먼접니다. 독점계약보단 미국의 우방국에 수출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선이라면 모를까요. 그런데 무기개발 경험이 전혀 없는 SHJ가 무기를 개발한다는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과대해석하는 거 아닌가요?”

    제이 존슨은 끓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삼키고 있었다. 중국과의 사이버전에서 중국과 NSA의 특급정보를 입수한 거 아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증거도 없었을뿐더러 그 작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작전이었다.

    “리 회장님의 뜻은 전달하겠습니다. 이번 정부는 길면 8년입니다. SHJ가 연방정부와 각을 세우게 된다면, 8년 후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아무쪼록 연방정부와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조언 감사합니다. 저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최대한 협조할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느 일방의 이익만 강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이라크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대통령님은 SHJ의 정보능력과 투자를 희망하고 계십니다.”

    경환은 걸음을 멈췄다. SHJ시큐리티의 정보동향보고를 통해 이라크와의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을 지켜야 할 NSA의 수장 입에서 비밀이 새 나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투자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보능력이란 말은 SHJ시큐리티의 전쟁참여를 요청하는 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자에 대한 대통령님의 제안은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국장님의 말씀으로는 전쟁이 임박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기업이 전쟁에 직접 참여한다면 여론의 뭇매를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건 대통령님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리 회장님의 의견 잘 들었습니다. 조만간 백악관에서 리 회장님을 초청할 예정입니다. 대통령님의 의중은 그때 확인해도 늦지 않겠지요. 오늘 어려운 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익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볍게 악수를 나눈 경환의 눈에 기념비에 쓰인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는 문구가 들어왔다. 자유를 위해 희생은 필요하지만, 일부 기득권을 위한 희생은 경환은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똑, 똑.’

    “들어오세요.”

    워싱턴포스트 노조와 타결한 보고서를 살피던 경환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의 문이 열리고 정장 차림의 하루나가 조심스럽게 경환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일정에 변화가 있나요?”

    “아닙니다. 회장님. 개인적인 말씀을 드리고 싶어 찾아뵀습니다.”

    경환은 우물쭈물하는 하루나의 모습에 읽던 보고서를 한쪽으로 밀었다. 며칠 전부터 달라진 하루나의 태도에 고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은근히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회장님께서 제안하신 SHJ타운 책임자 건 때문입니다. 유럽지역이 결정되면 그쪽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경환은 흔들리는 하루나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제안한 일이었지만, 막상 하루나의 결심을 듣게 된 경환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진심에서 하는 말인가요? 하루나가 원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제가 있는 곳이 회장님의 마지막 보루라는 말씀을 따를 생각입니다. 저도 비서 일을 떠나, 제 능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허락해 주십시오.”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환의 손길에 하루나의 몸이 반응하며 움찔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하루나, 미안해요. 그리고 고맙고요. 하루나가 마지막 보루라는 말 진심입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루나를 다시 지금 이 자리에 불러오겠습니다.”

    하루나의 어깨가 가늘게 흐느끼는 느낌이 경환의 손에 전달되기 시작할 무렵, 하루나의 상반신이 경환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잠시만 이대로 있고 싶습니다.”

    경환은 하루나를 밀칠 수가 없었다. 하루나의 마음을 알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로 고통받았을 하루나를 생각하며 경환은 하루나의 등을 안아주었다. 경환의 손길을 느낀 하루나가 고개를 올려 경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하루나의 눈물을 확인한 경환은 하루나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경환의 입술을 느끼던 하루나의 입술이 떨어지며 자신의 가슴에 올려진 경환의 손을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불러주실 동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옷매무새를 갈무리한 하루나가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지만, 경환은 한참을 서 있어야만 했다. 하루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경환에겐 지켜야 할 가족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워싱턴의 밤은 경환의 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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