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9화 (19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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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19

    SHJ타운을 떠난 에르나와 헬지 란드가 남긴 여파는 컸다. 검토대상에서 제외한 노르웨이가 SHJ에 던진 떡밥은 덥석 물 수도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을 정도로 덩치가 컸기 때문이었다. 존 해밀턴 암살사건으로 SHJ시큐리티는 초비상 사태가 지속되고 있었지만, SHJ홀딩스와 SHJ매니지먼트는 유럽 투자문제로 의견이 분분한 상태였다.

    “에르나 장관은 천상 여장부더군요. 정치적 야망도 상당하고요. 부회장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에르나와의 독대를 통해 경환은 그녀의 정치적 야망을 읽을 수 있었다. SHJ타운 유치를 자신의 정치 행보에 이용하려는 모습을 좋게 볼 수는 없었지만, SHJ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야심은 눈감아줄 수 있었다. 경환의 질문에 황태수가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봅니다만, 우리에게 제안한 내용이 노르웨이 정부의 뜻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만약 노르웨이 정부의 공식입장이라면, 검토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회장님과의 독대에서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특혜를 주겠다고 공헌했는데, 독립심이 강한 노르웨이 국민의 특성으로 봤을 때, 국민적 저항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법인세야 별 차이가 없지만, 이것저것 따진다면, 44%의 소득세는 만만치 않습니다. 살인적인 물가도 부담이고요.”

    복지국가인 만큼 징수되는 소득세율이 만만치 않았다. 수입의 반 정도를 소득세로 징수하다 보니 노르웨이의 인건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높았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물가는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자금을 담당하는 린다는 막대한 운영비가 필요한 노르웨이에 SHJ타운을 건설하는 게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석유와 천연가스, 셰일가스가 주는 이익도 무시할 수는 없어 심한 반대는 할 수가 없었다.

    “에르나 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서 SHJ타운에 파견되는 외국 국적자는 파견수당에 한해 소득세를 징수하겠다고 하던데, 이 조건이라면 크게 문제는 안 된다고 보는데요.”

    “총리도 아닌 일개 장관에 불과합니다. 급조된 제안일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린다의 지적에 경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에르나의 제안은 어딘가 모르게 서툴렀고, 급조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황태수와 린다의 의견이 갈리면서 공은 경환에게 던져졌다.

    “우선 지켜봅시다. 제안한 내용을 정부의 공식문서로 전달해 달라고 했으니, 공은 에르나 장관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영국과 독일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두 나라 모두 유치에 적극적입니다. 지리적 위치는 독일이 우세하지만, 조건은 영국이 우세한 상황입니다. 자치권까지 제안했으니까요. 독일정부는 자치권과 세금 특혜에 대해서는 난색을 보이며, 준 차지권만 인정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독일과 영국은 실무 경영진의 의견에 맡기겠습니다. 만약, 노르웨이 정부가 공식입장을 전달한다면 그때 결정을 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늦어도 상반기 중으로 결정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인구수 5백만 명도 되지 않는 노르웨이에 SHJ타운의 건설은 SHJ에게도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호주와 유럽으로 SHJ타운이 건설된다는 소식은 미국의 여론을 자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동부와 서부의 많은 주가 SHJ타운 유치를 위해 의원들까지 동원하는 마당에 큰 명분 없이 노르웨이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200만 명의 청중이 국회의사당 주변 야외공원을 가득 메운 채, 제43대 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대법원장 주관하에 성경에 왼손을 얹은 존 매케인이 취임선서를 하는 장면이 방송을 통해 전국에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선서를 끝으로 존 매케인 정부는 본격적으로 국정운영을 시작했다. 공식행사를 모두 마친 존 매케인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백악관 집무실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집무실 의자를 양손으로 쓸어내린 존 매케인은 쉽게 앉지 못했다. 대선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던 초반 분위기는 중반을 넘으면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고, 그 중심엔 SHJ가 있었다는 것이 존 매케인에겐 부담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님, 자리에 앉으시지요. 제이 존슨이 도착할 시간입니다.”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이기도 한 프레드 톰슨 비서실장이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권했다. SHJ와의 사이버 신경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NSA는 자신의 수족인 제이 존슨을 임명되면서 떨어진 사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집무실 의자가 주는 무게감을 느끼며, 허리를 깊숙이 묻었다.

    “끝내 제임스는 참석을 거절했다는 건가?”

    “전임 정부와의 관계도 있고, 많이 부담되었던 모양입니다.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따로 받았습니다.”

    SHJ가 사설 정보조직을 운영하고 그 능력은 NSA를 상회한다는 소문은 이번 대선으로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대선 막판 앨 고어가 네오콘에 흘린 정보에서도 그런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두 번의 대선에 개입한 SHJ는 자신에게도 부담되는 기업이었지만, 존 매케인은 경환과의 관계를 망칠 생각은 없었다. 집무실 문이 열리고 제인 존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축하합니다. 대통령님.”

    “마침 잘 왔네. NSA를 맡은 소감이 어떤가? 자네로 해서 사기가 많이 올랐다는 말은 듣고 있었네.”

    “전임 국장인 어거스트 기븐스의 능력은 인정해 줘야 합니다. 단지, SHJ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제이 존슨은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고 싶었다. SHJ를 손을 보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력이 가장 집중된 지금이 적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SHJ로 인해 NSA의 수장이 될 수 있었지만, 일개 기업에 연방정부가 끌려다녔다는 오명을 벗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경거망동하지 말게. 내가 본 제임스는 무서울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는 인상을 받았어. 난 조지 부시나 앨 고어와는 다른 시각으로 SHJ를 바라볼 생각이야. 제이 자넨 휴스턴으로 가, 같이 상생하자는 내 뜻을 제임스에게 전달해 주게.”

    “알겠습니다. NSA와 SHJ시큐리티의 합작사업을 만든 후, 휴스턴을 방문하겠습니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제이 존슨은 대통령의 뜻을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프레드 톰슨이 급히 말을 되받으며 상황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뒤엔 SHJ뿐만 아니라, 군산복합체의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기에 북한과 이란의 핵시설 공격과 그루지야를 노리는 러시아와 정면 대결도 불사하겠다는 정책을 펴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SHJ가 운영하는 기술연구소의 무기개발을 중단시켜 달라는 요청이 벌써 들어오고 있습니다.”

    “프레드, 만약 SHJ가 정보조직을 동원해 앨 고어를 밀었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겠나?”

    “그, 그건······.”

    프레드 톰슨은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대선은 월가의 금융자본과 군산복합체의 싸움이란 소문이 돌 정도로 두 세력 간의 암투는 이번 대선을 통해 극한으로 치 닫았다. 승기를 잡은 군산복합체는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 처음 대상은 금융자본이 아닌 SHJ란 사실에 존 매케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SHJ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그쪽에 전해 주게. 북한이나 이란, 러시아는 사실상 건드리지 어렵다는 것을 자네도 알 거야. 우선 석유로 장난치는 이라크를 먼저 손본다면, 그쪽도 내 계획에 반대하진 않을 거야. 분위기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물론 후세인을 손봐야 하는 건 당연한 거지만, SHJ가 독단적으로 개발하는 무기가 한국정부에 전달되기라도 한다면 동북아시아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석유결제대금을 유로로 바꾼 이라크로 인해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라크의 이런 정책은 주변 중동 산유국들의 관심을 증폭시키면서 일부 국가에선 이라크의 뒤를 이어 결제대금을 바꾸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존 매케인은 중동 산유국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라크는 반드시 손볼 생각이었다.

    “물론 제임스가 한국계이긴 하지만, 무턱대고 한국정부에 퍼줄 위인은 아니야. 제이는 내 뜻을 제임스에게 전하면서 독점계약을 제안해 보게. 그리고 프레드는 군산복합체를 잘 다독이면서, 신무기 개발을 독려하고.”

    “대통령님의 말씀대로 SHJ가 따라와 준다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아시다시피 제임스 리 회장도 만만치 않은 강성이라, 자신의 이익이 침해받았다고 느낀다면, 쉽게 넘어갈 인물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선은 제임스와 의견을 교환해 보게. SHJ의 이익을 부각하면서 협의를 해 간다면, 제임스도 반대하지는 않을 거야. 내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SHJ와는 어떠한 분쟁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대통령의 의지를 확인 한, 두 사람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SHJ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는 앨 고어가 차지했을 거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다. 프레드는 군산복합체의 로비스트를 달랠 생각에 이마가 지끈거렸다.

    “야마시타 비서실장님, 절 따라오시죠.”

    하루나는 수정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저택을 찾았다. 집사인 크리스토퍼의 안내에 거실로 향한 하루나는 또각거리며 대리석을 밟는 자신의 하이힐 소리만큼 긴장했다. 크리스토퍼에 의해 거실문이 열리고 화사한 원피스 차림의 수정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반기는 모습에 하루나는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사모님, 무슨 일로 절 부르셨는지요?”

    “비서실장님과 차 한잔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맛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애들 아빠가 비서실장님이 내린 커피가 입맛에 딱 맞는다고 했거든요.”

    수정은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를 건넸다. 커피잔을 받아든 하루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자의 직감은 무섭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정을 바라보는 하루나의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회장님을 보좌한 오래되셨지요?”

    “십 년이 되었습니다. 사모님.”

    수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수정이 계속해서 차를 권했지만, 하루나는 커피잔을 손에 쥐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는 여자를 알아본다더군요. 회장님 동생과 잘 되기를 바랐는데, 사람의 인연은 사람이 어쩔 수 없나 봐요. 혹시, 비서실장님은 좋아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사, 사모님. 무슨 말씀이신지?”

    하루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태껏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기에, 수정의 질문에 하루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입술이 마르는지 하루나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 입술에 축이고는 탁자에 잔을 내렸다.

    “우선 제가 그리 마음이 넓은 사람이 못 되는 걸 이해해 주세요. 애들 아빠에 대한 비서실장님의 감정은 예전에 알고 있었어요. 이해하려고 노력도 해 봤고, 이 정도 위치의 남자에겐 한두 명의 여자는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마음을 잡아도 봤지만, 제가 욕심이 많은 여자란 걸 알게 되더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실 거예요.”

    “사, 사모님.”

    부정할 수도 있었지만, 하루나는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속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수정에게 경환을 사모하고 있다는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하루나의 어깨가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모님, 오해십니다. 회장님은 저에게 눈길 한번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회장님에겐 사모님과 아이들만 있을 뿐입니다.”

    “알아요. 십오 년 동안 몸을 섞은 사이인데, 애들 아빠의 성격을 모르겠어요? 어떤 여자가 달려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란 건 제가 더 잘 알아요. 그래서 더욱 비서실장님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렇다고 남편을 공유하겠다는 말은 절대 아니에요. 단지, 저 만의 남편이길 바라거든요.”

    하루나는 떨군 고개를 들지 못했다. 평생을 경환의 곁에서 그림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수정과의 이 만남으로 산산이 조각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루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렀지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손수건을 건네는 수정의 손을 하루나가 붙들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불순한 생각은 없었습니다. 회장님을 곁에서 보좌하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리되는 대로 SHJ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지 말아 주세요. 애들 아빤 비서실장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어요, 비서실장님이 SHJ를 떠난다면 애들 아빤 견디기 힘들 거예요. 부탁이에요.”

    이미 마음을 들켰는데도 떠나지 말아 달라는 수정의 요청이 하루나에겐 너무도 잔인했다. 하루나는 흐르는 눈물을 거두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수정도 마음이 불편했는지 하루나의 두 손을 잡았다.

    “같은 여자로서 이해는 충분히 하지만, 그게 제 남편이란 걸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부탁 하나 할게요. 유럽과 호주에 SHJ타운이 건설되면 책임자로 가 주시면 안 될까요?”

    하루나는 수정의 제안에 대답할 수 없었다. 수정과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하루나는 경영진들과 회의에 열중하는 경환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젠 자신이 경환을 놓을 때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경환을 향한 마음은 변할 수 없다는 게 하루나를 좌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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