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8화 (19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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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18

    SHJ퀄컴과 버크셔해서웨이의 지분 교환은 미국 경제에 잔잔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SHJ퀄컴은 5,250억 불의 시가총액으로 2위인 엑손모빌과 2,000억 불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지만, 시장에 풀리는 SHJ퀄컴의 주식은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어 호가만 연일 상승하고 있었다. 모든 투자가가 SHJ퀄컴의 지분이 시장에 나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상황에서, 260억 불에 달하는 빅딜을 통해 버크셔해서웨이와 지분교환을 했다는 소식은 투자를 준비하던 금융권과 투자자들을 허탈하게 만들어 버렸다. 워싱턴포스트가 SHJ에 넘어갔다는 사실은 이번 지분교환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것은 SHJ의 노림수이기도 했다.

    경제 뉴스가 플랜트와 IT를 넘어 우주로 도약하려는 SHJ의 발전에 맞춰, 경환의 재산에 대한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환의 귀엔 이런 보랏빛 뉴스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과 함께 들어오는 카일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열 사람으로 한 명의 도둑을 막을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이군요. 그래도 이번 사건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부동자세로 경환을 바라보는 카일을 향해 경환은 자리를 권했다. 계열사 경영진과 해외 사업장의 보안을 담당하는 수입 외엔 특별한 매출이 없는 SHJ시큐리티는 50억 불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경환의 사재로 충당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직원 수 8천 명이 넘는 경호 보안업체로 성장한 SHJ시큐리티였고, 최신 보안설비와 무장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에 비해 이번 존 해밀턴의 암살사건은 경환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우선 사건의 개요를 듣고 싶군요.”

    투명했던 집무실 유리가 색이 변하며 외부와 차단되고, 방음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 확인되자, 카일은 스위치를 눌러 대형모니터에 사건 보고서를 띄웠다.

    “이름 김상현, 나이 29세로 한국 공군의 특수부대인 CCT(공정통제사)에서 중사로 제대한 후, 레종 에트랑제(프랑스 외인부대)에서 5년간 용병으로 복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년 1월 경력자 모집에 채용되어 교육과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11월부터 서산에 배치되었습니다.”

    “우리 내부시스템의 문제는 뭡니까? 잠재적 적대세력이 버젓이 우리의 내부를 활보했다면 문제가 심각하다고 봅니다. 김상현에 의해 유출된 정보는 어느 정도입니까?”

    SHJ의 보안을 담당하는 SHJ시큐리티가 뚫린 심각한 상황에서도 경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화를 낸다고 해서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었고, 지금은 책임소재를 가리는 거보다는 문제를 수습하고 대책을 세우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이 경환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범죄사실 기록과 경력 확인, 주변 인물과의 관계를 탐문하는 현재의 채용방식의 허점을 노렸다고 봅니다. 보안 시스템에 접근할 보안등급이 되지 않아, 눈으로 확인한 정보 외엔 유출된 정보는 없는 거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채용방법을 수정하고 있고, SHJ시큐리티를 시작으로 전 직원에 대한 조사를 다시 시작하고 했습니다.”

    모니터의 화면으로 김상현의 이력서가 지워지고 인천 공항의 CCTV 동영상이 나타났다. 더부룩한 수염에 안경까지 착용한 사내의 화면에서 동영상이 멈췄다.

    “사건 발생 다음날 인천공항 CCTV 화면입니다. 나나미 히로시란 일본 여권을 사용해 대한항공을 통해 홍콩으로 출국한 인물입니다. 저희 얼굴 검출 프로그램으로 확인한 결과 김상현과 90%의 매칭률을 보였습니다. 홍콩 요원들이 따라 붙었지만, 미행엔 실패했습니다.”

    “영국 SAS에 프랑스 외인부대, 거기에 일본 여권까지 사용했다니, 쉬운 상대들은 아닌 거 같습니다.”

    인천공항의 CCTV 녹화분을 한국정부가 순순히 제공했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경환은 입수 과정을 묻진 않았다. 매년 50억 불이 넘는 자금을 투자하는 이유가 분명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는 경환을 향해 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회장님, 분명 이번 일은 우리의 자만과 나태함이 빚은 사건이라고 생각하지만, 분명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김상현의 경우 CCT 경력에선 특이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레종 에트랑제 경력과 존 해밀턴의 SAS 경력을 살펴보면 두 사람의 접점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현재 저희가 가진 가용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두 사람의 접점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저는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사의를 표하는 카일을 경환은 무심하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알과 어느 정도 얘기를 맞췄는지 알도 카일을 만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쟁 중엔 장수를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지금은 수장을 교체해 사기를 떨어트릴 시기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져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디푸어 사장을 신뢰하는 저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디푸어 사장의 사의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이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십시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알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지만, 경환의 신뢰를 다시 확인한 카일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우리가 너무 자만했다는 반성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HJ시큐리티는 SHJ의 최전방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한번 손을 볼 생각이라면 두 번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를 기하시고, 서둘러 두 사람의 배후를 찾아내야 합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끝까지 파헤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경환의 담담한 목소리에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지난 후에도 경환의 집무실은 열리지 않았다.

    어렵게 SHJ와의 만남을 성사시킨 에르나 솔레르그는 깊게 심호흡을 내쉬고는 보안요원의 안내에 따라 접견실에 들어섰다. STATOIL의 헬지 란드 회장의 도움으로 어렵게 휴스턴을 찾았지만, 기대했던 경환과의 만남에 대해서는 확답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접견실에 들어선 에르나는 황태수와 린다의 환대에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관님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안이 아주 철저하더군요.”

    “보안 시스템을 점검하느라 검문이 좀 강화되었습니다.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SHJ타운의 보안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황태수는 자세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에르나는 여성스럽다는 표현보다는 남자인 헬지 란드 회장이 수행비서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황태수는 린다를 바라보며, 두 사람의 맞붙는다면 과연 누가 이길지를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제임스 리 회장님을 만나지 못해 유감입니다.”

    “실무 협의가 끝나면 만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중요한 건 회장님과의 만남보다는 실무 협의가 아니겠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경환을 찾는 에르나에 비위가 상했는지 린다가 말을 꼬았지만, 에르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두 여자의 기 싸움에 황태수는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급히 말을 이었다. 보안이 뚫리는 심각한 위기상황에 한가하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르웨이 정부에서도 SHJ타운 건설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노르웨이는 지리적 위치로 우리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그건 장관님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미사여구를 빼고 정곡을 찌르고 들어오는 황태수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이번 만남으로 결정된다는 것이 에르나를 압박할 수도 있었겠지만, 에르나의 표정에선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준비한 자료를 책상 위에 펼친 에르나는 강한 악센트가 섞인 영어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부회장님의 지적 틀린 게 없습니다. 스웨덴과 핀란드에 육로가 막혀있고, 유럽에서도 가장 변방에 위치한 노르웨이에 SHJ타운이 들어선다면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겠죠. SHJ의 기업 신조가 GIVE AND TAKE이라고 들었습니다. 제 말이 맞나요?”

    “뭐, 틀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장관님 말씀으로는 우리가 노르웨이를 선택했을 때, 그만한 이득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우리 생각과는 좀 차이가 있군요. 노르웨이가 비록 EEA(유럽경제지역) 가입국이긴 하나, EU 가입국은 아닙니다. 유럽에 녹아내리려는 SHJ타운이 비 EU 국가에 조성되었을 때의 손실이 크다는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황태수의 말이 끝나자, 에르나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처음부터 날카롭게 몰아세우는 황태수는 잡은 주도권을 놓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황태수는 반론할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에르나를 더욱 몰아쳤다.

    “그리고 장관님이 제안하신 셰일가스에 대한 문제는 수익성이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물론 폴란드와 프랑스에 이어 83TCF(조 입방피트)로 유럽 3위의 매장량을 보이고는 있지만, ALUM 셰일층은 지질학적 구조가 복잡해 가스 채굴이 쉽지 않다고 하더군요. 노르웨이보단 매장량이 가장 높은 미국이나 중국이 우리에겐 더 좋은 파트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회장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SHJ가 미국에서 셰일가스 채굴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SHJ라면 이를 갈고 있는 중국이 과연 SHJ의 진출을 원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황태수는 아차 싶었다. 미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형성한 석유재벌이 SHJ의 채굴을 바라만 보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도 뻔했다. 에르나에게 틈을 허용한 황태수는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노르웨이 정부가 제안한 셰일가스 공동개발은, 빛 좋은 개살구란 결론을 낸 상태였다. 에르나와의 만남은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았고, 이미 최석현 주도로 영국과 독일 정부와 협상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노르웨이는 셰일가스만 있는 건 아닙니다. 노르웨이는 수출의 45%가 석유와 천연가스란 사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럼 노르웨이가 채굴하는 석유와 천연가스 부문에서 우리와 합작을 하시겠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일이 묘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셰일가스만 본다면 이번 협상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석유와 천연가스라면 말이 달라질 수 있었다. 중동의 쿠웨이트보다는 채굴량이 많은 노르웨이의 석유와 천연가스를 확보할 수 있다면 핵융합에너지가 상용화에 성공하기 전까지 SHJ의 미래수익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원이 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석유와 천연가스는 만만한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 황태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SHJ가 석유사업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다는 말이 퍼진다면, 석유카르텔의 견제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주도권 일부가 에르나의 손에 쥐어지면서 협상의 상황도 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1970년 이전의 노르웨이는 식량의 자급자족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1971년 북해유전이 개발되고 산유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노르웨이는 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석유와 천연가스에 편중된 산업은 다른 제조업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우린 SHJ타운을 유치해 제조업과 IT 산업으로 돌파구를 찾는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장관님 말씀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직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주지 않으셨습니다. 기업은 철저히 이익을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오.”

    협상이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에 린다가 나서려고 했지만, 황태수는 손을 들어 린다를 제지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노르웨이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황태수는 에르나의 답변을 기다려 주었다. 여장부란 소리를 듣는 에르나도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도 오히려 대통령의 수족을 잘라내는 역공을 통해 정면돌파했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란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헬지 란드 회장이 제 답변을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황태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했다. SHJ엔지니어링의 중요 고객이기도 한 STATOIL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황태수와 에르나의 날 선 대화를 지켜본 헬지 란드가 무겁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STATOIL은 SHJ와 50:50의 비율로 신규 정유회사 설립을 제안합니다. 또한, SHJ가 STATOIL에 투자할 의향이 있다면, 그 투자를 적극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이 투자는 STATOIL이 채굴하는 석유와 천연가스의 지분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셔도 좋습니다. 또한, 우리가 추진하는 폴란드와 중국, 캐나다의 셰일가스 개발에도 공동으로 진출할 것으로 제안합니다. 이 정도면 SHJ타운이 노르웨이에 유치되는 이점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결정은 SHJ의 몫입니다.”

    “STATOIL에서 발주하는 시추선과 고정식 플랫폼, 정유 플랜트에도 SHJ의 참여를 인정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우린 SHJ엔지니어링과 좋은 관계입니다. SHJ의 실력과 능력은 이미 검증이 된 상태고요. 부회장님이 말씀하신 부분도 충분히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떡밥이 너무 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자신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또한, 총리도 아닌 장관의 말을 백 퍼센트 믿을 수도 없었다. SHJ시큐리티 문제로 정신이 없을 경환에게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는 황태수는 고민하는 경환의 모습에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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