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7화 (194/264)
  • #217

    다시 사는 인생 - 217

    “회장님! 저와 상의도 없이 이런 결정을 하면 어떡하세요? 도대체 제가 SHJ에 필요하긴 하신 겁니까?”

    워런 버핏이 SHJ타운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후, 자신의 전용기로 휴스턴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린다가 경환의 혼을 빼놓기 시작했다. 경환도 자신의 잘못을 아는 터라, 린다의 앙칼진 목소리에 대꾸도 없이 먼 산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리는 린다의 곁에 서 있는 황태수는 린다를 말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보였다.

    “그게 그렇게 됐습니다. 워런이 설마 버크셔해서웨이 지분을 내놓을지 정말 몰랐거든요.”

    “분명 이번 거래는 우리에게 좋은 거래지만, 세 곳 중에서 우린 선택을 해야만 해요.”

    “린다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굳이 우리가 자금문제로 인수를 포기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애플은 MS에게 생색을 내는 선에서 인수를 중단하고 야후와 스페이스X 인수에 집중한다면 자금에 큰 문제는 없다고 보는데.”

    경환은 말을 얼버무리며 린다의 눈치를 살폈다. SHJ의 자금운용을 도맡아 처리하는 린다는 경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고, 황태수와 더불어 경환의 독선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SHJ의 초반 성장을 경환의 미래지식이 이끌었다면, 지금은 혼자서는 감당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린다는 말을 돌리려는 경환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회장님이 저를 믿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적어도 이런 빅딜은 사전에 상의가 필요했다고 봅니다. MS와의 주식교환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회장님!”

    “린다를 내가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앞으로 자금문제는 린다와 먼저 상의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번은 눈감아 주세요.”

    린다와의 언쟁을 지켜만 보고 있는 황태수를 향해 눈을 흘겼지만, 황태수는 먼 산을 바라보며 경환의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SHJ에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경환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해 준 것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에르나 솔레르그 장관의 방문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실무에 대한 협의는 부회장님이 하시겠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장관이 방문하는데, 회장님이 만나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셰일가스에 대한 공동개발로 SHJ타운 유치를 피력하고 있는데, 저도 고민이 많네요. 핵융합에너지의 상용화까지는 많은 투자와 시간이 필요할 거고, 이왕 에너지로 우리의 미래 사업을 결정했다면, 셰일가스도 입맛을 돋우는 제안이긴 하지만, 너무 변방이라서요.”

    노르웨이와 STATOIL은 SHJ타운 유치를 위해 영국정부 다음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년 동안 SHJ타운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지만, 앨 고어와의 피 튀기는 싸움으로 그 순위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초조한 에르나는 미 대선이 끝나자마자, 미국행을 서둘렀고 SHJ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페인이 유치를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지만, 영국을 제외하곤 세금과 자치권 문제에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셰일가스에 대한 경제적 수익을 분석해 보세요. 충분한 계산이 선다면 노르웨이도 검토해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에르나 장관은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세요. 그리고 자선사업을 하려고 유럽에 타운을 조성하는 게 아니니, 우리의 조건과 맞지 않는다면,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회장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던 알이 보이지 않습니다.”

    “SHJ시큐리티와 회의를 진행한다더군요. 저도 알이 없으니 허전합니다.”

    SHJ시큐리티 지휘본부가 위치한 그룹사옥의 깊은 지하에는 대형 모니터엔 위성에서 들어오는 실시간 화면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고, 정보분석 요원들은 현장 요원들이 각 지역에서 보내오는 정보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원들 사이에는 NSA와의 사이버전을 진두지휘한 케빈 미트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휘본부 2층 케빈 미트닉의 집무실엔 평소 지휘본부를 찾지 않았던 알이 회의를 주도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주위로 SHJ시큐리티의 핵심인 카일과 미셸, 케빈까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나도 알 자네의 의견에 동의해. 아무리 생각해도 앨 고어가 너무 쉽게 물러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

    “태풍의 눈 속에 들어온 기분이야. 언제라도 폭풍우가 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회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지만, 내 감각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어.”

    “현장에서 생활하는 자네의 느낌이 그 정도라면 대비를 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회장님 신상에 좋지 못한 일이 생긴다면 SHJ는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경환의 경호에 매진한 알은 몰려드는 불안감에 경호를 부팀장에 일임하고 SHJ시큐리티 수뇌부를 소집했다. 비록 사장 자리를 카일에 물려 주긴 했지만, SHJ시큐리티에서의 영향력은 카일에 못지않았다.

    “케빈, 우리와 관련해서 새로운 정보를 건진 건 없는 건가?”

    “NSA와의 사이버전이 끝나고 이상하리만큼 조용합니다. 우리가 설치한 백도어를 통해서도 특별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간간이 공격해오는 중국 해커들이 전부일 정도입니다.”

    “자네의 실력은 믿지만, 너무 자만하면 안 되네. 우리를 절대 노출하는 일은 없어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노출을 방지하기 위해 회장님이 천문학적인 돈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신 거 아니겠습니까?”

    미국에서만큼은 NSA에 버금갈 정도의 정보전을 수행할 능력은 이미 갖춰져 있었다. 보안팀의 정보 수집능력에도 이렇다 할 정보가 걸리지 않고 있다는 게 알과 카일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다. 불안해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셸이 입을 열었다.

    “카일, 존 매케인이 벌써 장난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닐 거야. 공화당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존 매케인이 등을 기댈 곳은 우리밖에 없을 테니까. 그리고 존 매케인의 주위엔 이미 우리가 심은 눈이, 한두 개가 아니야.”

    카일은 미셸의 말을 일축했다. 존 매케인은 물론이고 의회의 주요 의원들 주위엔 이미 현장요원들을 심어 놨기 때문에 의외 차원에서 SHJ에 대한 작업이 들어갔다면 정보가 넘쳐나야만 했다. 알이 카일의 말을 받았다.

    “흠, 정치권이 아니라면 기관이나 조직이라고 봐야 할 거 같군. 서산에 있는 존 해밀턴의 문신이 확인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설명해 주게.”

    “너무 교묘히 문신을 지워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같이 체포된 존 해밀턴 수하의 지워진 문신에서 영국 SAS의 문신을 확인할 수 있었네. 그런데 SAS에서도 존 해밀턴의 정체는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게 문제야.”

    “흠, 영국 SAS라면, 우리도 함부로 작전을 벌일 수는 없겠군.”

    “신중해야 하겠지. 그나마 영국정부나 MI6가 개입한 게 아니란 점이 다행일 정도야.”

    세계 특수부대의 모체가 될 정도로 SAS의 전투력과 특수전 능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NAVY SEAL과 한국 해병대와 특수부대를 주축으로 구성된 SHJ시큐리티도 막강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동수의 팀별 전투라면 승패를 자신할 수 없었다. 특수전 상황에서 방어나 경호가 공격보다 수배는 어렵다는 사실이 알과 카일을 근심에 빠트렸다.

    “존 해밀턴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건가?”

    “지독한 놈이지만, 서서히 무너지고 있어. 정 입을 열지 않는다면, 특단의 조치를 취할 생각이야. 스캇이 재밌는 기계를 만들었더라고, 후유증이 심각할 수도 있다는 분석에 거의 사장될 기계를 내가 가져왔거든.”

    “죽이든 살리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입만 열게 하라고. 그리고 앨 고어의 배경과 존 해밀턴과의 연계성은 보이지 않나?”

    “연관성은 없다고 보지만, 주시는 하고 있어. 다른 정보가 입수되면 자네에게 먼저 말해 주겠네.”

    불안감은 계속되는데, 그 실체는 아직 오리무중이었다. SHJ시큐리티 수뇌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에 대해 사력을 다해 뒤쫓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고 있지 못해 답답했다. 알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봤다. 소모품인 용병으로 전장을 기웃거렸을 자신들은 경환이 내민 손 덕분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미국 최고의 정보기관인 NSA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SHJ시큐리티에 대한 자부심도 결국이 경환이 자신들에게 만들어 준 선물이었다. 수뇌부들과 시선을 교환한 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이 아주 좋질 않아. SHJ타운 안이라면 상관없지만, 회장님과 가족들의 외부 활동 경호를 증강해 주게. 외부 출입이 잦은 정우는 항상 방탄복을 입히고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해야 할 거야. 회장님의 아킬레스건이 가족이란 사실을 모두 잊지 말아 주게. 회장님이 무너지면 SHJ의 미래는 그것으로 끝이야.”

    “알, 그게 우리의 최대 약점이란 걸 잘 알고 있네. 우리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지켜내야지. 알의 말에 더해, 케빈은 가상 적대세력들의 움직임을 24시간 감시하고, 미셸은 미시즈 리와 정우, 희수에 대한 경호인원과 화력을 증강하도록 해. 그리고 외부 활동 시, 경호 차량을 추가로 배차하고 필요하다면 헬기도 증가시켜.”

    지휘본부의 모니터엔 위성에서 전달하는 화면이 수시로 바뀌며 분석 요원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은밀히 진행되는 SHJ시큐리티의 수뇌부 회의는 늦은 밤에도 세부 경호내용을 검토하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

    한국의 작은 도시였던 서산은 SHJ아시아본사가 세워지면서 인구유입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SHJ와 관련된 중소기업들과 관공서가 SHJ와의 원활한 피드백과 물류비 절감을 위해 서산에 몰려드는 이유도 있었지만, 서산에 가면 굶어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 퍼지면서 수도권으로 유입되던 인구가 서산으로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SHJ아시아본사는 현금결제로 하청업체가 자금난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고, SHJ가 정한 품질을 맞춘 업체에 한해 단가 네고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2차 벤더에게도 적용되어 1차 벤더가 2차 벤더에게 무리한 단가 인하 혹은 어음결제를 하다 적발되면 하청계약을 해지하는 방법으로 통제해 나갔다. 이런 SHJ의 정책은 오성과 대현 등 대기업에게 큰 영향을 끼쳐 실력 있는 하청업체를 잡기 위해 SHJ의 정책을 따라갈 수밖에 만들었다.

    서산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서산 SHJ타운은 저녁 8시를 넘긴 상태에서도 환한 불빛을 밝히고 있었고, 지하공간에 위치한 SHJ시큐리티 한국지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중 삼중으로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특수 구간으로 SHJ시큐리티 복장을 한 사내가 카트를 끌고 있었다.

    “정지! 못 보던 얼굴인데.”

    “김상현이라고 배치된 지 한 달 된 신입이야. 저녁 배달한 지 일주일 됐어. 자네 휴가기간에 바뀐 거라 자넨 잘 모르겠지만.”

    “헤헤, 군에 있을 땐 저도 날고 기었다고 자부하는데, 지금은 식사 배달이 주 업무입니다. 어휴, 저도 참 처량한 신세라고요.”

    의심을 품은 요원 하나가 카트에 담긴 음식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지만, 다른 요원은 대수롭지 않게 김상현의 신분증을 건네받아 IC 칩을 확인하는 단말기에 넣었다. 정상이라는 녹색등을 확인한 요원은 김상현에게 눈짓을 보냈고, 김상현의 지문과 홍채가 인식기를 통과한 후에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지독한 놈들이니까, 말 섞지 말고 밥만 주고 빨리 나와.”

    “선임들에게 하도 교육을 받아서 귀에 딱지가 내려앉았습니다. 저도 빨리 돌아가서 서류 정리를 해야 한다고요.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온통 하얀 벽으로 치장된 방엔 초췌한 표정의 존 해밀턴이 철창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랫동안 취조에 시달린 존 해밀턴은,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로 초점을 잃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고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제작된 마우스피스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김상현은 방 안에 중무장한 요원의 확인을 거쳐 카트를 철창 앞으로 끌었다.

    “어이, 밥 먹을 시간이야. 오늘은 메인이 스테이크라고.”

    고무로 만든 식판을 밑구멍을 통해 밀어 넣은 김상현은 존 해밀턴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김상현의 비아냥은 존 해밀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지 김상현은 분을 참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 자식이, 사람 말이 들리지 않는 거야? 사람이 말을 하면 쳐다봐야 할 거 아냐!”

    “이봐, 처먹든 말든, 신경 끊고 빨리 나가기나 해!”

    중무장한 요원이 김상현을 향해 호통을 치자, 김상현은 고개를 긁적였고 존 해밀턴이 고개를 돌렸다. 순간, 김상현은 중지를 검지 위로 포개며 날카로운 시선을 존 해밀턴에게 건넸고, 이내 손가락을 풀고는 실실 웃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음식을 앞에 둔 존 해밀턴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흔들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빵과 스테이크를 집어들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존 해밀턴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걸신들린 사람처럼 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다.

    “저 자식 왜 그러는 거지?”

    바닥에 널브러진 존 해밀턴의 몸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입 주위로 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각한 상황이란 사실을 인지한 요원이 급히 철창을 열고 존 해밀턴을 살폈지만, 존 해밀턴의 동공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비상벨 눌러! 아까 음식 배달한 새끼, 당장 수배해!”

    요란한 비상벨이 지하에 퍼지며 야간 근무조를 부산하게 만들었지만, 존 해밀턴의 몸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김상현을 체포하기 위해 요원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지만, 김상현은 이미 정문을 통과해 사라진 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