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6화 (193/264)

#216

다시 사는 인생 - 216

미국의 대선은 너무 싱겁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민주당의 강세지역인 서부 일부 주와 특히, 민주당의 아성인 뉴욕에서 패배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면서 민주당은 절망에 빠졌다. 앨 고어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며, 존 매케인을 추격하려던 조셉 리버만 캠프는 일찌감치 짐을 정리했고,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을 공화당에 내준 민주당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에선 앨 고어와 민주당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SHJ에 줄을 대기 위해 치열한 물밑 작업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SHJ는 모든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정치권에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었다.

시끄러웠던 2004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12월에 들어서자, SHJ는 그동안 움츠렸던 비상경영체제를 종료하고 공격적인 투자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 SHJ 사설 비행장으로 전용기 한 대가 착륙하고 SHJ타운에 준비된 연회장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SHJ타운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리 회장님과의 만남을 많이 기대했습니다.”

경환은 집무실과 연결된 연회장으로 노쇠한 투자의 귀재를 안내했다. 이번 만남은 버크셔해서웨이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한 경환에 의해 이뤄졌다. 지분 23%를 확보해 워싱턴포스트의 최대 주주이기도 한 워런 버핏과의 만남은 경환에겐 호기심 이상의 흥분은 주지 못했지만, 그의 투자 철학만큼은 존경하고 있었다. 소믈리에가 따라 준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나눈 두 사람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흘렀다.

“리 회장님, 저와의 식사에 얼마가 걸려있는지 아십니까?”

“매우 비싸다고 알고 있습니다. 올해 경매가가 20만 불이었으니, 최소한 저는 20만 불은 벌었네요. 하하하.”

와인을 한 모금씩 나눈 두 사람은 가벼운 농담으로 대화의 물꼬를 터 갔다. 기부를 위해 1999년부터 시작된 워런 버핏과의 식사 경매는 세간의 이목이 쏠리면서 경매가격은 매년 올라가고 있었다. 워런 버핏의 요청으로 이뤄진 만남으로 경환은 최소 20만 불은 번 셈이었다.

“궁금한 것이 있었습니다. IT 업종엔 투자하지 않는 회장님이 SHJ퀄컴의 지분 1.4%를 소유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경환의 질문에 위런 버핏은 미소를 지었다. 빌 게이츠를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손꼽으면서도 MS엔 일절 투자를 하지 않을 정도로 위런 버핏은 IT 업계와는 담을 쌓고 있었다. 그런 워런 버핏이 SHJ퀄컴의 지분을 소유하기 위해 20억 불을 투자했을 때, 경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와인을 향기를 음미하며 살짝 입술을 적신 워런 버핏이 경환을 바라봤다.

“저는 제가 예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투자를 집행합니다. 그런데 IT의 변화 추세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더군요. 20년, 30년 후의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투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날로그 세대인 제가 디지털을 따라가기는 무리더군요. 그러나 SHJ의 투자가치는 쉽게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경환은 워런 버핏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되묻지 않았다. SHJ퀄컴의 초반 주가상승은 워런 버핏의 투자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애피타이저에 이어 음식들이 하나씩 세팅되어가면서 두 사람의 만찬은 본격적으로 이어졌고 워런 버핏은 경환의 궁금증을 해소키 위해 말을 이어갔다.

“저는 리 회장님이 SHJ타운을 건설하며 보여준 경영철학에서 SHJ의 미래를 봤습니다. SHJ퀄컴과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그 뒤에 SHJ구글과 그룹사옥을 건설하시더군요. 가장 늦게 저택을 건설하셨고요. 졸부 대부분은 자기 것을 먼저 챙깁니다. 그건 인지상정이라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지만, 리 회장님은 회사와 직원들을 먼저 챙기시더군요. 리 회장님이 올해 37이니, 적어도 SHJ의 30년 후의 미래는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회장님이 주장하시는 스노우볼(SNOWBALL) 투자에 SHJ가 포함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경환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동양의 인사법에 익숙하지 않은 워런 버핏은 경환의 행동에 살짝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워런 버핏은 단기이익이 아닌 장기 투자로 인한 복리 이익을 추구했고, 그의 투자 전략은 작은 눈덩이를 언덕에서 굴려 큰 눈덩이를 만든다는 말로 스노우볼이란 말로 종종 표현되고 있었다. 경환은 SHJ퀄컴의 투자로 이미 세배에 달하는 이익을 봤음에도, 30년 후의 SHJ를 기대한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메인요리를 즐기는 두 사람은 소소한 일상 얘기와 현 정치 문제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도 워싱턴포스트의 인수합병에 대해선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않았다. 지독한 수 싸움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경환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 SHJ와 워싱턴포스트지의 소송을 어떻게 보십니까? 회장님도 워싱턴포스트의 이사이시니 의견이 있으리라 봅니다.”

“허허, 저는 복잡한 법적 분쟁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도널드가 욕심이 과했다는 말로 제 의견을 대신하겠습니다. SHJ가 TOB를 선언한다는 소문이 많던데, 리 회장님은 어쩌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저력이 있긴 하지만, 언론사를 소유한다는 게 복잡한 문제가 많더군요. SHJ 내부에서도 부정적인 의견이 대세입니다.”

“SHJ가 기업공개를 하지 않고 차입금도 제로인 상태에서 내부의견에 신경 쓰는 줄 몰랐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대한 애정이 많긴 하지만, 더 큰 이익을 위해 저는 SHJ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경환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투자를 위한 싸움에서 워런 버핏을 간 본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엔 허심탄회하게 공략하는 게 적절하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경환은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버핏 회장님 앞에서 제가 주름을 잡았네요.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지분을 넘기시겠습니까?”

“900불을 호가하던 주가가 SHJ와의 소송으로 620불로 떨어졌더군요. 700불이라면 내가 가진 지분의 50%를 넘길 용의가 있습니다.”

위런 버핏을 만나기 전, 린다가 진행한 도널드와의 협상은 마지막 사인만 남겨둔 상태였지만, 최대 주주인 워런 버핏의 지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확실한 경영권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총액 6억 불을 원하는 워런 버핏을 경환은 빤히 쳐다봤다.

“우리의 분석으로는 가만히 놔둬도 500불 밑으로 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끼 식사비용으로 2억 불을 원하시는 건 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4억 불 이하가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었다. 인수비용으로 7억 불을 책정하고 도널드를 밀어붙여 3억 불로 합의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을 존경한다더라도, 지금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존경심을 거둬들여야 했다. 워런 버핏 역시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하하, 2억 불의 차이가 있군요. 그렇다면 좀 다른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SHJ구글의 지분과 교환하는 건 어떻습니까?”

“허,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제게 그다지 필요한 회사는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워싱턴포스트를 포기하고 새로 신문사를 세우는 게 빠르겠네요.”

전략을 바꾼 워런 버핏은 집요하게 SHJ구글의 원했지만, 경환은 인수계획을 원점으로 되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 2억 불 차이는 SHJ에 큰 의미를 둘만 한 금액은 아니었지만, 자존심의 문제였다. 경환은 워런 버핏에게도 큰 고민을 안겨주고 싶었다.

“제 제안을 수정하겠습니다. SHJ퀄컴의 지분 5%를 시장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버핏 회장님은 어느 정도를 인수할 수 있으십니까?”

주당 2,600불을 호가하는 SHJ퀄컴의 주식 천만 주라면 최소 260억 불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경환의 도발에 침착하던 워런 버핏도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1%라 하더라도 52억 불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으로 자신의 투자패턴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당황하는 워런 버핏을 몰아세웠다.

“버크셔해서웨이 클래스 A 주가가 85,000불이더군요. 회장님이 39%를 소유하고 계시고요. SHJ퀄컴의 지분 5%를 넘기는 조건으로 워싱턴포스트의 지분 11.5%를 주당 700불로 인수하고, 나머지 차액은 버크셔해서웨이 클래스 A 주식과 교환하는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주가가 85,000불이고, 회장님은 39% 190만 주를 소유하고 계시니, 약 30만 주 6% 정도만 교환하면 되겠군요.”

워런 버핏의 힘의 근원과 영향력은 버크셔해서웨이에서 나오는 만큼, 그 영향력을 SHJ에 주지 않을 거로 판단했다. 인수금액의 차이 2억 불로 시작된 두 사람의 수 싸움은 그 금액이 260억 불로 늘어나 있었다. 워런 버핏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로 판단한 경환은 다음 수를 준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하하, 리 회장님이 제 고민을 없애 주는군요.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버핏 회장님이 그렇게 생각······, 네? 뭐라고요?”

“2억 불을 더 버는 일인데, 그 좋은 조건을 마다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SHJ홀딩스가 아니라서 아쉽기는 하지만, SHJ퀄컴도 SHJ의 양대산맥 중 하나이니,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2,600불도 사실은 저평가된 상태고요.”

워런 버핏의 자존심을 건드려,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오려던 계획은 워런 버핏의 빠른 판단에 막혀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20만 불을 넘길 것이 확실한 버크셔해서웨이와 SHJ퀄컴의 주식교환은 절대 나쁜 거래는 아니었지만, 문제는 야후와 애플, 스페이스X의 인수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줄 수 있었다. 경환은 잔소리를 퍼부을 린다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오늘 리 회장님과의 만남은 너무 즐거웠습니다. 버크셔해서웨이의 대주주가 되는 만큼, 오마하에서 열리는 주주총회에 매년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하하하.”

워런 버핏은 부글거리는 경환의 얼굴을 향해 큰 웃음을 선사했다.

“좋은 거래가 성사돼 저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회장님과의 식사비입니다. 가능하면 제 이름으로 기부해 주십시오. 제가 배가 너무 아파서요.”

“하하하.”

경환은 안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기부금의 액수를 확인하기 위해 봉투 안을 살피던 위런 버핏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봉투 안엔 경환이 미리 준비한 200만 불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워런 버핏을 숙소까지 인도한 후, 저택으로 돌아온 경환은 잠들어 있는 정우와 희수를 확인하고 서재로 향했다. SHJ를 정상에 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했지만, 워런 버핏의 노련함과 통찰력에 미치지 못한다는 걸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SHJ의 성장에 매진하며 뒤를 돌아보지 않았던 경환에겐 오늘 워런 버핏과의 만남은 소중한 기회였다.

‘띠리링, 띠리링’

휴대폰의 번호를 확인한 경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잠도 없으십니까?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습니까?”

‘워런과의 식사가 어땠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습니다.’

“2억 불짜리 밥을 먹어서 그런지, 통 소화가 안 됩니다.”

‘2억 불요? 뭔 식사가 그리 비싼 겁니까?’

워런 버핏과의 식사는 핑계일 뿐, 다른 목적이 숨겨있다는 걸 애써 감추는 빌 게이츠의 전화를 경환은 퉁명스럽게 받아넘겼다. 그 목적이야 뻔했지만, 경환은 워런 버핏에서 당한 분풀이를 빌에게 풀고 있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IRS와의 문제에 도움을 주셨는데, 인사가 늦어 미안합니다. 고마웠습니다.”

‘하하하, 별말씀을요. 지난번 진 빚을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스티브 잡스의 실각이 기정사실로 되면서, 애플의 대주주들이 SHJ와 만나고 있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애플을 인수할 생각입니까?’

빈정거리는 경환에게 빌은 직설화법으로 경환의 답변을 강요했다. 빌의 조급함에도 경환은 최대한 말을 아껴야만 했다. 애플이 SHJ와 경쟁을 하고 있었지만, 현재 최대 경쟁자는 MS였다. SHJ의 애플인수가 성사되기라도 한다면, MS의 독점적 지위에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빌은 늦은 시간임에도 전화기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SHJ홀딩스를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 아직 애플에 대한 인수를 검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와 중복되는 사업이라 크게 관심도 없고, 지배구조가 워낙 복잡해서 주주에게 끌려가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가만히 놔둬도 애플은 자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상황을 더 악화시킨 후에 애플을 조각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제임스, 독식하려다간 소화불량에 걸릴 수도 있어요. 난 SHJ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빌이 좋은 조건을 제시해 준다면, 언제든지 시애틀로 달려가겠습니다.”

빌의 고민에 불을 지핀 경환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애플이 탐나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은 MS와의 밀착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눈치 빠른 빌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고 경환은 빌이 들고올 선물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오늘의 피로를 잊기 위해 수정을 찾아 서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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