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5화 (192/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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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15

    미국 대선은 싱거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청문회의 여파를 줄이기 위해 백악관은 돈 알렉산더와 어거스트 기븐스의 사퇴를 전광석화와 같이 승인해 버렸다. 그러나 한번 기회를 잡은 공화당은 청문회를 이용하며 앨 고어의 재선 전략에 치명타를 연이어 날렸다. 비서실장인 다니엘까지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시키는 강공을 퍼부었고, 대통령 개인의 비리 사실이 연이어 언론에 보도되면서 청문회와 탄핵 문제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기 시작하자, 민심은 앨 고어에 등을 돌려버렸다.

    민주당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대선이 문제가 아니라, 다수를 차지하는 하원도 지키지 못한다는 분석이 대두하면서, 민주당은 공화당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한편으로 백악관의 결단을 촉구하고 나섰다. 대선 전에 치러질 하원 선거에서 피해를 최소화해야만 했다. SHJ를 건드려 분란을 조성한 앨 고어에 대한 동정심은 전혀 없었다.

    저택 서재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경환에 맞춰 비서실 일부가 저택으로 이전되었고, 비서실장인 하루나 역시 경환의 일정에 따라 근무지를 조종하고 있었다. 언론사별 보도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하는 하루나를 경환이 불러 세웠다.

    “앨 고어가 대선 후보를 사퇴하고, 조셉 리버만 부통령이 대선 후보를 받아들였네요. 하루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십 년을 비서로 일하면서도 하루나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묵묵히 경환을 보좌하는 일에만 매달리던 하루나는 경환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하루나의 감정을 모르지 않았지만, 경환은 애써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의 질문에도 하루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재무위원회의 청문회도 민주당은 큰 부담을 느낄 텐데, 대통령에 대한 청문회가 열린다면 이번 하원 선거의 패배는 기정사실이라고 봅니다. 공화당과 어떤 정치적 타협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앨 고어가 사퇴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려는 민주당의 고육지책이라고 봅니다.”

    하루나의 정확한 분석에 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방증하듯, 언론의 끊임없는 비리 보도에도 청문회나 특별검사 임명논의는 의회 내부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앨 고어의 정치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경환은 한발 물러서 있었다. 계속해서 몰아세워 사임 내지는 탄핵으로 여론을 조성할 수도 있었지만, 정치권이 연합해 SHJ를 상대할 수도 있다는 점이 부담감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하루나가 건네준 보고서를 덮었다.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어요. 이젠 하루나가 없다면 커피 한 잔도 제대로 마실 수 없게 되었네요. 그만큼 하루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많아요.”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부담되신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회장님.”

    “그런 말이 아니에요. 하루나를 백악관과 바꾸자는 제안이 들어오더라도, 난 그 제안을 거절할 겁니다. 하루나는 나와 내 가족의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해요.”

    하루나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가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말이 하루나의 복잡한 심경을 후벼 팠다. 첫 만남 이후부터 항상 경환을 보좌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는 쉽지 않았다. 승연과의 만남으로 잠시 흔들린 적은 있었지만, 경환을 향한 감정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하루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제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지만, 후회하거나 인생을 돌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떠나라고 하지만 않으신다면, 전 이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하루나를 떠나 보낼 생각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족쇄를 채우면 채웠지.”

    갈수록 농염해지는 하루나에 맘이 흔들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경환은 그럴 수 없었다. 회귀로 인해 수정을 다시 얻었고, 비명에 생을 마감한 희수도 이젠 자신의 곁에 있었다. 하루나의 등장이 마몬의 함정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경환은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하루나를 애써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어깨를 가볍게 떨고 있는 하루나를 바라보며 경환은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보루라는 말은 진심이에요. 유럽과 호주에 SHJ타운을 계획하고 있다는 걸 하루나도 알고 있을 거예요. 하루나가 원한다면, 두 곳 중 한 곳을 맡기고 싶어서 하는 말이에요.”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회장님은 어떤 결정을 하실 건가요?”

    “모든 건 하루나의 결정에 맡길 겁니다. 사실 하루나가 타주는 커피를 끊을 수도 없거든요. 그러니 잘 생각해 봐요.”

    “알겠습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서재를 빠져나가는 하루나를 경환은 잡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할지 몰랐지만, 경환은 하루나가 자신의 곁에 남기를 원한다면 막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루나가 내린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경환은 서둘러 서재를 나섰다.

    “여보, 정우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있는 경환 곁으로 수정이 경환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앉았다. 정우와 희수는 아빠 엄마의 애정행각에 만성이 되었는지, 힐끗 쳐다보고는 거실에 누워 책 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마커스 브라운 박사가 라이스 대학으로 옮겨올 줄은 몰랐어. 기술연구소 황 소장님도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해대는 통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경환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정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정우의 장래를 위해선 어떤 결정이든 빨리 내려야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교수직을 버리고 라이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마커스 브라운 교수는 NASA의 폴 허츠 박사와 함께 정우의 대학입학을 종용하고 있었고, 황정욱 소장 역시 정우를 한국에서 가르치겠다며 정우의 한국행을 은근히 바라며 경환의 어머니를 동원해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열살밖에 되지 않은 정우를 한국에 보내는 건 좋지 않을 거 같아요.”

    “나도 그건 탐탁지 않아. 9학년으로 월반시킨 것도 사회 경험을 쌓아야 하는 정우에겐 부담일 텐데, 지금 대학을 보낸다는 게, 정우 장래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없고.”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초등학교 교육은 정우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중학교로 월반을 시켰지만, 중학교의 교육과정도 정우에겐 큰 의미가 없었다. 중학교의 졸업시험조차 상위권 성적으로 통과하자, 학교에선 고등학교 진학을 추천했지만, 경환의 고집으로 9학년으로 월반시켰다. 휴스턴 지역 신문에선 천재에게 맞는 교육이 정우에게 필요하다는 논조의 사설이 실리기도 했지만, 경환은 이를 무시해 버렸다.

    “정우야, 잠시 이리로 와 보겠니?”

    희수와 놀고 있던 정우는 경환의 부름에 희수와 함께 소파에 올라앉았다.

    “정우 너는 어떤 공부를 하고 싶니? 아빤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시키고 싶지 않거든.”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밌긴 하지만, 천체물리학을 배우는 것도 재밌고, 기술연구소에서 공부하는 것도 재밌어요.”

    경환은 수정이 비켜난 자리에 정우와 희수를 앉히고는 둘을 꼭 안아 주었다. 앨 고어와의 피 말리는 싸움이 끝난 후로, 큰 결정을 제외한 그룹의 경영을 황태수에게 넘기고 경환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있었다. 틀이 잡힌 SHJ는 경환이 나서지 않더라도 무리 없이 운영되었지만, 점점 커가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빠, 학교에 다니면서 마커스 브라운 박사님을 자주 찾아가도 돼요? 할머니가 한국에 오라고 하시는데, 기술연구소는 재밌지만, 혼자 한국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 정우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만약에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면, 아빠한테 다시 말하고.”

    “아빠, 나는 대학 갈 때까지는 아빠하고 엄마 곁에 있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우와의 얘기를 듣던 희수가 정우에게 눈을 흘기며 경환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희수의 싸한 눈초리를 받은 정우가 몸을 움찔했지만, 경환은 두 아이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티비에선 앨 고어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분석하는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지만, SHJ의 이름을 거론하는 방송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2년 사이에 구독자의 6%인 5만 명이 떨어져 나간 워싱턴포스트지는 광고주들의 이탈 조짐에도 크게 위축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건 투자의 귀재인 위런 버핏이 30년간 최대주주로 있으면서 ‘인터넷과 TV가 발달해도 신문의 콘텐츠 전달력과 깊이를 절대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로 주주들을 설득했고, 주가의 고공행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 왔습니다.”

    워싱턴포스트의 회장인 도널드 그레이엄은 머리를 감쌌다. 어머니인 캐서린 그레이엄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닉슨을 사임하게 한 워터게이트의 영광은 어머니의 임종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대통령의 외압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던 워싱턴포스트의 강성 이미지는 정부의 미끼를 덥석 문 오판으로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뭘 바란다는 겁니까? 이미 신문 일 면에 오보에 대한 사과기사를 실었고, 관련자를 해고하는 정도면 우리도 성의는 표한 거 아닙니까?”

    “SHJ는 이 정도로 마무리할 생각이 없는 거 같습니다. 휴스턴의 F&J를 주관로펌으로 해서 시카고의 B&M과 워싱턴의 H.L까지 합류한 상태입니다. 아시겠지만, 이 세 곳의 로펌은 순위 20위 안에 드는 막강한 로펌입니다.”

    “우리 쪽 법무팀과 로펌은 도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청문회를 통해 정부의 표적수사가 확인되었고, 탈세는 없었다는 결론이 난 상태입니다. 합의가 최선인 상황이라는 답변과 함께 이번 소송에 발을 빼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였고 많은 어려움을 헤쳐온 관록도 이번 소송엔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백악관의 싸움이라면 언론탄압이란 명분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겠지만, 명백한 오보로 기업의 매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는 SHJ의 논리를 피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과 기사와 편집국장과 관련 기자를 해고조치 했지만, SHJ는 콧방귀를 끼며 법원에 소장을 제출해 버렸다. 밀려오는 후회에 도널드의 한숨은 깊어졌다.

    “회장님, 사실 SHJ가 원하는 합의금 5억 불은 우리의 여력을 넘어선 금액입니다. 소송을 진행한다 해도 마땅한 명분을 찾을 수 없는 상태라, 구독자의 이탈과 함께 주가 하락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보일 수 있습니다.”

    “SHJ가 터무니없는 합의금을 요구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SHJ에 5억 불은 없어도 그만인 액수였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사정이 달랐다. 5억 불이 아니라 1억 불에도 신문사는 심각한 자금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SHJ와의 법적 분쟁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주가는 연일 하한가를 기록하고 있었고, 매출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는 게 도널드를 고민에 빠지게 했다.

    “사실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월가의 소식통 얘기로는 SHJ가 우리에 대한 TOB(주식공개매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더욱이 워런 버핏이 은밀히 SHJ와 선을 연결하고 있다는 정보도 있고요. 이 말이 사실이라면, SHJ는 합의보단 소송을 통해 주가를 충분히 하락시키고, TOB를 통해 경영권을 확보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젠장! 워런 버핏까지 SHJ를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매출구조의 변화를 주기 위해 시작한 교육사업은 워싱턴포스트의 전체 매출에서 45%를 담당할 정도로 커져 있었다. 교육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정부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백악관의 미끼를 문 대가치고는 너무도 컸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까지 움직였다면 SHJ와의 소송전은 승리할 가망이 전혀 없어 보였다.

    “회장님, 우리에겐 두 가지 방법밖엔 없습니다. 소송전을 통해 치열하게 SHJ와 싸우든지, 아니면 SHJ와 인수합병을 논의하든지요. 지금 움직인다면, 좋은 거래가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뭐요! 워싱턴포스트를 어머니가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 몰라서 하는 말입니까? 닉슨도 무너트린 곳이 바로 여기란 말입니다.”

    회장 책상을 두들기는 도널드의 언성이 높아져 갔다. 그러나 비서실장의 말에 반박할 마땅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백악관과의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SHJ가 워싱턴포스트를 먹잇감으로 노린다면, 자칫 한 푼도 건기지 못하고 회장 자리에서 쫓겨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도널드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휴, 단 한 번의 오보 기사치고는 대가가 지독하군요. 아무도 모르게 SHJ에 만남을 제의해 보세요. 그 후에 모든 걸 결정하겠습니다.”

    도널드의 무너짐을 확인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칼은 밀려오는 피곤함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긴 호흡으로 심경을 정리한 칼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도청이 방지된 위성전화를 꺼내 들었다.

    “접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도착할 겁니다. 준비를 시작해 주십시오.”

    간단하게 통화를 마친 칼은 금연이란 말이 무색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곳의 주인 자리는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기쁨과 함께 칼은 긴 연기를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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