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4화 (191/264)
  • #214

    다시 사는 인생 - 214

    외곽부터 치고 들어가는 SHJ의 전략에 백악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 컨벤션 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래환경 포럼은 세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탄소세 도입을 재선 전략의 큰 줄기로 끌고 나가려는 앨 고어의 발목을 잡는 성과를 보였다. 존 매케인 캠프는 기상학자와 지질학자를 포함한 연구팀을 구성해 환경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해결하려는 정책을 준비하는 한편, 앨 고어의 탄소세 정책의 모순점을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지방정부와의 극한 대립의 화살이 백악관으로 몰리면서 떨어지는 지지도는 쉽게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지만, 앨 고어는 모든 문제의 시초가 SHJ라는 확신에 주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세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장님, 내일 자 워싱턴포스트지 기사 내용입니다.”

    황태수와 린다를 불러 2005년도 사업계획을 논의하던 경환은 카일이 건네주는 기사 내용을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앨 고어도 급했나 봅니다. 마지막 발악을 하네요.”

    경환이 건네준 기사를 확인한 두 사람은 어이가 없는 듯,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과묵한 성격의 황태수는 말을 아끼고 있었지만, 다혈질의 린다가 얼굴까지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회장님, 이런 중상모략이 계속된다면 SHJ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50억 불의 탈세 의혹이 적발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기사가 보도되면, 사실 여부를 떠나 우리 쪽으로 쏠리는 여론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쿡 사장의 말이 맞습니다. 회장님. 강력한 법적 대응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기다립시다. 법적 대응은 의혹만 증폭시킬 수 있습니다. 앨 고어도 FBI가 손을 털자, 마땅한 수단이 없었겠지요. 워싱턴포스트지에 대한 법적 대응은 돈 알렉산더를 무너트린 후 진행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선 로펌과 협의해 소송을 준비해 놓고 대기하세요.”

    명확한 정보출처를 밝히지 않은 기사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워싱턴포스트지의 일면을 장식한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SHJ의 법정 대응을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무리수를 보인 워싱턴포스트지의 노림수가 무엇일지, 앨 고어 뒤에 워싱턴포스트가 있는지 워싱턴포스트 뒤에 앨 고어가 있는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조쉬 하멜 FBI 국장은 스티븐 조던의 기자회견과 FBI의 불법작전 공개를 막기 위해 기자회견을 통해 SHJ에 면죄부를 준 후, 백악관과 SHJ의 싸움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상태였다.

    “SHJ시큐리티는 워싱턴포스트의 비리내용을 철저히 파악해 놓으세요. 그리고 이번 싸움으로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린다는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할 계획을 세워보세요. 우리도 여론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번 일만 마무리 되면, 어마어마한 배상금으로 허덕이게 만든 후, 집어삼키겠습니다.”

    린다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경환도 오한을 느낄 정도로 매서웠다.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린다를 맞이해야 할 워싱턴포스트가 경환은 불쌍하다고 느끼며 동정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싸움은 앨 고어에 국한하고, 민주당과의 싸움으로 번지는 건 최대한 자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년도 사업계획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데, 추가할 사업이라도 있나요?”

    “이번 NSA와의 사이버전이 릭 페니를 통해 공개되면서, 애꿎은 MS와 야후, 애플이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주가가 연일 하락하면서 야후와 애플의 사용자가 급격히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애플의 주주들이 스티브 잡스를 다시 한 번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있는 거 같습니다.”

    NSA의 백도어 문제가 불거지면서 야후와 애플은 이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NSA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는 바람에 매출급감과 사용자 이탈을 막지는 못했다. 점유율 10%를 간신히 유지하던 아이폰은 7%로 주저앉았고, 떨어진 점유율은 고스란히 엘리시움의 몫이 되었다. 아이맥으로 반짝 성공을 거둔 스티브 잡스는 밥그릇을 걱정해야 할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황태수의 이어지는 말은 경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SHJ구글에서 재밌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디스플레이 광고는 SHJ구글의 최대 약점으로 5%의 점유율이지만, 야후는 18%로 이 부문만큼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가하락으로 약세를 보이는 지금, 야후를 인수하자는 의견이 있습니다.”

    “인수가는 어느 정도입니까?”

    “최소 300억에서 최대 400억 불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MS가 야후를 인수하려던 이유도 SHJ구글의 약점을 파고들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황태수의 야후 인수제안은 경환의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막대한 인수자금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SHJ의 가용자금은 야후의 인수에 큰 부담을 주는 금액은 아니지만, SHJ유니버스의 우주개발 비용과 SHJ-JWH 기술연구소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이 문제였다.

    “스페이스X에서 합병 제안을 해 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야후와 스페이스X, 애플까지 인수검토를 해 보세요. 애플의 시가총액이 200억 불 밑으로 떨어졌고, 적자를 걱정해야 할 판이니, 좋은 협상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회장님 동시에 세 곳을 인수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유럽과 호주에 SHJ타운을 건설을 준비 중인 상태에서 너무 무리한 계획일 수도 있습니다.”

    “세 곳 모두 인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혹시 가용자금에 문제가 생긴다면, SHJ퀄컴의 지분 10%를 시장에 내놓는 방안을 검토하세요. 그리고 영국과 노르웨이, 독일이 SHJ타운 유치와 관련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니 계산기를 두들겨 봅시다.”

    앨 고어와 약속한 35%에서 25%만 시장에 내놓았기에 아직 10%의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주가가 2,500불을 넘어선 상태에서 10%의 지분이면, 500억 불의 자금은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애플의 인수 추진은 MS의 반발이 예상되긴 했지만, MS의 알짜배기를 빼 오기 위한 전략으로 활용한 계획이 경환의 머릿속에서 정리되고 있었다.

    다음 날 워싱턴포스트지의 SHJ 탈세 의혹 기사는 뉴욕타임스지 일면을 장식한 앨 고어의 의혹 기사에 묻혀버렸다. SHJ에 대한 공세에만 치우쳐, 뒷문을 확인하지 못한 앨 고어는 뉴욕타임스의 의혹 기사에 백악관 자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생명까지 걱정해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들었다.

    ‘쾅!’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으라고 했잖아!”

    책상을 내리친 앨 고어의 주먹이 떨리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막으려던 시도는 신문사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앨 고어가 던진 서류를 몸으로 받은 다니엘의 머리는 붉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SHJ의 물타기가 이렇게 빠를 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뉴욕타임스의 편집국장을 설득했지만, 수정 헌법 제1조를 들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다니엘은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의회는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라는 수정 헌법 제1조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였다. 정권 초기라면 모를까, 대선을 몇 달 남기지 않아 레임덕이 심각한 상태에서, 백악관의 제안을 수용할 언론사는 아무 곳도 없었다.

    “의혹 기사만 실었지만, 편집국장의 성격으로 봐서는 증거자료를 확보했다고 봐야 합니다. 우선은 강하게 부정을 하고 타협을 모색해야 합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습니다.”

    “이거였어. 릭 페니가 강하게 나갔던 이유도, 조쉬 하멜이 꼬리를 내리고 수사를 중단한 것도 SHJ시큐리티에 약점을 잡혔기 때문이야.”

    앨 고어는 손에 쥐어 든 뉴욕타임스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바닥에 던져진 일면에는 지난 대선 전, 자신이 처분한 옥시덴텔 프트롤리엄의 지분이 클린턴 행정부가 임기 말 면죄부를 준 마크 리치에게 양도되었고, 앨 고어 가문의 자금원인 옥시덴텔오일과 무기와 마약상인 마크 리치의 관계를 설명하며, 앨 고어와 마크 리치의 관계를 의심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정부가 추진하는 탄소세가 위험성과 높은 비용으로 꺼져가는 원자력 발전을 소생시키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앨 고어가 비밀리에 설립한 투자회사 GI가 7억 불의 자금을 확보해, 원자력 기업에 투자했다는 의혹을 제시하는 기사가 실려있었다. 단지 의혹을 보도한 내용이었지만, 증거가 첨부된다면,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움직였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NSA의 개인정보 사찰이나 텍사스 주의 이탈 조짐도 문제가 심각하지만,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SHJ와 타협을 해야 합니다. 대통령님.”

    “존 매케인이 기뻐 날뛰겠군. 이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은 없겠나?”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앨 고어를 바라보는 다니엘은 답답했다. 대선은 이미 물 건너간 상태라는 걸 아직도 인지하지 못한 앨 고어의 면상을 주먹으로 후려치고 싶었다.

    “다른 언론사에서 냄새를 맡기 전에 처리해야 합니다. 뉴욕타임스에서 증거와 함께 후속 기사를 내 보낸다면, 탄핵을 넘어 형사처분도 감수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경환을 쉽게 요리할 수 있다고 오판한 게 결정적 실수였다. 독기를 품은 경환의 공세는 이미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고, 연방정부 기관들은 SHJ와 부딪혀 깨져나가는 FBI와 IRS를 보며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군대를 동원해 SHJ를 밀어붙이는 방법밖엔 없었지만, 국내 문제에 군대를 동원했다간, 평생을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벽으로 퇴로가 차단한 쥐새끼라면 고양이를 물기 위해 마지막 힘을 발휘할 수도 있었겠지만, 벽이 아닌 고양이들로 퇴로가 차단된 쥐새끼라면 잡아먹히는 방법밖엔 없었다. 앨 고어의 머릿속에 사면초가라는 동양의 속담이 떠오르고 있을 때, 국무장관이 급히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의회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방금 재무위원회에서 IRS의 표적수사에 대한 청문회를 결의했다고 합니다. 돈 알렉산더와 다니엘까지 증인으로 채택되었고요. 이번 결의에 일부 민주당 의원들도 합세했다고 하니, 유리한 상황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네오콘 계열의 공화당 의원들을 회유해 의회의 움직임을 사전에 봉쇄했다고 자신하던 다니엘은 리차드 국무장관의 말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선이 코앞인데, 의회가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이유가 있다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위원회에서 표적수사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지 않나 봅니다. 문제는 재무위원회 청문회가 아니라, 뉴욕타임스의 기사에 대한 의회의 반응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잘못하다간 청문회가 동시에 열리게 생겼어요.”

    앨 고어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렸다. 의회까지 움직였다면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더욱이 민주당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는 건, 비빌 언덕조차 없다는 것을 뜻했다. 대선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생명을 걱정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는 것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끝났군. 제임스 이 친구 아주 지독한 면이 있어. 죽어가는 사람을 확인사살까지 할 정도니. 다니엘, 전화기를 좀 주게.”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미국 대통령이란 자리였지만, 치밀하게 준비된 SHJ의 그물망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의자에 깊게 등을 파묻은 앨 고어의 손에 위성전화기가 들려졌다.

    ‘바쁘신 대통령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빈정거리는 경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지만, 넥타이를 풀어헤친 앨 고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내가 졌습니다. 제임스의 실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 상황은 좀 달리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군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저를 절대악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까? 전 연방정부의 휘몰아치는 공세를 힘겹게 막고 있을 뿐입니다.’

    경환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수 싸움에 능한 앨 고어에게 틈을 보였다간, 한순간에 목줄이 끊길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만 끝냅시다. 제임스가 이자까지 쳐서 보내준 선물 너무 잘 받고 있습니다. 대통령만 아니라면, 총이라도 입에 물어야 할 상황까지 몰아세우더군요.”

    적막감이 흐르는 수화기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경환의 목소리가 앨 고어의 귓전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수고하신 앨 고어 대통령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씀 진심이길 바랍니다. 이번 일은 제가 시작한 일이 아니란 것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대통령님.’

    “허허, 승자의 배려치곤 좀 강도가 셉니다. 내 뒤에 누가 있는지는 이미 제임스도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고민 많이 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이만.”

    묘한 여운을 남기고 전화를 끊은 앨 고어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내려 갔다. 타협을 원치 않는 경환의 의중을 확인한 이상, 지금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정치적 결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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