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다시 사는 인생 - 213
릭 페니의 기자회견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미국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NSA의 무차별적인 개인정보 사찰이 연일 신문과 방송의 핫뉴스로 떠오르면서 비난의 화살이 백악관과 NSA에 집중되면서 미국재계와 정계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맞서는 SHJ가 골리앗을 쓰러트린 다윗으로 묘사되며 신문의 삽화에 등장하자, 여론의 추가 급격히 SHJ로 기울면서 백악관은 진퇴양난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비상대책회의가 연일 열리는 SHJ 회의실엔 비장한 모습의 경영진들이 사태추이를 살피며 말을 아끼고 있었고, 그 중심엔 경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린다, 주지사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요? 기자회견 정도면 충분히 역할을 다 했다고 보는데 말입니다.”
“정치적 야망이 큰 사람입니다. 이걸 기회로 삼아 우리와 국민 여론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겠다는 생각일 겁니다. 어찌 되었건 우리에게 불리한 건 아니니, 한번 지켜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SHJ시큐리티의 정보보고서를 살피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릭 페니는 연방정부에 대한 항의 표시로 SHJ타운의 외곽 경비를 수행하기 위해 주 방위군을 소집할 수도 있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연일 강도 높게 연방정부를 비난하고 나섰다. 아울러, 텍사스 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오클라호마와 아칸소, 루이지애나 주 정부가 텍사스 주 정부와 연합할 의사를 표하면서 남북전쟁 이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 있던 지역갈등이 수면 위로 부상하며 정치권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방위군까지 동원하는 모양새는 앨 고어에게 역공을 제공할 수도 있으니 이쯤에서 자제시키세요. 그런데 SHJ퀄컴의 주가가 2,500불을 넘었다니 의외로군요.”
“IRS의 세무조사가 시작될 무렵 빠지던 주가는, NSA의 집요한 공략에도 뚫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급반등세로 돌아섰습니다. 오히려 MS와 애플, 야후의 주가가 폭락하고 있습니다.”
“제이콥스 사장님, 매출변화는 어떻습니까?”
“최고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엘리시움과 컴페니언의 매출이 주가의 상승과 함께 반등하고 있습니다. 엘리시움-2의 출시 일정을 앞당길 예정입니다.”
IRS의 세무조사와 FBI의 내사는 악재가 아닌 호재로 작용하며 답보상황을 보이던 엘리시움과 컴페니언의 매출을 급상승시키고 있었다. 경환은 피를 토하는 앨 고어의 모습을 상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흘렸다.
“슈미트 사장님, 이번 구글라인과 구글메신저를 통한 SNS 전략이 슬슬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부턴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야 할 시기라고 봅니다. 강도를 높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동안 좀이 쑤시는 걸 참느라 혼났습니다. 내일부터 백악관은 지옥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잠시 고개를 들어 천정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자신에 대한 주류사회의 반감과 견제는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다. 과도할 정도로 SHJ시큐리티를 키운 목적도 지금의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경환의 몸부림이었다. 미국사회를 움직이는 기득권 세력은 자신과 앨 고어의 싸움을 관망하며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경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제2의 딕 체니나 앨 고어가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이번만큼은 인정을 두지 않고 철저히 밟아버려야만 했다.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져든 경환을 향해 최석현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상원 재무위원회에서 곧 좋은 소식이 도착할 예정입니다. 돈 알렉산더 국장이 쉽게 이 난국을 헤쳐나가지 못할 겁니다.”
“수고했습니다. 앨 고어의 손발을 하나씩 묶어 버리는 게 우리 싸움의 시작이 될 겁니다. 그나저나 공화당 내부에서도 이견이 많다는 말이 들리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최석현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앨 고어와의 극한 대립으로 신경이 곤두서있는 경환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지만, 경환은 정보보고서를 통해 공화당의 분열을 이미 아는 듯 보였다. 매도 먼저 맞아야 좋다는 생각에 최석현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회장님 말씀이 사실입니다. 존 매케인의 당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상황이 영향을 끼치는 점도 있고, 네오콘 계열의 의원들 일부가 민주당과 백악관에 대한 공세에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세를 거르지는 못할 정도라 큰 영향은 없다고 봅니다.”
네오콘이라는 변수가 다시 부상하며 딕 체니의 악령이 경환의 눈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딕 체니를 두려워하던 과거의 SHJ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경환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가며 음산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최석현을 긴장시켰다.
“세가 만만치 않다고 느낀 앨 고어가 네오콘 쪽에 정보를 흘렸겠지요. 네오콘도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상관없습니다. 최 사장님은 로비스트를 동원해 IRS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디푸어 사장님, 특별한 보고 내용은 없습니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과는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는 시기입니다.”
경환에게 전달되는 일일 정보동향 보고서는 경영진들에게 전달되는 보고서와 그 질이 달랐다. SHJ유니버스에서 제작하고 관리하는 인공위성 사업에 올해부터 SHJ시큐리티의 투자가 이뤄지면서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인공위성들이 SHJ유니버스가 아닌 그룹 사옥 지하에 위치한 보안팀의 관리로 넘어가고 있었다. NASA에서조차 이런 사실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진행되는 작업으로 SHJ시큐리티의 정보능력은 한층 배가되었고 여기에서 수집된 고급정보들이 경환의 손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었다.
경환의 지시를 받은 카일은 다시 한 번 확인을 위해 경환과 시선을 마주쳤다. 경환이 고개를 끄덕여 의사를 확인한 카일이 굳게 닫혀있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 세계를 커버하는 NSA나 CIA보단 미약하지만, 미국과 한국 등 SHJ의 주요 거점에 대한 SHJ시큐리티의 정보능력은 미연방 정보기관과 대등하다고 자평합니다. 조만간 조쉬 하멜 FBI 국장의 기자회견이 열릴 예정입니다. FBI의 시한폭탄이 우리 손에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FBI는 우리를 몰아세우기 어려울 거라고 봅니다. FBI뿐만 아니라, 연방정부와 SHJ의 적대 세력에 대한 아킬레스건 또한, 이미 확보한 상태입니다.”
“그, 그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한 번에 휘몰아친 카일의 발언은 회의실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황태수조차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카일을 향해 반문할 정도로 카일의 발언이 주는 충격파에 SHJ를 이끄는 경영진들은 기쁨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공세가 SHJ시큐리티 주도로 이뤄진다는 것엔 반대하지 않지만, 소수의 조직이 정보를 독점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심각한 표정의 황태수가 정보 독점에 대한 우려를 표하자, 린다를 비롯한 경영진들 역시 이에 동의를 표하고 나섰다. 카일은 발언하기 전, 이런 분위기를 예상했다는 듯 입을 굳게 걸어 잠잤고 회의실에 싸늘한 냉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경환이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여러분들을 믿고 신뢰하듯, 여러분들도 SHJ시큐리티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SHJ시큐리티 내부에서도 정보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 위해 팀장들 간의 협의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정보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점을 이해해 주시고 각 계열사에서 필요한 정보는 SHJ시큐리티를 통해 상시 제공될 것입니다. 가족을 지키는 건 가족밖에 없다는 사실을 모두 기억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회장님. 제가 지나쳤습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자칫, 전면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부의 분열로 쓰러질 수도 있었던 상황은 경환의 질책성 발언과 황태수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 회의실 분위기를 다시 잡은 경환은 마지막 칼을 빼 들었다.
“여론도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분위기도 잡았으니, 이젠 곰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시작을 할까요?”
“SHJ시큐리티에 선공을 내 주긴 했지만, 본격적인 곰 사냥은 SHJ홀딩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기대해 주세요.”
“하하하.”
가라앉은 분위기를 린다가 살리고 나서자, 회의실엔 다시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세계 유일의 강대국인 미국과 그 미국을 움직이는 대통령과의 전면전에도 SHJ의 경영진 누구 하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악관을 향한 SHJ의 비수는 휴스턴이 아닌 워싱턴에서 날을 세우고 있었다.
“미국정부가 추진하는 환경정책을 반대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엔 저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잘못된 사실을 진실로 둔갑시키는 것에는 학자인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워싱턴 컨벤션 센터에선 SHJ홀딩스와 MS가 후원하는 미래환경 포럼이 개최되었고, 이 포럼엔 세계 기상학계 과학자들과 천문학자, 환경운동가와 지질학자 및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열띤 토론이 벌어지는 자리에는 캘리포니아 공대의 마커스 브라운도 눈에 띄었다.
“제임스 핸슨은 1988년부터 십 년간 섭씨 0.35도가 올라갈 것을 예측하며 지구 온난화를 주장했지만, 사실은 0.11도밖엔 오르지 않았습니다. 300%의 오차를 보인 예측은 과학이 아닌 정치적 사기일 뿐입니다. 미국 정부는 화석연료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가 지구 온도를 높여 지구를 멸망시킨다고 홍보하지만, 16만 년 전, 북극 온도는 지금 온도보다 2도 높았다는 증거는 무시하고 있습니다. 틀린 과학을 신봉하며 증거를 무시하는 미국정부가 무엇을 노리는지 확인해야만 합니다.”
열변을 토하는 에드워드 로렌츠는 전 학문에서 사용하는 카오스 이론과 나비효과의 개념을 창안한 기상학계의 중진이었다. 포럼의 주제를 강연하는 에드워드의 동작 하나하나에 시선이 집중되었고, 증거 사진과 그래프들이 대형 모니터에 펼쳐지며 에드워드의 이론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이론을 강변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기온을 상승시킨다고 주장하지만, 그래프에서도 알 수 있듯 1940년부터 1970년까지는 이산화탄소의 지속적 증가에도 온도는 거꾸로 하강했습니다. 정부가 주장하는 이산화탄소 증가율 그래프는 절벽을 보는듯한 급경사를 보이고 있지만, 사실은 백만분의 316에서 백만분의 376으로 증가했을 뿐입니다. 우리 전체 대기에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작은 증가량일 뿐입니다. 농작물이 줄어든다지만,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성장을 촉진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사막이 는다고 떠들고 있는데, 사하라 사막은 1980년 이후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사기를 벌이는 미국정부의 목적은 환경보호가 아닌 탄소배출권 거래제라는 희귀한 제도를 통해 각 나라의 기업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대통령직 수행 후에는 환경운동가로 변신하고 싶다는 꿈을 피력하는 앨 고어의 지구온난화 방지 정책에 정면으로 도발하는 포럼이 백악관의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에드워드 로렌츠의 발표에 이어 미국정부에서 주장하는 지구온난화 실태 조사보고서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학자들의 연설이 줄지으면서 컨벤션 센터의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가고 시작했다.
오스틴에서 특종을 잡았던 뉴욕타임스의 앨런 킴은, 릭 페니의 기자회견과 포럼의 개최가 결국은 백악관을 향한 SHJ의 칼날이란 의구심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연방정부의 집요한 공세에도 SHJ는 어떠한 논평도 내놓고 있지 않았지만, SHJ 외곽에선 백악관을 상대로 피 튀기는 혈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섭군. 사생결단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야. 앞으로 누구도 SHJ를 건드리기 힘들겠어.’
포럼의 내용을 더는 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인지 앨런 킴은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기사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오늘은 술 한잔이 절실히 필요했다.
“저기, 서류를 떨어트린 거 같습니다. 중요한 서류 같은데 잘 좀 챙기십시오.”
“네?”
포럼장을 떠나려는 앨런 킴의 어깨를 잡은 사내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이라, 앨런 킴은 떠나는 사내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봉투를 집어들었다.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 든 앨런 킴의 눈이 커지면서 급히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딘, 앨런입니다. 지금 1면을 모두 비워 주십시오. 마감 전까지 기사를 보내겠습니다.”
‘자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헛소리 그만하고 포럼 내용이나 송부해!’
“특종이란 말입니다! 릭 페니의 기자회견은 새 발의 피라고요. 제2의 워터게이트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이란 말입니다.”
앨런 킴의 절실함을 느꼈는지 수화기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한 앨런 킴이 이빨로 자신의 입술을 물어뜯고 있을 때, 굵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앨런 킴의 귀에 흘러들어 갔다.
‘30분 줄 테니 기사부터 보내. 자네에게 1면을 주는 건, 기사를 보고 결정할 테니.’
급히 전화를 끊은 앨런 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퓰리처상을 손에 거머쥐는 상상에 빠진 앨런 킴은 짐을 모두 바닥에 던져버리고, 노트북과 서류봉투만 챙겨 급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