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2화 (18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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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 - 212

방송 뉴스에선 SHJ에 대한 세무조사가 시작되었다는 속보가 타이틀을 장식하며 미국 경제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다른 언론사와 달리 CNN에선 세무조사와 함께 FBI의 내사가 진행 중이란 소식을 전하며 내사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말로 SHJ가 심각한 곤경에 처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언론의 방향이 SHJ의 탈세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정도로 백악관의 SHJ 고사작전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세계의 시선이 IRS의 세무조사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지만, SHJ타운과 해외 지사에 속한 직원들과 가족들은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게 일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 SHJ타운 정문에 죽치고 있는 기자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귀가한 경환은 일찍 몸을 침대에 눕혔다. 속살이 훤히 비치는 나이트가운을 걸친 수정이 경환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으며 다가왔다.

“여보, 힘들죠?”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예정된 일이라, 이미 준비를 마치고 대비하고 있었어.”

수정의 머리에서 나오는 향긋한 샴푸 향이 경환의 코끝을 자극했다. 두 아이의 엄마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수정의 몸은 아직도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경환은 수정의 등허리를 손으로 훑어내렸다.

“오늘 멜린다가 전화를 줬어요. 빌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다며, 나름대로 우리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당신 혼자 싸우는 거보단 낫겠다 싶었어요.”

“빌은 질 싸움에 배팅을 걸 인물이 아니야. 우리가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는 증거니까 자기도 기운 내.”

경환의 손이 수정의 민감한 부분을 자극해서인지 수정의 얼굴이 붉어지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앨 고어의 칼춤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경환은 칼날만 피할 뿐, 아직 비수를 꺼내 들지는 않았다. 어정쩡하게 앨 고어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단칼에 앨 고어의 숨통을 끊지 못한다면 SHJ는 앨 고어의 물량공세에 서서히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수정의 몸을 훑는 경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수정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을 믿어요. 그러니 우리 때문에 양보하거나 손해를 감수하지 마세요.”

경환은 아무런 대답 없이 수정의 가슴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수정은 경환의 입술이 자신의 가슴에 편하게 닿을 수 있게 몸을 들어 올리며 경환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여보, 키스해 주세요.”

경환의 머리에 입을 맞추던 수정을 향해 경환이 머리를 들어 수정의 입술을 덮쳐갔다. 경환의 뜨거운 혀가 수정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수정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졌고 경환은 수정의 허리를 손으로 휘감아 수정이 자신의 몸 위에 쉽게 올라타도록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수정의 화려한 몸놀림에 경환은 모든 걱정을 날려보낼 수 있었다.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SHJ그룹 본사사옥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IRS의 조사단은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발표와 달리 시간을 끌고 있었지만, SHJ는 특별한 항의도 하지 않은 채, IRS의 김을 빼는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에서 모여든 SHJ의 대형 로펌은 린다의 지휘에 맞춰 때가 무르익을 때를 기다리며 IRS의 조사단을 외곽에서 압박해가고 있을 때, SHJ시큐리티의 접견실엔 카일을 비롯한 경영진들이 FBI 요원을 상대하고 있었다.

“디푸어 사장,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맙시다. 에릭 프린스가 한국 서산 SHJ타운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 알만한 사람이 누군지 좀 알려주시오. 폴 브릭스 요원.”

SHJ시큐리티와 FBI는 평행선을 달리는 열차일 수밖에 없었다. 종일 이어진 조사에도 폴 브릭스는 아무런 성과도 얻어낼 수 없었다. 빈정거리는 카일의 기분 나쁜 미소에 속이 뒤틀린 폴 브릭스는 안정을 되찾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 내쉬었다.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카일의 감정을 뒤흔들어야만 했다.

“변호사도 대동하지 않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아십니까? 품속에 있는 녹음기나 펜으로 위장한 소형카메라가 작동되리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입니다. 에릭 프린스를 먼저 거론하기 전에 스티븐 조던을 먼저 말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FBI 발표로 이미 죽은 사람이 되긴 했지만요.”

폴 브릭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FBI의 공적으로 발표된 스티븐 조던이 아직 살아있다면 조작을 감행한 FBI는 여론의 질타를 넘어 국장부터 줄줄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강도 높은 조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카일을 그제야 이해한 폴 브릭스는 가방에서 비밀유지란 직인이 찍혀있는 파일을 집어들었다.

“태국에서 찍힌 에릭 프린스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진은 태국 공항에서 찍힌 SHJ시큐리티 직원들의 모습입니다. 에릭 프린스가 사라진 날 공교롭게도 SHJ 전용기가 화물 3개를 선적해 한국으로 출발했다는 정보를 우린 가지고 있습니다. 디푸어 사장, 쉽게 갑시다.”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책상에 펼쳐진 사진을 한 손으로 넘기던 카일은 같은 종류의 파일을 폴 브릭스 앞으로 던졌다.

“자, 누가 가지고 있는 서류가 파괴력이 큰지 우리 내기 한번 해 봅시다. 참고로 서류는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겁니다. 이 서류가 외부로 유출된다면 천하의 FBI라도 쉽게 피해갈 수 없을 테니까요.”

파일을 넘기던 폴 브릭스의 손이 순간 떨리기 시작했다. NSA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정보력과 기술력을 가진 SHJ시큐리티의 능력이 파일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 이건.”

폴 브릭스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카일의 말대로 이 내용이 공개된다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FBI라 하더라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SHJ의 비밀파일은 세세하고 치밀하게 정보를 압축해 놓았다. 자신은 본 적도 없는 특급 보안서류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폴 브릭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폴 브릭스를 향해 카일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폴 브릭스 요원. 이 서류를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은 사형선고를 받은 거나 마찬가지 신세가 된 겁니다. FBI 국장의 불륜은 아주 사소한 가십거리밖엔 안 될 테고, FBI 주도로 유령의 이슬람 무장단체를 만들어 함정수사를 했다는 사실이 여파가 크려나? 아니면 석유재벌과 결탁한 해외 테러조직을 쫓던 요원의 수사를 방해해 결국 마드리드 열차 폭파사건을 방조했다는 사실이 흥미를 돋우려나?”

“서류가 조작되었다면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다는 걸 아셔야 할 겁니다. 설사 서류가 진본이라 하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폴 브릭스 요원, FBI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거 같소? 당신이 본 자료는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10%도 안 됩니다. 같이 살든지 아니면 같이 죽든지, 그건 알아서 하도록 하고, 내일 오전 스티븐 조던의 기자회견이 열릴 겁니다. FBI가 사살했다던 사람이 버젓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몹시 궁금합니다. 이 기자회견을 막으려면 당신보다 높은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겁니다. 하하하.”

폴 브릭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분명 휴스턴으로 향할 때만 해도 거대기업인 SHJ를 자신의 발아래 꿇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혀있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감춰진 발톱을 치켜세운 SHJ의 매서운 역공이 자신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폴 브릭스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 오스틴 주 정부 브리핑실에는 아침부터 몰려든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릭 페리의 중대발표란 말에 지역 언론사는 물론이고 뉴욕과 워싱턴, CNN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존 매케인이 앨 고어의 지지도를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당 색깔을 띠고 있는 릭 페리의 돌발변수를 기대하며 대선의 향방이 오리무중으로 흘러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약속된 시간을 넘기자, 환한 미소를 띤 채, 브리핑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릭 페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릭 페니의 좌우로 텍사스 주 정부 각료들이 모두 들어서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이른 시간인데도 많은 기자분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침을 먹었지만, 혹시라도 식사를 못 한 분들이 계신다면 안타깝지만, 좀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가벼운 농담을 하며 마이크를 바로 고친 릭 페니를 향해 기자들은 웃음을 던져주었다. 기자회견의 내용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 덕에 아침을 먹은 기자는 거의 없었다. 쇼맨십에 강한 릭 페니답게 분위기를 자신에게 향하게 한 후, 서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백악관에서 자행되고 있는 SHJ를 향한 표적수사에 강한 유감을 표하며, 텍사스 주 정부는 이번 연방정부의 몰상식한 행동에 어떠한 협조도 없을 것임을 선포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물을 끼얹은 듯 좌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에 휩싸였다. 기자들은 릭 페니에 뒤통수라도 맞은 듯 입만 벌린 채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민주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릭 페니가 SHJ의 문제에 개입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점도 기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대선에 개입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울 것이란 예측이 무너지며 자판을 두들기는 기자들의 손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이번 IRS의 세무조사는 개인정보를 실시간 감시하려는 연방정부에 맞서 개인정보를 보호하려는 SHJ에 대한 표적수사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현재 SHJ는 개인정보를 빼내고 감시하려는 NSA와 피 튀기는 사이버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SHJ의 능력이 NSA를 넘어서자, 연방정부는 IRS와 FBI까지 동원해 SHJ를 사지에 밀어 넣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이에 텍사스 주 정부는 연방정부의 치졸한 작태에 반대를 분명히 하며, SHJ에 대한 탄압이 중지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되기 전까지, 연방정부에 대한 협조체제를 중단할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기자회견이 특종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방증하듯 노트북의 자판 소리와 카메라 플래시 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텍사스가 연방정부와 대립을 선언했다면 공화계열의 동부지역 주들이 따라올 확률이 높았다. 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연방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갈등은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주지사님, 뉴욕타임스의 앨런 킴 기자입니다. 말씀하신 내용을 증명하실 수 있으신가요?”

릭 페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이 서류는 NSA가 SHJ구글과 SHJ퀄컴을 사찰하기 위해 작성한 비밀문서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NSA는 SHJ구글을 제외한 애플, 야후, 스카이프 등 인터넷 서비스 서버들에 대한 백도어를 소유하고 있어, 그 백도어를 통해 법원의 영장이나 허가 없이 정보를 검열하고 있습니다. 그런 중심에 백악관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지금 SHJ는 이런 연방정부에 홀로 맞서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텍사스 주 정부는 이 순간부터 SHJ의 방패막이 되어 줄 것입니다.”

소문만 무성했지 NSA의 개인정보 사찰이 문서로 증명된 건 처음이었다. 과연 릭 페니가 어떤 경로로 이런 특급 비밀문서를 손에 쥘 수 있었느냐는 것을 생각하는 기자들은 없었다. 단지, 실체를 드러낸 NSA의 불법행위에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냐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SHJ는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기업입니다. 아쉽게도 영국정부가 SHJ 본사를 유치하기 위해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연방정부의 탄압으로 SHJ 본사가 영국으로 이전한다면 그 책임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그 잘난 앨 고어도 끝났군.“

뉴욕타임스의 앨런 킴의 독백은 질문을 받지 않고 브리핑실을 벗어나는 릭 페니의 뒷모습에 묻혀 버렸다.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 브리핑실엔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남아있는 기자들로 부산했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주 정부 각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었지만, 이번 기자회견에 대해 함구령이 내렸는지 건질만한 인터뷰는 하나도 없었다.

‘띠링, 띠링’

사방에서 들려오는 메시지 도착 음에 기자들의 손동작이 빨라졌다.

“이게 도대체 뭐야? 너무 정신을 차릴 수 없잖아. MS 주도로 사이보그 컨소시엄과 야후, 애플까지 나서 이번 SHJ에 대한 표적수사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는 거야?”

한 기자의 외침에 브리핑실 안은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자들로 다시금 북적거렸다. 아직 SHJ는 칼을 감추며 숨을 고르고 있었지만, 의외의 변수들이 튀어나오며 SHJ의 방어막을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지금부턴 앨 고어가 경환의 칼춤을 막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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