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1화 (188/264)

#211

다시 사는 인생 - 211

경환의 전용기가 휴스턴에 착륙하고 있을 무렵, 앨 고어가 먼저 SHJ를 향한 칼을 빼 들었다. 대규모의 IRS 조사관들이 휴스턴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고, NSA는 SHJ시큐리티와 일진일퇴의 치열한 사이버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뚫리지 않는 SHJ는 그렇다 치더라도 중국과 인도, 유럽에서 치고 들어오는 예상외의 전력에 NSA는 공격과 수비를 병행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회장 대행 직분을 수행하고 있는 황태수의 집무실엔 주지사와 만나고 있는 린다를 제외한 어윈과 슈미트, 최석현과 경환보다 일찍 출발한 카일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앨 고어가 작정한 모양입니다. IRS의 세무조사는 예상된 일이라 큰 문제는 없지만, FBI까지 움직였을 줄은 몰랐어요. 에릭 프린스를 우리가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최석현의 질문에 황태수는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자신도 어제 경환과의 통화로 처음 그런 사실을 인지했을 정도로 에릭 프린스 문제는 SHJ시큐리티의 극비 작전이었다. 곤혹스러운 황태수의 표정을 읽은 카일이 급히 나설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 생각이셨습니다. 너무 위험한 작전이라 여러분들이 피해를 보시는 걸 극도로 경계하셨습니다. FBI가 나섰다곤 하지만, 앨 고어도 이 문제에선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신의 목줄도 걸려있기 때문에 앨 고어 자신도 우리를 압박하는 수준에서 그칠 것입니다.”

“이 문제는 디푸어 사장을 믿고 맡깁시다. 문제는 전방위로 압박해 들어오는 백악관의 공세를 우리가 만든 판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NSA와의 사이버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NSA 내부 전력은 이미 파악해 놓은 상태입니다. 너무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선에서 조절하고 있고, 현재는 방어전을 넘어 서서히 공세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NSA도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황태수는 자신감 있는 카일의 답변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NSA 국장이 경환의 사람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과 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보호를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경환의 말을 떠올린 카일은 이 정도로 보고를 마쳤다. 휴스턴 SHJ타운은 전쟁 전야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전쟁의 패배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좋습니다. 회장님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심혈을 기울인 만큼, SHJ시큐리티는 최선을 다해 주세요. 데이비드 존스턴에 의해 IRS의 공세는 어느 정도 파악을 할 수 있었으니, IRS의 세무조사는 우리의 역공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SHJ퀄컴과 SHJ구글은 역공에 한 손 거들기 바랍니다.”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입니다. 백악관의 표적수사를 블로거들이 알 수 있도록 비밀리에 정보를 풀고 있습니다. 앨 고어는 SNS의 위력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회계의 투명성을 강조한 경환 덕분에 SHJ는 IRS의 세무조사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러나 앨 고어가 노리는 것은 범법 사실을 밝히는 게 아닌, SHJ가 세무조사를 받는다는 사실 하나로 SHJ를 파렴치한 기업으로 몰아 여론의 뭇매를 맞게 한다는 것이었다. 혐의없음으로 결론 나더라도 SHJ는 기업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슈미트 사장은 준비가 마쳤다면 바로 실행하세요. IRS의 세무조사는 성실히 받아들이되 그 실상은 까발려야 합니다. 그리고 디푸어 사장은 NSA와 FBI를 맡아 공세를 펼치세요. SHJ가 봉이 아니란 사실을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습니다. 최 사장은 그동안 관리해온 상원 재무위원들과 접촉을 해서 IRS를 뒤에서 압박하도록 하세요. 그동안 뿌린 기부금을 거둬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짝, 짝, 짝.’

뒤에서 들리는 박수소리에 황태수를 비롯한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의 눈이 돌아갔다. 그 자리엔 전용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온 경환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제가 너무 일찍 왔나 봅니다. 이렇게 부회장님이 SHJ를 잘 이끄시는데 좀 더 놀다 올 걸 그랬습니다.”

“회, 회장님!”

경환의 농담에 황태수는 발끈했다. 경환은 손사래를 치며 붉으락푸르락 엉덩이를 들썩이는 황태수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농담입니다. 그러나 부회장님의 지시는 적절하다고 봅니다. 모두 그동안 준비해온 역량을 한 번에 보여주십시오. 앨 고어는 준비된 우리를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아울러 SHJ시큐리티는 언론에 흥미로운 기삿감을 던져 주시고, 존 매케인과 공화당에도 같은 수준의 정보를 제공하시기 바랍니다. SHJ가 죽든 앨 고어가 죽든 둘 중 하나는 사라지게 될 겁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경환의 서늘한 눈빛에 집무실에 모인 사람들은 오한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도 경환은 자신감을 보이고 있었고, 그런 경환의 생각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었다.

텍사스 주 정부가 위치한 오스틴을 찾은 린다는 부시의 뒤를 이어 주지사에 당선된 릭 페리와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다. 50대 중반의 릭 페리는 잘 생긴 외모로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바꾼 특이한 정치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대선을 준비했던 릭 페리는 초반 열세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에 경선을 사퇴하고 존 매케인을 지지하고 차기를 노리고 있었다.

“이번 IRS의 세무조사가 의심쩍은 것은 사실이지만, 백악관의 표적수사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주지사님은 아직 SHJ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으신가 보네요. 전 주지사님의 후광을 업고 있다는 이미지를 가진 상태에서 앨 고어와 경쟁을 펼쳤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대선주자가 아니라는 말로 도발하는 린다를 릭 페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선을 준비하며 SHJ에 손을 내민 건 자신이 먼저였지만, SHJ는 정치적 중립을 내세워 릭 페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와중에 앨 고어의 표적수사에 한편으론 고소하다는 생각이 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사정할 줄 알았던 린다가 오히려 자신의 무능함을 지적하자 릭 페리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졌다.

“주지사님, 주 정부의 도움이 없어도 SHJ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 뭐하러 오스틴에 온 겁니까? 도움이 필요 없다면 스스로 헤쳐나가면 될 거 아닙니까?”

린다는 미소를 거둬들였다. 다리를 꼬고 앉은 린다의 늘씬한 다리가 릭 페리의 시선에 들어오기 무섭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릭 페리의 귀를 때렸다.

“주 정부의 의견과 주지사님의 의견이 다른 거 같군요. 주지사님이 SHJ를 버렸다는 사실을 휴스턴 시 정부나 주 정부의 각료들이 알게 된다면 과연 차기 대선이 아닌 차기 주지사 선거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주지사 선거가 아마 내년이지요? 전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허치슨 상원 의원과 약속이 되어 있어 위싱턴D.C.로 가 봐야 하거든요.”

릭 페리의 인상이 구겨졌다. 허치슨은 텍사스 주지사를 놓고 당내 경쟁을 펼치고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SHJ가 이 난관을 이겨내고 허치슨을 밀게 된다면 린다의 말대로 주지사 자리도 위태할 수밖에 없었다. 위기의 상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린다를 보며 릭 페리는 SHJ의 비수가 앨 고어를 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치마를 정리하는 린다를 릭 페리는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앉아 보세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닙니다. 주지사님. 한 마디 더 드리자면 영국정부에서 SHJ 본사를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걸 혹시 아십니까? 법인세는 물론이고 해외 매출에 대한 세금을 일절 징수하지 않겠다는 조건이라 쉽게 거절하지 못하겠더군요. 제임스 회장님이 거절하고 있지만, 이런 핍박이 지속된다면 우리도 큰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만약 SHJ 본사가 영국으로 이탈하게 된다면, 백악관은 물론이고 주시자님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거예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영국은 개인소득세가 엄청난 나라란 사실을 혹시 간과한 겁니까?”

“글쎄요. SHJ타운이 영국에 건설되고 SHJ 본사가 이전된다면 국민적 합의를 거쳐서라도 개인소득세 감면과 함께 SHJ타운에 대한 자치권을 인정하겠다고 설득을 하더군요. 아! 그리고 혹시라도 휴스턴 SHJ타운이 아까워 우리가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잊어버리는 게 좋으실 거예요.”

린다의 말은 사실이었다. SHJ타운이 유럽에 조성된다는 소문에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건 영국이었다. 많은 혜택과 함께 자치권까지 부여하는 조건으로 영국정부는 SHJ타운이 아닌 SHJ 본사를 이전시키기 위해 물밑접촉을 시도하는 중이었다. 릭 페니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SHJ를 자신의 과오로 잃게 된다면 자신의 정치적 생명도 여기에서 막을 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문을 열고 밖을 향하던 린다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가 급히 사라졌다. 정치적 야심이 많은 릭 페리를 자극한 방법이 주요했다고 판단한 린다는 서서히 몸을 돌려 릭 페니를 바라보았다. 허치슨 상원 의원을 통해 분위기를 조성할 수도 있었지만, 현 주지사는 릭 페니였다. 애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릭 페니를 향해 린다는 도도하게 하이힐을 움직여갔다.

경환과의 만남이 실패로 끝나자 앨 고어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신의 백악관 입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제공한 세력이 SHJ였단 사실에 앨 고어는 경악을 넘어 두려움마저 들었다. SHJ에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몰아붙여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린다는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SHJ의 능력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재선은 물 건너간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대선 행보에 앞서 SHJ를 치워야만 했다.

“다니엘, 도대체 어거스트는 뭐 하고 있는 건가? 막대한 예산을 받아 쓰면서도, 그깟 SHJ 하나 상대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야!”

“기븐스 국장은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중국과의 사이버전에서 알 수 있듯이 SHJ시큐리티의 능력은 NSA와 동급 아니 그 이상입니다. 지금은 위성까지 확보한 상태다 보니 NSA도 쉽게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얼굴엔 그늘이 깊게 져 있었다. SHJ와의 약속을 지켰다면 지금의 이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선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다니엘을 짓누르고 있었다. 지지도를 끌어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진 한국방문과 경환과의 만남은 SHJ의 싸늘함에 오히려 지지도 하락을 부추겼다. 지금이라도 경환과의 화해를 종용하고 싶었지만, 지지도 하락을 SHJ의 음모라고 단정 지어 폭주하는 앨 고어를 막을 힘이 없었다.

“IRS의 세무조사를 언론에 흘리는 일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이미 대규모의 조사단이 휴스턴으로 출발하면서, 냄새를 맡은 기자들에 정보를 넘겼습니다. 돈 알렉산더는 철저한 우리 사람입니다. 믿으셔도 좋을 겁니다. 그렇지만, SHJ가 너무 조용한 게 불안합니다.”

“연방정부가 나서는 일이야. 아무리 SHJ시큐리티가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해도 정부를 상대하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것을 제임스도 알고 있다는 거겠지.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려야 해. EPA(환경 보호국)를 움직여 엘리시움과 컴페니언의 판매에 제동을 걸어야겠어.”

다니엘은 깊게 한숨을 들이마셨다. NSA와 FBI, IRS까지 움직인 상태에서도 SHJ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있거나 혹은 겁을 먹거나 둘 중 하나였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SHJ라면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포커에선 패를 읽힌 상태에서 돈을 딸 수가 없듯이, SHJ가 가진 패를 전혀 모른 상황에서 성급하게 패를 까발린 건 패착일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EPA 국장은 앨 고어의 사람이 아니었다.

“EPA를 잘못 움직였다간 오히려 SHJ에 면죄부를 줄 확률이 높습니다. 지금은 여론을 조성하면서 세무조사를 최대한 길게 끄는 동시에 FBI 수사에 힘을 실어 주는 게 현명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가장 현명한 방법은 SHJ와 다시 손을 잡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SHJ라면 경기를 일으키는 앨 고어의 반응이 눈앞에 그려진 다니엘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러나 앨 고어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외의 반응에 감았던 눈을 뜬 다니엘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앨 고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다니엘, 녹음되지 않는 위성전화를 가져다주게. 자네의 말을 들어보니 제임스에게 마지막 자비는 베풀어 줄 필요가 있겠어.”

모든 게 틀어졌다는 생각에 다니엘은 품속에서 위성전화를 꺼내 단축번호를 누른 후, 앨 고어에게 건넸다. 의기양양하게 위성전화를 받아 든 앨 고어는 신호음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대통령님, 주신 선물은 잘 받고 있습니다. 위성전화를 이용하시는 걸 보니 녹음에 신경이 쓰이시나 보군요.’

“제임스, 오랜만이군요. 다니엘이 제임스와 다시 손을 잡으라고 충고를 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계속 이런 상태를 이어갈까요?”

앨 고어의 한쪽 입술이 올라가고 있었다. 자신의 제안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경환의 모습이 떠오르자, 초조하던 기분이 가라앉으며 승자의 쾌감이 척추를 타고 온몸에 짜릿함을 전달하고 있었다.

‘동양속담에 공수래공수거란 말이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지요. 아웅다웅해 봤자, 제가 누울 관속엔 썩어갈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주신 선물은 이자를 쳐서 돌려 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대통령님.’

경환의 답변이 끝나기도 전에 앨 고어는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미국의 대통령을 우습게 아는 경환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대통령이 가진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라도 경환을 미국 하늘 아래에서 지워버리겠다고 다짐한 앨 고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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