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10화 (187/264)

#210

다시 사는 인생 - 210

서산에서의 휴가가 한 달을 넘어서고 미국 대선은 존 매케인의 선전에 결과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박빙의 게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그 근원에 SHJ가 넘겨준 앨 고어의 약점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차기를 노리는 여러 잠룡들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고, 그 선두엔 청계천을 성공리에 복원한 서울시장이 후발주자들의 견제를 여유롭게 따돌리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하하하, 서산은 제가 대현건설을 이끌 때 개발이 시작된 간척지입니다. SHJ와의 인연을 제 손으로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산 간척지는 이미 고인이 된 정규병 회장의 업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서울시장인 이상민은 교묘한 말솜씨로 자신의 업적으로 둔갑시키며 경환과의 친밀감에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리는 걸 이상민은 보지 못했다.

“바쁘신 와중에도 SHJ타운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계천 복원이 좋은 평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하하, 반대가 심했지요. 저는 옳다고 믿는 건 밀어붙이는 성격이거든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 회장님 역시 못지않다고 봅니다만.”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한 웃음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상민은 날카로운 눈으로 경환의 눈과 마주쳤지만, 경환은 그런 이상민의 시선을 가볍게 흘려버렸다. 노기찬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상민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경환은 이상민과의 합작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없었다. 두 사람의 자리는 동상이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민은 야당 내부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당내 위상을 확고히 했다고는 볼 수 없는 만큼, SHJ의 협력으로 돌파구를 찾을 심상이었다.

“저도 기업인으로서 시장님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과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데 시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규모의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업과 국가도 경영이란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선 경제를 아는 인물이 국가를 경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민들의 열망도 저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민의 대권을 향한 야망을 다시금 확인한 경환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있었다. 전생의 경환도 이상민의 이 말을 믿고 열렬히 그를 지지했지만, 돌아온 건 절망과 배신감이었다. 경환이 KSTAR를 SHJ로 끌고 들어온 이유도 이상민에 의해 일본과 미국에 모든 기술을 헐값에 넘긴 이유가 컸기 때문이었다. 심석우가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이상민은 확실히 누를 필요가 있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시장님은 제게 무엇을 바라는 건가요? 아시겠지만, SHJ는 정경유착을 사규로 엄정하게 단속하고 있다는 것은 아시리라 봅니다.”

“잘 압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국내 건설경기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제안인데 SHJ아시아본사에서 국내 건설사 한 곳을 인수해 주셨으면 합니다. 국내 경기를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라도 국내 건설 경기를 일으켜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SHJ에도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건설경기 하락으로 건설사의 자금압박이 최고조로 달려가고 있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중견 건설사를 인수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끄러미 이상민을 바라보던 경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청계천 복원으로 자신감을 얻으신듯합니다. 시장님은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같은 대규모 국책사업을 통해 경기를 부양시킬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이상민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경환은 당황한 이상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뉴딜정책은 실업자의 고용을 통해 소비를 증진한다는 개념이지만, 시장님이 생각하시는 국책사업은 몇몇 대기업의 배만 불려주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솔직히 요샌 사람보단 기계가 일을 다 하지 않습니까? 주신 제안은 감사하지만, SHJ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을 거 같군요.”

조용히 커피 향을 음미하고 있는 경환 앞에서 이상민은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다. 단지 건설사 인수를 제안했을 뿐이었지만, 경환은 자신이 준비하는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읽고 있었다. 이상민은 30대 후반의 경환이 자신의 속내를 읽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심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은 참아야 할 시기였다. 이상민은 얼굴에 다시 미소를 그리며 경환을 향했다.

“하하하, 역시 이 회장님은 앞을 보시는 능력이 탁월하시군요. 그러나 대기업을 위한 정책이란 말엔 동의할 수 없습니다. SHJ가 서산에 자리를 잡은 후 이 지역의 경제는 다른 지역보다 월등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SHJ를 모티브로 삼으려는 겁니다.”

“그러셨군요. 시장님의 원대한 계획에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부디 좋은 정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민과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인지 이상민과의 만남은 경환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심석우와의 거리감을 만들고, 노기찬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 이 만남은 차기를 준비하는 여야 대선주자들의 촉각을 곤두서게 할 뿐이었다. 아무런 이득을 손에 얻지 못한 이상민이었지만, 경환과의 만남을 최대한 부풀리며 포부도 당당하게 SHJ의 정문을 나섰지만, 정치적 약점으로 치부되던 부동산 불법 취득과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자금 조성의 증거서류가 자신의 정적들에 조용히 전달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정우와 희수가 눈에 밟혀서 걱정이다. 시간이 왜 이리 빨리 지나는 건지 모르겠다.”

“한 달을 넘게 같이 지냈으면 됐지, 당신은 왜 또 그러는 거야? 그렇게 보고 싶으면 미국 가서 같이 살면 되잖아.”

“말도 못 해요? 당신은 애들이 보고 싶지도 않은 거예요?”

떠나는 날을 하루 남기고 정아 내외를 제외하고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경환의 어머니는 정우와 희수를 양쪽 가슴에 품은 채, 떠나 보내는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수정은 경환을 대신해 아쉬워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다독였다.

“어머니, 겨울방학이 되면 다시 올게요. 그리고 아이들이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휴스턴으로 오셔도 되고요.”

“말이라도 고맙구나. 황정욱 소장이 정우를 서산에서 공부시키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데 그건 어렵겠지?”

경환과 수정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술연구소에 살다시피 한 정우는 황정욱뿐만 아니라 연구원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고, 황정욱은 정우를 서산에 남게 해 달라고 경환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나서 경환은 이를 거절하는데 진땀을 흘렸었다. 경환의 공략에 실패한 황정욱은 경환의 어머니에게 따로 청을 넣을 정도로 정우를 탐내고 있었다.

“미국에서 고민을 좀 해 볼게요. 아직 학교를 마치지도 못했잖아요.”

경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점점 연로해가는 부모님과 같이 있지 못한다는 게 경환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부모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 SHJ타운을 한국에 건설했지만, 휴스턴과 서산은 너무 멀었다.

“할머니, 좀만 참으세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면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어휴, 내 새끼밖에 없네. 이 할미가 희수 너 때문에 산다.”

할머니 품에 안긴 희수가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의 눈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경환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달라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흔들어 사념을 떨쳐버리려 노력하는 경환을 향해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경환아, 정아와 심 서방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사돈과도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좀 힘들구나. 사돈도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으실 텐데 말이다.”

“매제가 재단에서 독립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장인어른도 이해해 주시고요. 장모님이 많이 상심하시고 계셔, 조용히 미국으로 모실 생각이에요.”

L&K 재단과 SHJ는 연일 강도 높은 성명을 서로 발표하며 심각한 대립을 보이며, 재단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 L&K 재단은 국민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아가고 있었다. 또한, 소외계층에 대한 지원에 재단의 운영을 집중하자, 의심의 눈초리로 심석우를 바라보는 정치권과는 다르게 여론은 호의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경환은 미안한 감정에 수정의 손을 지그시 잡아 주었다. 수정은 그런 경환을 향해 미소로 신뢰와 믿음을 전달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급한 전화라 받아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가족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던 경환은 카일의 등장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간히 급한 전화가 아니라면 방해를 하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실을 벗어나 서재에 도착한 경환은 카일이 전해주는 도청이 방지된 위성전화를 받아들었다.

“기븐스 국장님, 말씀하세요.”

‘회장님께서 예상하신 일이 백악관에서 진행 중입니다. 내일부터 대대적인 표적수사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대비가 필요하실 거 같아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백악관이 심상치 않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카일의 보고로 알고 있었지만, 어거스트 기븐스의 연락으로 사실을 확인한 경환은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흘러가는 분위기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국장님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공격하십시오. 그리고 연락은 저희 쪽에서 취할 테니, 최대한 몸을 사리십시오.”

‘준비되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전 NSA 국장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경환은 서재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앨 고어와의 물러설 수 없는 치킨게임은 여러모로 SHJ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동안 SHJ시큐리티는 미국정부의 탄압과 표적수사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통해 내성을 키워왔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의 결과가 매번 SHJ에 유리한 결과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는 게 큰 문제긴 했다.

“디푸어 사장님. 이시간부로 SHJ시큐리티는 비상체제로 운영하겠습니다. 케빈은 휴스턴에 도착했습니까?”

“이미 도착을 했습니다. 신분을 철저히 위장한 만큼 케빈의 존재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중국과의 해킹전쟁을 수행한 케빈 미트닉이 휴스턴의 보안을 지휘한다는 사실을 몰라야만 했다. 경환은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들어서 아시겠지만, 앨 고어와의 치킨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둘 중 물러서는 사람이 죽게 되겠지요. 제가 도착할 때까지 부회장님이 계획대로 실행해 주십시오. 방어가 아닌 공격을 할 시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린다가 주 정부를 향하고 있습니다. 회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휴스턴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황태수의 목소리는 불안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앨 고어가 SHJ를 압박하기 위한 가정의 수는 뻔했지만, SHJ의 역공작은 앨 고어가 상상할 수 없다는 게 SHJ가 가진 가장 큰 무기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경환은 앨 고어와의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 천천히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좋은 아침입니다.”

IRS(미국 국세청)의 조사직원으로 SHJ타운에 파견 나온 데이비드 존스턴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항상 밝게 자신을 맞아주던 보안직원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데이비드는 서둘러 사무실에 들어서자, 책상에 놓여있는 봉인된 서류를 볼 수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뜯은 데이비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젠장. 이거 때문이었군. 어떤 미친놈이 이걸 계획한 거야?’

데이비드는 힘이 빠져나가는 듯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계의 투명성을 검증한다는 차원에서 SHJ는 IRS에 상주 직원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고, 운 좋게 자신이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아내와의 심각한 갈등 상황에서 가족 전체가 SHJ타운에 입주할 수 있게 된 것은 데이비드에겐 행운과 다름없었다. 일반적인 미국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SHJ타운에서의 생활은 가족과의 끈끈한 정을 다시금 이어주었고, 부부관계 역시 회복할 수 있었다. SHJ타운을 떠나기 싫어하는 아내를 둘째 치더라도 자신도 연방직원이 아닌 SHJ의 일원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데이비드는 신경질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돈, 데이비드입니다. 제가 받은 서류가 확실한 겁니까?”

‘데이비드, 너무 깊게 묻지 말게. 나도 상황의 심각성은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대규모의 조사단이 내려갈 예정이니 준비를 해 주게.’

“SHJ는 우리가 원하는 회계장부를 항상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제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명백한 표적수사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네는 내 지시만 따르면 되는 걸세. 자넬 너무 오랫동안 휴스턴에 머물게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럽군. 데이비드, 자넨 연방직원이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거야.’

IRS 청장인 돈 알렉산더는 데이비드의 다음 말을 기다려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자신이 모르는 정치적 음모가 진행 중이란 사실을 확인한 데이비드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동안 느껴온 바로는 이미 SHJ시큐리티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연방직원이란 사실에도 한참을 망설인 데이비드는 서류를 집어들고 황태수 집무실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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