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9화 (186/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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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209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부에 위치한 노르웨이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복지국가지만, 특이하게도 몇 안 되는 입헌군주 국가이기도 했다. 1차대전과 2차대전의 막대한 피해 속에서도 노르웨이는 중공업 위주의 경제정책으로 현재는 수력분야와 세계 선박의 10%를 통제하는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고, 석유와 가스, 정보처리 기술에 많은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여성으로 차세대 당수로 유력시되는 에르나 솔베르그 지역개발 장관은 급히 분데빅 총리를 찾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되찾긴 했지만, 지금 상황은 자신이 속한 보수당의 정권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하락한 지지도를 올릴 방법이 없어 보였다.

    “총리, 소식 들었습니까?”

    “무슨 소식 말입니까? 앞뒤를 다 끊어버리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분데빅은 짜증이 밀려왔다. 노동당이 사회당과 중앙당과의 적녹연정을 구성한 후로 보수당의 입지는 줄어들었고, 정권 재창출은 요원한 상태였다. 분데빅은 에르나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못 돼도 오성장군은 되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사실 확인이 필요하지만, SHJ가 유럽에 SHJ타운 건설을 검토 중이란 정보입니다. 만약 우리와 손을 잡고 노르웨이로 SHJ타운을 유치한다면 노동당의 연정은 긴 시간 동안 바닥을 기게 될 겁니다.”

    “그런 소식은 어디서 입수했습니까?”

    분데빅은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SHJ는 유럽에 큰 공을 들이고 있었고, 이미 노르웨이에도 지사를 설립해 운영 중에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페인이 SHJ의 정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까지 흘러들어 왔습니다. SHJ 노르웨이 지사장은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더군요.”

    사실 SHJ타운만 유치하게 된다면 노르웨이 경제는 호황세를 지속할 수 있겠지만, 유럽에서 노르웨이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SHJ가 유럽 경영을 선포한다면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스웨덴과 핀란드에 막혀 해상 통로만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는 우선순위에 낄 수도 없었다. 에르나의 정보에 입맛을 다지던 분데빅은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경제적 효과는 둘째 치더라도, SHJ타운의 유치는 유럽연합 국가들에게도 치열한 경쟁을 불러오게 될 겁니다. 에르나 장관이 SHJ 총수라면 노르웨이를 선택하겠습니까? 나라면 독일이나 프랑스를 선택하겠습니다.”

    분데빅의 질문에 에르나는 쉽게 답을 할 수 없었다. 질문의 의도를 자신도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HJ타운만 유치할 수 있다면 노르웨이의 경제적 효과는 물론이고 자신의 정치적 야심은 SHJ와 함께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에르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지레 겁먹고 포기하는 거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부딪혀 봐야 후회도 없을 거 아닙니까?”

    “에르나 장관은 뾰족한 수라도 있습니까?”

    “제게 유치전에 따른 전권을 주신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분데빅은 하던 일을 멈추고 에르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정치적 야심은 익히 알고 있었고, 이 유치전을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데빅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러나 가능성 없는 유치전을 공식 발표한다면 떨어진 지지도를 상승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분데빅을 망설이게 했다.

    “좋습니다. 타당한 전략이라고 인정되면 전권을 주겠습니다.”

    에르나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분데빅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도는 자신도 눈에 그릴 수 있었다. 자신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안되더라도 국민적 호감도는 끌어 올릴 호기였기 때문이었다.

    “제임스 리 회장의 그간 행동을 본다면, 정치적 논리보단 경제적 이익 논리로 접근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 노르웨이가 지리적 위치로 불리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의 이익을 보장해 준다면 답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익히 아는 얘기고, 본론으로 빨리 들어갑시다.”

    주변만 맴도는 에르나의 설명에 분데빅의 짜증이 깊어졌다. 허리를 의자에 깊숙이 파묻어 에르나의 답변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플랜트로 시작해 통신과 인터넷을 장악한 SHJ 가장 심혈을 기울이며 투자에 열을 올리는 게 우주산업과 대체에너지입니다. 우리는 폴란드와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양의 셰일가스를 보유한 국가입니다. 폴란드는 미국과 러시아의 입김이 상충하고, 프랑스는 원래 욕심이 가득한 나라니 우리가 STATOIL과 SHJ 간의 셰일가스 공동개발 합작을 제안한다면, SHJ도 관심을 보일 거로 생각합니다.”

    석유가 고갈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차세대 에너지로 떠오르는 셰일가스는 노르웨이의 국가사업으로 선정해 대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이 어마어마한 셰일가스를 가지고 있지만, 잘 나가는 SHJ도 이 높은 장벽을 넘을 수는 없었기에 에르나의 전략이 먹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분데빅의 자세를 바로 고치게 했다.

    “셰일가스의 경제적 효과는 막대합니다. 이걸 굳이 SHJ와 나눌 필요가 있습니까?”

    “SHJ타운이 조성된다면 고용창출과 IT 기술 도입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SHJ가 연구 중인 핵융합 에너지 개발에 성과를 보인다면, 셰일가스를 조금 떼주는 건 일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STATOIL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분데빅의 마음이 돌아섰다는 걸 확인한 에르나는 짜릿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정치 9단의 분데빅을 넘어 자신도 그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주먹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총리를 만나기 전에 이미 STATOIL과 협의를 했습니다. 유럽 내 SHJ타운이 건설된다면 노르웨이 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받았고요. 다행히 STATOIL은 SHJ엔지니어링과 기술 제휴를 통해 플랜트 합작을 추진하고 있어 협상 창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분데빅은 허탈했다. 여우 같은 에르나는 자신을 찾기 전, 이미 주변 정리를 끝낸 상태였다. 분데빅은 자신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는 것을 느끼며, 모든 전권을 에르나에게 위임해 줄 수밖에 없었다.

    앨 고어의 L&K 직업훈련소 방문은 한국과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 되면서 또 다른 반향을 이끌어 냈다. 국빈 방문 중인 미국 대통령이 일개 재단의 이사장과 이사를 면담했다는 사실에 보수와 진보 언론은 각기 다른 방향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었고, 청와대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심석우와 개별 면담을 요청한 앨 고어는 L&K 재단의 사업 방향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발언과 함께, 심석우가 주장한 자주국방 정책에 미국도 지지하며 한국의 해군력과 공군력 향상에 미국이 도움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청와대와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앨 고어의 발언은 중국을 자극해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불러일으키는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다는 유감 성명을 발표하게 만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일본정부는 어떠한 논평도 내놓지 않아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기자회견과 앨 고어와의 단독면담으로 심석우는 정치권의 다크호스로 등장하며 서서히 정치적 행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여야는 심석우를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물밑 접촉을 시도했지만, 심석우는 모든 제안을 거절하며 L&K 재단의 사업에 몰두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권을 쑥대밭으로 만든 앨 고어는 마지막 일정으로 SHJ타운을 방문했고, 경환은 노기찬 방문 때와 동일한 방식으로 앨 고어를 맞이하며 최소한의 예우를 지켰다. SHJ타운의 구석구석을 돌아본 두 사람은 모든 수행원을 뒤로 물린 채, 단독 면담을 위해 자리를 함께했다.

    “규모에 놀랐습니다. 기술연구소를 봤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최대의 관심사인 기술연구소를 방문하지 못한 앨 고어는 아쉬움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백악관은 기술연구소 방문을 끊임없이 요청했지만, 경환은 결코 밥줄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아직 연구 중이라 위험한 부분이 많습니다. 정리도 잘되지 않아 대통령님이 방문하시기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SHJ가 미국이고 미국이 SHJ니 기술연구소에서 나온 기술도 결국은 미국의 소유가 아니겠습니까? 좋은 결과를 보여 주세요.”

    SHJ타운 정문을 들어서면서부터 경환의 싸늘한 표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아 앨 고어를 당황하게 하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에도 고개만 끄덕일 뿐, 경환은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지만, 앨 고어는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임스와의 약속을 오늘에서라도 지키게 돼 기쁩니다. 그동안 복잡한 일들로 지연되다 보니 사실 나도 많이 불편했습니다.”

    “재임 초기에 한 약속이 재임 말에야 지켜지게 되는군요. 대선이 곧 시작되는데도 잊지 않고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앨 고어가 원하는 건 뻔했지만, 경환은 쉽게 답을 줄 생각이 없었다. 실패는 한 번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담배를 꺼내 앨 고어에 권했지만, 비흡연자인 앨 고어는 손사래를 쳤다. 경환은 앨 고어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담배를 입어 물어 불을 댕겼다. 다니엘이라도 자리에 있었다면 경환의 행동에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둘 만의 공간에서 앨 고어는 경환을 제지할 명분이 없었다.

    “텍사스 주지사가 SHJ를 또다시 압박한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더군요. 이거 주 정부가 무서워서라도 제임스를 홀대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외지인인 제임스가 텍사스를 구워삶은 비결 좀 알려 주세요. 따로 노는 주 정부들 때문에 내가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SHJ가 중앙정부에 핍박받는 모습이 텍사스 주 정부를 자극한 거라고 봅니다. 원래 텍사스는 공화당이 강세지역이기도 하고요. 제가 그 문제로 도움을 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예전과 달라진 경환의 모습에 앨 고어는 존 매케인을 떠올렸다. 지금이야 전 세계를 아우르는 미국 대통령이란 자리로 경환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지만, 재선에 실패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면, 이런 자리는 두 번 다시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앨 고어의 눈빛이 흔들리며 초조해지는 모습과는 달리 경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존 매케인과 만났다고 알고 있어요. 우리 솔직해집시다. 원하는 게 뭡니까?”

    경환은 앨 고어를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이미 여러 번의 기회를 앨 고어에게 줬지만, 그 기회를 차버린 건 자신이 아닌 앨 고어였다. 경환의 대답은 짧았다.

    “없습니다. 일개 기업인이 국가 수반인 대통령에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제임스, 내가 SHJ의 힘이 아니더라도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자리는 제임스나 SHJ에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후회는 나만 하는 게 아니라 제임스가 할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경환의 표정으로 이미 존 매케인과 밀약을 맺었다고 확신한 앨 고어는 다른 방법으로 경환을 압박하려 했지만, 그런 협박에도 경환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대통령님의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혹시 조지 부시와의 대선 경쟁을 기억하십니까? 네오콘을 등에 업은 조지 부시의 강펀치를 잘 피하시던데요.”

    “국민들의 현명한 선택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아직 재임 기간은 반년이나 남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대통령이란 자리는 일개 기업이 상대하기란 벅찰 수밖에 없었다. 연방정부의 모든 기관을 움직여 SHJ를 털어낸다면 SHJ도 쉽게 버틸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 앨 고어는 경환을 다시 극한으로 몰아세우며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태연한 경환의 모습에 앨 고어는 인상을 찡그렸다.

    “혹시 이 말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경환은 펜을 꺼내 메모지에 천천히 글자를 써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앨 고어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메모지엔 ‘밑져야 본전’이란 글자가 선명히 그려져 있었다.

    “그, 그럼 제임스였단 말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정부가 SHJ를 탄압하는 조치를 취한다면, 저도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하겠다는 뜻으로 쓴 글입니다. 어차피 제겐 어떠한 행동도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SHJ는 누가 백악관 주인이 되는지 관심 없습니다. 그러나 SHJ가 불이익을 당한다고 판단되면, SHJ란 이름이 지구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근원과 대결을 할 겁니다.”

    앨 고어와의 면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자들과의 브리핑은 서로 유익한 대화가 오갔다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한 채, 앨 고어는 급히 SHJ타운을 떠나버렸다.

    집무실에 홀로 남은 경환은 앨 고어와 다니엘과 나눈 대화를 도청한 파일을 다시 확인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경환의 곁으로 잭과 알이 다가왔다.

    “회장님, 앨 고어는 우리를 단지 이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잭은 예상되는 정부의 압박을 분석하고 대비하라는 전달을 넘기세요. 또한, 은밀히 존 매케인과 선을 대라고 하시고요. 알은 SHJ시큐리티를 통해 앨 고어의 약점을 존 매케인 캠프에 전달하라고 하십시오.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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