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8화 (185/264)
  • #208

    다시 사는 인생 - 208

    언론에선 심석우와 경환의 갈등이 사실인 양, 흥미 위주의 추측성 기사를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쏠리게 했다. 붙은 불에 기름을 붓는 식으로 SHJ의 노조가 L&K 재단을 항의 방문하고, SHJ그룹 홍보실에선 L&K 재단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이며 심석우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하자, 추측성 기사는 사실로 인지되면서 온라인을 중심으로 SHJ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L&K 재단과 심석우에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만큼 아직 한국은 정당하게 부를 취한 재벌이 존경받는 사회는 아니란 걸 방증하고 있었다.

    또한, L&K 재단은 재단 이사장인 경환의 장인까지 공개석상에서 심석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언론은 경환과 수정의 이혼을 기정사실화 하는 기사를 보도하는 추태까지 보이고 있었다. 빌 부부와 레몬 소주를 기울이고 있던 경환과 수정은 신문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제임스, 내일이면 앨 고어가 한국에 도착할 텐데, 앨 고어의 손을 잡을 생각입니까?”

    “미국 대통령이 손을 잡는다고 잡히는 자리입니까? 가뜩이나 한국 언론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괜히 부채질하지 마세요.”

    핀잔을 들은 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앨 고어와 존 매케인이 SHJ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요. 대선으로 바쁜 와중에 한국까지 오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경환은 말을 삼가며 달짝지근한 레몬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수정은 레몬 소주가 둘을 연결하게 했다며 멜린다에게 권했고 빌과 멜린다는 레몬 소주에 푹 빠져버렸다.

    “왜? 심정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빌은 내가 앨 고어와 손을 잡기를 원합니까?”

    “앨 고어는 자기 독선이 심한 사람입니다. 쓸데없이 탄소세라는 말도 안 되는 세금을 만들려고 하는 자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클린턴에 이어 12년간 해 먹었으면 바뀔 때도 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존 매케인 캠프에선 비밀리에 SHJ에 추파를 계속 던지고 있었지만, 경환은 묵묵부답으로 존 매케인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과의 약속을 이런저런 핑계로 흐지부지 만드는 앨 고어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앞으로의 8년이 SHJ에겐 중요한 시기였기에 경환의 고민은 깊을 수밖에 없었다.

    “난 중립입니다. 대통령이 누가 되건 SHJ의 앞길만 방해받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경기는 계속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고객 주택담보대출)는 점점 폭풍의 핵으로 다가오는데 걱정이 많습니다.”

    경환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폭풍으로 표현하는 빌을 유심히 바라봤다. 미국의 경기 하락에 따른 초 저금리 정책은 통화량 증가에 기여하면서, 주택거래 활성화와 가격 폭등을 가져왔다. 클린턴 정권부터 시작한 서브프라임에 대한 무분별한 대출확대는 앨 고어의 복지정책과 맞물려 가면서 소득이 없는 극빈층까지 대출이 확대되며 도를 넘기 시작했다. 금융권은 풀린 자금에 대한 안전장치로 모기지론를 채권화해 파생상품으로 금융권의 투자를 유도했지만, 이것은 깊은 늪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경환은 빌의 안목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FED(미국연방준비제도)에서 금리를 인상하고 있으니, 안정되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내심 모른 척, 빌의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FED에선 부랴부랴 금리를 올리며 부분별한 모기지론 파생상품에 대한 경계를 시작했지만, 한번 풀린 고삐를 다시 움켜쥘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기지 상품들의 이자를 증가시키며 서브프라임의 연체율을 서서히 증가시킬 뿐이었다.

    “앨 고어가 미쳤다는 겁니다. 금리를 올린다 해도 막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95%가 넘는 우량 모기지론이 5%도 안 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발목을 잡힐 겁니다. SHJ야 차입금이 없어 금리 인상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지만, 우린 상황이 다릅니다.”

    정확한 분석을 내놓는 빌에 경환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의 동물적인 경제감각은 SHJ홀딩스의 지분을 교환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4년 후에나 터질 문제를 예측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빌의 말이 사실이라면, 차기 대통령은 똥 치우기 바쁘겠네요.”

    “앨 고어나 존 매케인은 이 문제로 골치깨나 썩이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이곳 서산은 사람을 차분하게 하네요. 휴스턴도 그렇고 제임스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습니까?”

    “고용주와 피 고용주가 아닌, 가족으로 생각하면 빌도 쉽게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서해로 저무는 노을은 장관이었다. 레몬 소주로 인해 붉어진 빌의 얼굴은 노을과 어우러지며 빌을 깊은 사색에 빠트렸다. 빌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발상으로 기업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고 있는 경환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일본정부의 반발에도 앨 고어는 일본방문을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마치고, 오산 미 공군기지에 에어포스 원을 착륙시켰다. 삼엄한 경계 속에 한국 총리의 영접을 받은 앨 고어는 귀찮은 일정을 먼저 처리하기 위해 서둘러 청와대로 향했다. 앨 고어의 머리에는 복잡한 한반도 문제를 풀려는 의지보단, 경환과 존 매케인과의 밀약이 무엇인지 확인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앨 고어의 의전 차량이 청와대로 향하고 있을 무렵, 오성그룹 회장실엔 긴 외유를 끝내고 돌아온 이형우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특이하게 후계구도를 굳혀가던 이철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SHJ가 중국과 화해를 한 게 우리에겐 어떤 영향이 있다고 보십니까?”

    SHJ와의 분란을 조성한 이철승이 자숙시간을 갖는 동안, 오성전자는 김선중 체제로 운영되며 SHJ와의 관계회복에 노력했지만,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게 복원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SHJ는 10%가 넘는 오성전자 지분을 들어 경영 참여를 노골적으로 강요해 이형우를 혼란에 빠트렸다.

    “우리에게 집중된 중국의 압력에서 벗어났다는 긍정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엘리시움의 수입이 풀리면서 시장 점유율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양날의 검일 수밖에 없습니다.”

    “김 사장, 당신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까지 되도록 방치를 한 겁니까?”

    이형우의 진노에 김선중은 고개를 숙였다. 후계자인 이철승을 막을 힘이 없다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타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형우 앞에서 억울함을 나열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죄송합니다. SHJ가 중국 정부와 맞서는 동안, 이득을 취하며 관망하려 했던 것이 SHJ의 불만을 키운 거 같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형우는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철승의 독주는 자신이 방조한 부분이 컸기에 더는 김선중을 몰아세울 수는 없었다.

    “MS의 데이터센터가 한국에 투자되면서, 우리에 대한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는 건 다들 잘 알 겁니다. 여우 같은 빌 게이츠는 아직도 서산에 머물고 있다지요?”

    “모든 공식일정 없이 서산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 MS와 SHJ는 긴장감이 흐르며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성은 이 상황을 즐기며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빌 게이츠의 발 빠른 대처로 MS와 SHJ는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계기가 됐고, 뒷북 타던 오성그룹은 좋았던 관계까지 말아먹으며 SHJ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형우는 자식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런 상황을 방치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지 못한다면, 오성전자는 SHJ의 경영 참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후계구도에 심각한 잡음을 발생시킬 수도 있는 문제였다.

    “회장님, 노기찬 대통령은 재벌과의 의사소통 역할을 이경환 회장에게 주문했습니다. 핵융합로 지분까지 넘기면서요. 이런 상황을 이용한다면 SHJ와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직 SHJ에선 제안조차 들어오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회장님, 우리가 먼저 움직여 SHJ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경환 회장의 틀어진 심기를 바꿀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노기찬 대통령이 SHJ에 주문을 한 건, 결국은 정부와 각을 세우는 우리를 향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제안을 받기 전에 우리가 먼저 호응을 하자는 말이군요.”

    이형우는 김선중의 의견을 되씹으며, 노기를 풀었다. 경환과 동년배인 이철승을 경환의 파트너로 내세우려는 자신의 잘못된 계획이 심각한 위기로 다가오면서 이형우를 더욱 곤란한 지경으로 내몰았다. 이형우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김선중의 의견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은 청와대에 독대요청을 넣으세요. 그리고 청와대에 안겨 줄 선물을 최대한으로 준비하십시오. 앞으로 SHJ와 척을 지는 행동은 지위고하를 불문하고 엄벌에 처하겠습니다. 이건 내 사후에도 유지될 것이니 모두 행동에 각별히 주의하세요.”

    노기찬이 주최한 만찬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온 앨 고어는 답답하게 목을 죄던 보타이를 풀어헤쳤다. 지루한 노기찬과의 정상회담은 서로의 감정의 골만 깊게 만들어 앨 고어의 짜증은 극에 달해 있었다.

    “죽어가던 목숨이 살아난 사람치고는 노기찬이 기가 많이 살았더군. 아주 기도 안 차.”

    “SHJ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 일정을 줄였다고는 하지만, 한국보단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동맹국 아니겠습니까?”

    소련의 해체 이후, 중국이 그 배턴을 넘겨받으며 빠르게 미국의 상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태평양에 진출하려는 중국의 패권주의를 막기 위해선 강력한 해상자위대를 보유한 일본의 역할이 한국보단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미국에 있어 한국은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지만, 지상군을 투입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에서의 역할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앨 고어는 사사건건 미국의 정책에 반대의사를 보이는 노기찬이 마땅치 않았다.

    “한미일 군사협정을 반대하는 것은 일본과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해한다고 쳐도, 우리의 북핵 문제 정책에도 반대하니 눈꼴 사납더군. 만찬이고 뭐고 집어치우고 싶었어.”

    “동북아 4강의 FTA(자유무역협정)와 PTA(인민무역협정)을 통해 북핵을 해결하겠다는데, 너무 이상적인 주장이더군요. 이 의미는 전쟁을 담보로 평화를 유지하겠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노기찬도 평화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죠. 단지, 전쟁을 통한 평화 유지란 우리 원칙에 어긋날 뿐입니다.”

    목이 타는지 앨 고어는 생수병을 움켜잡았다. 자주국방을 주장하며 국방비를 증가한 노기찬은 미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군함과 신형 전투기 개발, 러시아의 초음속 대함미사일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과 대만이 태평양을 지키는 방패 역할이라면 한국은 적을 찌르는 미국의 창이 되어야만 했다.

    “다니엘, 노기찬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겠나?”

    “SHJ와의 밀약으로 힘을 얻긴 했지만, 노기찬을 통제할 수단은 많이 있습니다. 우선 작전권 환수와 FTA 협상으로 한국의 보수진영을 움직일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할까?”

    “우린 한국을 포기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작전권 환수가 노기찬에 의해 일정이 앞당겨진다는 냄새를 풍기고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면 보수진영이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L&K 직업훈련원 방문 때, 제임스와 약속한 일을 시행하면 노기찬도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결국, 대화의 종착지는 SHJ가 되고 말았다. 다국적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한 SHJ를 통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게 앨 고어의 인상을 구기게 하고 있었다. 앨 고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경환과 날을 세울 시기가 아니라 자신이 내민 손을 잡게 하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손 보는 건 재선에 승리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심석우가 제임스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

    “확실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L&K 재단과 SHJ 간의 설전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 심석우를 키우기 위한 정치쇼라고 보기엔, 그 도가 지나치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흠, 심석우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는 말이군.”

    “오히려 우리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임스의 약속을 이행하면서, 노기찬과 제임스에게 한 방을 먹일 수 있는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약속을 이행했으니, 제임스도 어찌해 볼 도리가 있겠습니까? 우린 SHJ의 자원과 소스가 존 매케인에게 흘러들어 가지 못하게만 막으면 되는 거니까요.”

    음흉한 미소가 앨 고어의 얼굴에 가득히 피어났다. 재선만 성공한다면 미국 내 존재하는 모든 정보기관을 동원해서라도 SHJ에 대한 실체를 까발려 볼 생각에 정상회담으로 불편했던 심기가 누그러지는 쾌감에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급히 생수를 입에 털어 넣은 앨 고어는 아내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하기 위해 서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