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7화 (184/264)

#207

다시 사는 인생 - 207

청와대는 SHJ타운의 방문을 정치적 이슈로 활용하며 막혔던 재벌문제와 경제 개혁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노기찬에 칼을 세우던 보수언론들은 이번만큼은 정부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건 오성그룹 다음으로 광고지분을 상당량 가지고 있는 SHJ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기찬이 경환과의 만남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이뤄가고 있을 무렵, SHJ는 핵융합로 사업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한전과 치열한 물밑 협상을 시작했다. 일부 에너지공학자들 사이에는 정부의 이번 조치를 미래를 보지 못한 졸속행정이란 비난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핵융합로라는 생소한 아이템으로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아 소수의 의견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일정을 줄이면서까지 방한일정을 늘린 앨 고어의 결정에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이 한국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자화자찬식의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가운데, L&K 재단은 심석우 본부장의 기자회견으로 분주했다.

“김 기자, 뭐 좀 아는 거 있어?”

“나라고 뾰족한 정보가 있겠어? 심석우 본부장이 정치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는 수준이겠지. 어차피 이경환 회장의 똘마니란 얘기가 있으니, SHJ가 한국 정치에 개입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겠지.”

앨 고어의 일본방문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느닷없는 심석우의 기자회견은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심석우 개인에 대한 관심이 아닌, SHJ가 한국 정치에 대해 개입을 하는 거 아니냐는 우려와 함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게 작용했다. 기자들의 웅성거림 속에 단상에 나타난 심석우는 박화수와 가벼운 귓속말을 나눈 후, 서둘러 마이크를 손으로 끌었다.

“L&K의 심석우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찾아주셔서 먼저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L&K 재단은 그동안 직업훈련원과 더불어, 미래과학과 국방기술 연구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L&K 재단의 설립목적은 부의 재분배 원칙을 근거로 우리가 잃을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과학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어진 결과는 어느 개인이나 기업이 아닌 온전히 한국의 몫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원칙은 지켜질 것이며, 아울러 L&K 재단은 소외계층이 사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재단의 지원규모를 지금의 두 배로 증액할 것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한, 이런 사회문제를 분석할 경제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장내가 웅성거렸다. 심석우의 정치참여 선언을 예상했지만, 심석우의 발표내용은 기자들의 기대감을 져버렸다. 그러나 20년 넘게 정치부 기자로 현장을 뛰어다닌 한 기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말씀하신 기업의 몫이 될 수 없다는 것은 SHJ도 포함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리고 소외계층의 사회참여를 말씀하셨는데, 이걸 심석우 본부장님의 정치 행보라고 봐도 문제가 없겠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모든 시선이 심석우로 향했고, 장내는 타닥거리는 노트북 타이핑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혹자는 L&K의 태생에 근거해 SHJ의 입김이 작용한다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L&K 재단은 SHJ그룹의 운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아울러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는 SHJ그룹도 포함이 됩니다.”

목이 타는지 심석우는 단상 위에 놓인 물컵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기자의 질문은 다시금 날카롭게 비수처럼 심석우를 향했다.

“그럼 이번 대통령의 SHJ타운 방문에서 논의된 재벌 간의 의사소통 창구를 SHJ가 맡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울러 사석이긴 하지만, 자주국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표명하셨는데 이것은 L&K 재단 일과는 무관한 거 아닙니까?”

“SHJ는 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다국적 기업입니다. 국가의 대통령이 나서서 다국적 기업의 총수에게 나라의 경제정책을 자문했다는 것에 저는 심히 유감을 표합니다. 아울러 어떠한 이득을 서로 교환했는지, 청와대는 밝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추진하는 자주국방 계획으로 이지스함과 강습상륙함 건조, 국산 전투기 개발 등의 군 현대화 작업엔 찬성합니다만, 재정적 부담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기자들의 타이핑소리는 점점 커졌다. 상상할 수 없었던 말이 심석우의 입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경환의 기부로 설립된 L&K, 거기에 혈연으로 엮어진 심석우에 대한 대다수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러나 SHJ를 넘어 경환까지 비난 대상에 포함하자, 특종을 찾은 기자들의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청와대의 국방정책에 지지를 표명한 심석우의 발언은 기자들의 관심 밖이었고, 심석우 SHJ와 결별이란 자극적인 타이틀이 기자들의 노트북 화면에 뜨고 있었다.

“자식, 아주 열변을 토하네. 정아 무서워서 갈아 치울 수도 없고.”

집무실에서 티비를 시청하던 경환은 심석우의 쇼맨십에 감탄하며 입맛을 다셨다. 잘 짜인 각본에 의해 만들어지고는 있지만, 이익만 아는 악덕 기업주가 된 자신이 썩 달가울 수는 없었다.

“박화수 이사가 회장님께 아주 섭섭했나 봅니다. 이익만 아는 기업주가 되신 걸 축하합니다. 하하하.”

“타케우치 사장은 살 좀 빼세요. 옛날 얼굴이 사라져서 알아볼 수가 없네요.”

자리를 같이하던 코이치에 괜한 심통을 부리자, 코이치는 연신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SHJ엔지니어링은 플랜트의 강자로 부상하며 중동과 아프리카, 남미의 대형플랜트 공사를 싹쓸이하고 있어 동종업계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한동안 경쟁의 칼을 세운 KBR도 이젠 그 힘을 잃고 SHJ엔지니어링의 눈치만 보며 떡고물을 찾아 헤맬 정도였다. 그 성장의 중심엔 코이치가 있었고, 경환은 플랜트 입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코이치에 넘겨주었다.

“플랜트 업계가 카르텔을 형성해 우리와의 경쟁에 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기업의 이익이 걸려있는 상황에서 페드로팍이 주도하는 카르텔의 연결고리는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KBR과 JSC가 우리에 붙었고, KENTZ도 눈치를 보는 상황입니다. 적절히 합작을 배분하면서 외곽에서 카르텔을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KBR로 시작해서 JSC, KENTZ와의 기술제휴로 SHJ는 노하우를 습득했고 지금은 보유한 기술을 흡수해 독자적인 기술로 발전시켰다. 지금은 어느 업체보다도 많은 라이선스를 확보해 기술적인 우위를 점할 정도였다. 시작은 경환의 몫이었지만, 지금은 코이치가 배턴을 이어받아 성장을 주도했다.

“SHJ의 근간은 플랜트입니다. SHJ퀄컴과 SHJ구글에 그룹의 발전방향이 맞춰져 홀대받는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근간을 잊는 사람은 아닙니다. 플랜트가 SHJ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도록 수고해 주세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SHJ는 가족 아닙니까? 동생이 잘 나간다고 해서 배 아파할 형은 없습니다. 최석현 사장에게 귀띔으로 들었습니다. SHJ엔지니어링 몫으로 전용기를 구매하셨다니,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 정도에도 고마워하는 코이치에 경환은 미안했다. 분명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을 테지만, 코이치는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고 SHJ엔지니어링을 성장시키는 데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경환이 자신이 직접 내린 커피 한 잔을 코이치에 건네고 있을 때, 잭이 급히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회장님, 휴스턴의 급한 전갈입니다. 내용을 먼저 살펴보시죠.”

잭이 전달한 서류를 살피던 경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황태수가 작성한 보고서엔 중국정부의 공식문서가 첨부되었고, 좀 더 길어지리라던 예상과 다르게 중국정부는 이번 SHJ와의 싸움을 조기에 종식하기 위해 백기를 들었다.

“모양새는 지키겠다는 소리군요. 공식논평은 없는 거로 하자는 소리를 하는 거 보니.”

“그래도 자국 검색엔진과 달리 SHJ구글은 통제하지 않겠다는 중국정부가 대단한 결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홍콩을 통해 밀수되어 들어가는 엘리시움과 가상사설망으로 접속이 가능한 우리 서비스를 막을 수 없다는 게 고민이었을 겁니다.”

경환은 표면적으론 중국에서 철수했지만, 홍콩의 밀매업자를 통해 밀수되는 엘리시움을 방치했고 VPN(가상사설망)을 개발해 무료로 배포하는 강수를 통해 중국정부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중국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된 사이보그폰을 막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고, 열악한 애플의 응용프로그램으로는 아직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중국정부는 다음 기회를 노리며 한 수 접었지만, 경환은 중국정부에 칼자루를 넘길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슈미트 사장은 이쯤에서 정리를 하자는 의견을 보내왔네요.”

“이 정도면 우리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만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경환은 중국정부의 문서 마지막에 적힌 내용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최대한 협조할 테니 중국기업 한 곳을 컨소시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과 중국 현지에서 엘리시움을 생산했으면 좋겠다는 간곡한 표현이었다.

“일 차전을 이겼다고 해서 나태해지면 안 됩니다. 홍콩을 반환받기 위해 백 년을 참아 온 민족이에요. 경각심을 잃는 순간, 우린 중국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우선은 중국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합시다. 오성전자가 나대는 꼴도 보기 싫네요.”

경환은 빠르게 지시사항을 잭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SHJ에선 중국의 무서움을 아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환은 중국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SHJ퀄컴은 계약을 유지하라 전하시고, SHJ구글의 영업을 재개하라고 하십시오. 중국산 부품 사용을 다시 승인하되 완제품 생산공장은 불허합니다. 마지막으로 규약과 제재방안은 기존 컨소시엄 업체보다 강화하는 선에서, 중국업체의 컨소시엄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해서 문서화 하십시오. 사실 문서가 필요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분은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끝을 모르고 강 대 강으로 맞선 중국과의 싸움은 중국의 백기 투항으로 막을 내렸다. 민족주의와 맞물려 군사력 확보에 나서는 중국의 행보로 인해, 미국과 일본, 중국 사이에서 햄버거의 패티 꼴로 변하게 될 한국이 경환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정우야, 뭐가 그리 재밌니?”

하루가 멀다고 기술연구소로 출근 아닌 출근을 하는 정우로 인해 황정욱은 지칠 법도 했지만,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한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정우의 완전기억능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정욱을 정우에게 빠져들게 하였다.

“책으로 보는 거보다 눈으로 보는 게 너무 좋아요. 특히 핵융합로는 정말 재밌어요.”

정우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핵융합로 연구원들과 지내며 그들과의 질문과 대화 속에서 신세계를 접한 거처럼 기뻐했다. 연구원들 또한, 어린아이와의 단답형 대답이 아닌 이론과 개념을 근거로 한 대화를 통해 정우가 어린아이란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런데 박사님, 플라스마를 밀폐시키고 다양한 플라스마를 생성하기 위해선 토로이달과 폴로이달 자기장이 필요한데, 이 장치를 위해 필요한 두 종류의 필드코일이 필요한 거까지는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만약 필드코일의 자기장과 전자이동 방향에 따라 자석전류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황정욱은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정우가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정우가 말한 내용은 핵융합로 연구팀에게도 큰 숙제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필드코일의 전류 방향을 바꿔주면 되겠지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연구원들의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하하, 만약 정우 너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겠니?”

황정욱은 정우를 대견스러워하며 농담 식으로 정우의 의견을 물었다. 답을 구했다기보다는 정우의 생각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그 한계를 보고 싶었다는 표현이 옳았다. 눈을 굴리며 한참을 생각하던 정우가 앞에 놓인 메모지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필드코일의 전류 방향의 전환이 가능하도록 커버나이프 스위치를 2개 장착해서 핵융합 반응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수동으로 전류의 흐름을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황정욱은 정우가 그린 그림을 살피기 위해 벗었던 안경을 급히 찾았다. 정우의 그림은 단순하면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었다. 기술적인 장치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생각이 잘못이었다. 황정욱은 급히 연구원들을 모아 정우가 그린 그림을 보여줬고 연구원들은 이런 간단한 방법을 놓친 자신들을 질책하면서도 정우가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었는지 황당한 표정으로 정우에게 시선을 보냈다.

“정우 너, 외계인이지? 도대체 네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아보고 싶을 정도다.”

연구원들이 정우를 잡기 위해 달려드는 시늉을 하자, 정우는 놀란 눈을 크게 뜬 채, 미셸을 급히 찾았다.

“미셸 아줌마, 나 희수와 제니퍼 데리고 수영하기로 했는데, 빨리 가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의자에서 뛰어내려 미셸에게 뛰어간 정우는 급히 연구소를 빠져나갔다. 핵융합로 연구원들은 정우가 그린 그림을 참고하며 서로 열띤 토론을 벌였고, 토카막 제작은 빨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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