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6화 (183/264)

#206

다시 사는 인생 - 206

노기찬 대통령의 방문을 맞아 SHJ는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그중 SHJ시큐리티는 카일의 지시를 받으며 대통령의 동선에 맞춰 경호와 보안을 다시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SHJ타운 정문에선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경호원의 숫자를 제한하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그리고 경호원의 무기휴대를 불가하겠다니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경호실과 합의한 내용입니다. 이곳은 SHJ가 준 자치권을 행사하는 곳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청와대를 들어갈 때 무기를 휴대할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님의 경호와 안전은 우리 SHJ시큐리티에서 책임집니다.”

“백악관 경호실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백악관 경호실도 같은 조건을 받아들였습니다.”

청와대 경호실 책임자와 SHJ시큐리티 경호팀장 간의 설전이 오가며 서로의 양보를 얻으려 했지만, 서로 쉽게 결론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악관 경호실마저 같은 조건을 받아들였다는 말에 경호실 책임자의 얼굴을 똥색으로 변했다. 정문이 시끄럽다는 보고에 급히 내려온 카일은 두 사람의 실랑이를 바라다볼 뿐, 개입을 자제하고 있었다. SHJ시큐리티의 강경함에 곤혹스러운 표정의 청와대 경호실 책임자는 할 수 없이 휴대폰을 들어 심각한 통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SHJ 방침을 수용하세요.”

“대통령님, 우리가 너무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죽이기라도 하겠습니까? 이미 합의한 내용을 뒤집은 우리에게 잘못이 있는 겁니다. MS가 중국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한국에 투자를 결정한 게 누구 덕이라고 생각합니까? 괜한 분란 일으키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이경환 회장을 만나겠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BMW시큐리티에는 노기찬이 문상국 비서실장과 SHJ타운으로 향하고 있었다. 노기찬은 창밖으로 보이는 서해로 시선을 돌렸다. 막힌 정국은 풀릴 기미가 없어 보였고, 믿었던 여당에서도 정부와 대립하는 계파로 인해 추진하는 정책마다 제동이 걸리기 일쑤였다.

“각하, 십 분 후 도착 예정입니다.”

경호실장의 보고가 회상에 잠긴 노기찬을 깨웠다. 고속도로의 끝으로 어렴풋이 SHJ타운의 초입이 눈에 들어오면서 노기찬은 벗었던 양복 상의를 걸쳐입었다.

SHJ타운 정문에는 미리 도착한 언론사 기자들로 발 디딜 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32사단 경비병력과 SHJ시큐리티 경호팀 직원들이 정문 주위를 통제하며 대통령의 차량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잭과 함께 정문에 모습을 드러낸 경환은 기자들의 끊이지 않는 질문에 반응하지 않고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렸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고 있었지만, 경환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대통령님, SHJ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보안이 까다로운 점 미리 양해를 드립니다.”

“하하하, 어디나 원칙과 법칙이 존재합니다. 여긴 한국땅이면서도 한국땅이 아니지 않습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경환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방탄 리무진에서 내리는 노기찬을 맞이했고, 노기찬은 환한 웃음으로 경환에게 악수를 청했다.

“여기서부턴 제가 모시겠습니다. 준비한 차량에 탑승하십시오.”

알이 나서기도 전에 경환은 준비한 리무진의 뒷좌석 문을 열어 노기찬의 탑승을 권했고, 경환의 파격적인 모습에 SHJ시큐리티 직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대통령을 맞이하는 자리였지만, SHJ타운에서만큼은 대통령의 권위도 경환에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경환과 함께 SHJ타운의 주택단지부터 돌아보는 노기찬은 잘 정돈된 단지에 놀라면서도 자신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타운 내 일부 주민들은 리무진 밖으로 걸어 나온 노기찬에 환호성을 보냈지만, 일부 주민들은 냉랭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보였기 때문이었다.

“허허, 저에 대한 호불호는 SHJ타운에서도 갈리는 거 같습니다.”

“SHJ는 개인의 정치적 성향까지 통제하지는 않습니다. 대통령님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하는 경환에게 노기찬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주변을 살피던 노기찬은 한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주변에 마트도 보이고, 저기 보이는 SHJ BANK는 은행인가요?”

“SHJ타운 내에만 존재하는 은행입니다. 사설 은행이 들어올 수 없기에 직원들의 금융업무를 대리해 주는 곳입니다. SHJ타운에서는 현찰이 아닌 자체 개발한 전자화폐를 사용합니다. 이건 휴스턴과 동일한 시스템으로 모든 관리는 SHJ매니지먼트에서 주관합니다.”

“대단하군요. 학교에서부터 은행까지, 규모만 작을 뿐이지 국가라고 해도 무방하네요.”

경환은 순간 미간을 살짝 좁히며, 노기찬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국가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 말이 언론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정치권의 역풍에 곤욕을 치를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경환은 답변을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주위가 많이 혼잡해졌습니다. 들어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럽시다. 내가 너무 흥분했나 봅니다.”

변호사 출신으로 언변에 능한 노기찬이 쉽게 말을 꺼냈을 리 없다는 것은 경환도 알고 있었다. 희미하게 헛웃음을 보인 경환은 시선이 집중된 외부를 빨리 벗어날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며 준비된 접견실로 향했다. 제대로 선공을 맞은 경환은 이번 만남이 쉽게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회장님은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정책에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십니까?”

접견실에 들어서자마자 노기찬은 강한 어퍼컷을 경환에게 꽂아넣었다. 노기찬을 수행하는 문상국 비서실장과 변상규 정책실장은 경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제가 경제관료도 아니고 단지 SHJ란 기업을 이끄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단지, 제가 주워들은 얘기로는 전임정부가 소비촉진을 위해 무분별하게 발급한 신용카드 문제로 경제의 발목을 잡고, 부동산 대책과 환율정책에 뒷말이 많다는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똥을 치우는 사람이 욕을 먹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GDP도 4%를 유지하고 있으니 성공도 그렇다고 실패도 아니라고 봅니다.”

“하하하, 이 회장님은 능구렁이를 삶아 드셨나 봅니다.”

호탕하게 웃는 노기찬을 향해 경환은 가벼운 미소로 대응했다. 이번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혁신도시 건설과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부동산 안정화 대책을 발표했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정부의 환율정책과 맞물리면서 막대한 현금이 토지 가용대금으로 풀리면서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손에 들어가 다른 투기시장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지역 균형발전은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정책을 실행하는 주관부서와 금융권에 대한 통제력 상실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며 노기찬의 발등을 찍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경환은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경제논리로 노기찬과 설전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정부의 정책과 관련해서는 대통령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난 말을 돌리는 성격이 아닙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SHJ와 손을 잡고 이 난국을 헤쳐가자고 하는데, 솔직하게 물어봅시다. 이 회장님은 나와 손을 잡겠습니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노기찬의 직설화법에 경환은 잠시 숨을 골랐다. 경환이 한국계라고 해도 SHJ는 엄연히 미국의 법 테두리 안에 있는 미국기업이었다. 사면초가를 SHJ를 이용해 돌파하려는 노기찬의 심정은 이해했지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SHJ는 한국에 있어 외자 기업일 뿐입니다. 정치권 특히, 한국 정치에 개입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SHJ에 득이 될 게 없다는 말이겠군요. 그럼 한국의 대통령으로 부탁 하나 합시다. 난 정부와 재벌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진행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태생적인 뿌리가 약하다 보니, 기득권 세력의 반발 속에 재벌과도 척을 지게 되더군요. 이 회장님이 나서서 재벌들과의 교량을 좀 연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강한 제안으로 경환의 반대를 이끌고 얻고 싶은 것을 뒤로 흘려 거절을 못 하게 만드는 노기찬의 화법에 경환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태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를 썼다. 노기찬의 재벌정책은 재벌, 특히 오성그룹의 반발에 부딪히며 표류하기 시작했고, 오성그룹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경환이란 사실에 주목해 이번 방문을 성사시켰다. 노기찬의 전력에 말릴 수만은 없었던 경환은 노기찬에 대한 예우는 이쯤에서 접어야만 했다.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여 SHJ가 얻는 건 무엇입니까? 제가 한국계이긴 하지만, 무턱대고 퍼주는 사람은 아니란 걸 아셔야 합니다.”

“이 회장님의 솔직한 말을 들으니 대화가 더 편해집니다. KSTAR의 실패선언과 SHJ기술연구소에서 연구 중인 핵융합로의 정부지분을 현금거래로 일부 넘기겠습니다. 이 정도면 나쁜 거래는 아니지 않습니까?”

경환은 노기찬의 의도를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가 나서 KSTAR의 실패를 선언한다면 매년 헛돈을 투자하고 있는 자금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 자금은 SHJ의 가용자금에 흠집을 낼 정도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핵융합로 사업에 대한 정부지분은 넘긴다는 말은 상황이 달랐다.

“대통령님은 이 연구가 실패한다고 보시는군요. 후대가 이 거래를 최악의 거래로 꼽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SHJ의 기술력이라면 성공할 거라 봅니다. 나는 이 회장님을 개인적으로 존경합니다. 정부의 지분이 많을수록 후임 정부는 SHJ와 충돌을 하게 될 겁니다. 나는 이 회장님을 믿고 그런 분란을 사전에 막으려는 겁니다. 그 대신 단 하나만 약속을 해줘야 합니다.”

전임 대통령으로부터 KSTAR 사업을 SHJ로 이관시키면서 정부의 지분 38%를 인정해 주었다. 10%를 오성중공업과 대현중공업 등에서 연구인력과 기술을 이전받는 대가로 지불해, SHJ의 지분은 52%였다. 지금이야 경영권 다툼이 없지만, 연구에 성공한다면 노기찬의 말대로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연구에 성공하더라도 대외 협상은 SHJ의 주도로 이뤄지겠지만, 한국 정부도 참여한다는 것과 아무런 대가 없이 기술을 타국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조건을 수용한다면, 한국 정부가 가진 지분 중 23%를 유상 양도하겠습니다.”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경환은 노기찬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말입니다. 전임 대통령의 정책 중에서 SHJ와의 거래를 성공한 거래로 보고 있습니다. 나는 단지, 양념을 좀 치려는 거지요.”

“좋은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거래가 되도록 지시를 하겠습니다. 다음 주면 앨 고어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준비는 잘 되시나요?”

경환은 화제를 돌렸다. 한국 재벌들과의 교량 역할을 해 주는 대가치고는 너무 과분하다는 걸 알고 있던 경환은 노기찬이 가장 원하는 건 앨 고어와의 회담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노기찬의 눈이 반짝 빛나며 이마에 주름이 잡히도록 환하게 웃었다.

“앨 고어 대통령의 방한이 청와대보다는 SHJ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한국 대통령으로서 자존심이 상하긴 합니다. 한미일 군사협정과 대북문제가 핵심 쟁점이 될 텐데, 내게 조언을 좀 해 줄 수 있습니까?”

“글쎄요. 전 경영을 하는 사람이지 외교나 군사, 경제에는 문외한입니다. 단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지닌 거뿐입니다. 한 말씀 드리자면, 대통령님 주위에 검증된 인재들이 포진해 있는지 돌아보시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환은 답답했지만, 최대한 말을 아꼈다. 강직하고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기찬의 개인적 인품은 인정하더라도 모든 것을 자신이 떠안고 가려는 행동에는 찬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 앨 고어의 방한은 한국정부를 위해 준비한 무대가 아니었다.

“L&K 재단이 요새 이슈로 떠오르고 있더군요. 직업훈련원과 각 대학 연구소에 지원을 넉넉히 하고 특히,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더군요. 이 회장님이 말을 아끼시는 건 심석우 씨와 관계가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처음에도 말씀드렸듯이 개인적인 정치적 성향까지 통제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L&K 재단의 운영은 저와는 상관이 없다는 걸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노기찬은 심석우와의 연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노기찬은 이 문제를 더는 거론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는 SHJ가 정부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다는 것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이미 소기의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떠들었더니 배가 고프네요. 염치불구하고 좀 얻어먹어야겠습니다. 밥 한 끼 주십시오.”

“자리를 옮기시죠. 대통령님이 좋아하시는 막걸리로 준비했습니다.”

노기찬은 서울시장과 경환의 만남이 신경 쓰였지만, 경환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경환 역시 노기찬의 의견에 동조하며 연회가 준비된 장소로 노기찬을 안내했고, 연회장에 미리 도착해 있던 빌 게이츠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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