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5화 (182/264)

#205

다시 사는 인생 - 205

SHJ시큐리티 소속의 차량이 한국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SHJ타운으로 빠르게 진입해 들어갔다. 한국정부로부터 준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는 SHJ타운은 경환의 방한이 있기 전부터 경계가 삼엄했지만, 소수 인원을 제외하고는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핵심지역의 외곽도로를 빠르게 타고 올라가던 차량은 큰 저택이 보이면서 속도를 줄여갔다. 이미 저택 앞에는 차량을 마중하기 위해 경환과 수정이 나와 있었고 멈춰선 차에서는 빌 게이츠의 식구들이 내리고 있었다.

“빌, 오랜만입니다. 바쁘신 분이 한국까진 무슨 일이에요?”

“환영인사치곤 제임스의 말에 가시가 돋아 있습니다. 하하하.”

진담 반 농담 반 식으로 건네는 말에 빌은 개의치 않고 농담으로 받아쳤다. 경환은 넉살 좋은 빌의 행동에 피식 웃어 보였다. 멜린다는 수정과 반갑게 포옹을 나누고는 처음 본 빌의 아들과 함께 저택으로 향했다.

“희수, 정우 오빠는 어디 간 거야?”

“정우 오빠 바빠. 넌 친구인 나는 보이지도 않아? 어쭈, 너 입술이 왜 빨개? 화장까지 한 거야?”

정우가 보이지 않자, 제니퍼는 실망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제니퍼의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희수가 놀리자, 제니퍼의 얼굴은 주근깨를 덮을 정도로 잘 익는 빨간 홍시가 되어 버렸다. 제니퍼가 희수와 함께 둘 만의 공간으로 사라지자, 경환은 빌과 함께 조용히 저택 주변을 거닐었다.

“MS는 정체된 느낌인데 SHJ는 볼 때마다 그 성장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서산도 휴스턴 못지않네요. 난 제임스가 무서우면서도 부럽습니다.”

“그래서 OS와 윈도폰으로 우리의 목줄이라도 잡아채려고 했습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지난번 교환했던 지분이나 다시 내놓으시죠. 값은 아주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지분은 내놓을 생각이 없습니다. 하하하.”

불편한 심기를 농담으로 표현했지만, 빌은 경환의 의도에 말려들 정도로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SHJ홀딩스의 지분은 절대 되팔지 않았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지분 문제를 건드려 다른 이득을 취할 생각이었다. 경환은 다시금 빌을 압박해 들어갔다.

“우리와의 관계가 틀어진 건 전적으로 MS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야후를 통해 MS가 SHJ구글과 경쟁구도를 만들 거란 정보가 있던데, 적대적 M&A를 통해 야후를 먹겠다는 것은 빌의 생각입니까? ”

경환은 움찔거리는 빌의 어깨를 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아직 이사회의 안건으로 오르지도 않은 MS에서도 가장 핵심인원만 아는 정보가 경환의 손에 올려진 상황을 빌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빌은 흐트러졌던 표정을 급히 수습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도대체 그런 정보는 어떻게 입수하는 겁니까? 이거 FBI에 신고라도 하든지 해야지, SHJ시큐리티 때문에 제대로 잠도 못 자겠네요.”

“빌 편한 대로 하시면 될 겁니다.”

경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양 손바닥을 뒤집어 펼쳐 보였다. 경환의 자신감 있는 행동에 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NSA도 SHJ와의 정보전을 자제하고 있는 마당에 FBI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논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포기했습니다. 서산으로 급히 날라온 이유도 사실은 SHJ와의 관계를 원위치시키기 위해섭니다. 그건 제임스도 잘 알지 않습니까?”

“MS가 테블릿 PC 출시를 망설이는 바람에 애플의 숨구멍을 막는 기회를 놓쳤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뭐, 오성전자가 발 빠르게 애플의 뒤통수를 쳤기 망정이지, 엘리시움까지 큰 영향을 받을 뻔했습니다.”

경환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걸 빌도 알고 있었다. 주주들의 자체 OS개발 압박에 굴복하며 SHJ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빌은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기분이었다. 빌을 쉴 새 없이 몰아친 경환은 이쯤 해서 빌의 숨통을 놓아줄 생각이었다. 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면 고양이에게 덤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먼 길을 달려온 사람에게 너무 심했네요. 빌의 얼굴을 보니 반가움보다는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이해하세요.”

“하하하, 이 정도는 각오했습니다. 과거는 다 잊고 미래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나름대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저택으로 들어가 확인을 같이 합시다.”

“나한테 줄 선물은 SHJ홀딩스 지분밖에 없으니, 기대해 보겠습니다.”

저택 안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연구소에서 돌아온 정우는 제니퍼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지만, 제니퍼는 정우 오빠를 외치며 정우의 꽁무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빌의 식구를 부모님께 소개한 경환은 빌의 독촉에 티비를 켰고, 티비로 보도되는 속보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의기양양한 빌의 모습을 바라보던 경환은 빌의 꼼수에 또 당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쳐댔다.

“이게 나한테 줄 선물이란 겁니까? 도대체 이게 나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는 겁니까?”

뉴스 속보는 MS의 스티브 발머와 정보통신부와의 협상 내용이 보도되고 있었다. 한국에 3조 원 규모의 MS의 데이터 센터를 건립하고, 한국 IT 기업에 기술개발 명목으로 매년 300억 원 규모를 투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은 MS의 투자로 인해 고용창출과 IT 강국의 면모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될 거란 분석이 이어지고 있었다.

“데이터 센터는 원래 중국에 건립할 예정이었어요. SHJ가 중국정부에 날을 세우고 있는데, 우리라도 나서서 SHJ의 한쪽 팔을 거들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까? 무슨 선물을 줄까, 고민 많이 했습니다. 제임스. 하하하.”

경환은 고개를 소파 뒤로 젖혔다. 빌을 뜯어 먹는 덴 성공했지만, 그 방향이 SHJ가 아닌 한국으로 향한 게 문제면 문제였다. 어차피 건립해야 할 데이터센터를 중국에서 한국으로 살짝 방향만 바꿔 명분을 획득한 빌의 약은 수에 경환은 말도 못한 채,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제니퍼가 나날이 예뻐지지 않습니까? 성인이라면 당장 정우와 결혼이라도 시킬 텐데, 아쉬워요.”

좀 전에 당했던 일에 복수라도 하듯, 연이어 빌의 잔 펀치가 들어오자, 경환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SHJ홀딩스의 지분 5%를 강탈당한 것도 억울한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정우까지 넘보는 빌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초등학생 애들한테 도대체 뭔 소립니까? 그리고 나는 부자 며느리 볼 생각 없습니다.”

“제임스, 그런 염려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난 자식에게 내 재산을 물려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교사를 붙여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게 하고 있어요. 난 결혼만큼은 본인이 사랑하는 사람과 시킬 생각입니다.”

경환은 오르는 혈압에 목을 잡고 소파에 누워버렸다. 빌의 뻔뻔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빌의 말에 멜린다까지 동조하고 나설 줄 몰랐다. 부부가 쌍으로 정우를 탐낸다는 걸 알게 된 경환은 조기교육을 통해서라도 정우에 대한 단속을 단단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정우의 손을 잡고 2층으로 향했다.

MS의 한국투자 발표는 실시간으로 중국정부에 전달되었다. SHJ구글의 컨소시엄을 와해시키기 위해 오성전자를 비롯해 외국계 모바일 업계를 압박하던 중국정부는 믿어 의심치 않았던 MS의 데이터센터가 중국이 아닌 한국으로 결정되며 SHJ를 굴복시키려는 계획은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윈즈보 총리의 집무실은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왕 부장, 정보통신부는 이런 정보를 어떻게 놓칠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 많은 돈을 가져다 쓰면서 제대로 일은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총리. MS 중국지사도 이번 결정에 당황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 독단적인 결정인 거 같습니다.”

윈즈보의 불호령에 왕츠후 정보통신부 부장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든 논의를 끝내고 MOU 체결만 남겨놓은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이뤄진 MS의 한국투자는 예상 밖의 충격이었다. IT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중국정부의 계획은 그 끝을 모르는 SHJ라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히며 좌초를 걱정해야 할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다.

피우던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비벼끈 윈즈보는 처음부터 잘못된 SHJ와의 관계를 곱씹어 생각했다. 여타 외자 기업처럼 강하게 밀어붙이면 끌려올 거로 생각했던 것 자체가 실수였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SHJ는 보란 듯이 역공세를 폈고 지금 정세는 중국정부가 유리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피해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성전자와 금성전자, 노키아는 어떻습니까? 중국에 대규모의 시설이 투자된 만큼 우리의 제안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요.”

“저, 그게 노키아는 일언지하에 우리의 제안을 거절했고, 오성전자나 금성전자는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는데, SHJ구글 눈치를 보는 거 같습니다. 위약금과 함께 컨소시엄에서 탈퇴하라며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합니다.”

“후, 제대로 되는 거 전혀 없군요.”

다시 입에 물은 담배를 한숨과 함께 내뿜는 윈즈보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외교부의 유감성명에도 SHJ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초지일관 다가설 틈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규모의 시설이라도 투자되었다면 그걸 목줄로 삼아 복종을 강요했겠지만, 여우 같은 SHJ는 부품공장 하나도 중국에 설립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입하던 중국산 부품도 대만과 베트남으로 수입처를 바꿔버렸다. 더욱이 엘리시움마저 홍콩을 통해 밀수돼 들어오면서 수입금지조치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총리, 문제는 SHJ그룹이 대규모 소송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정부는 SHJ의 소송에 발맞춰, WTO에 이 문제를 제소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다 긴축재정으로 얻은 명분을 미국에 뺏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겁니까? SHJ타운이 있는 휴스턴과 서산에 핵이라도 쏘란 말입니까!”

“SHJ 이경환 회장은 우리의 약점을 너무 잘 아는 자입니다. 중국 투자에 인색할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자와 부딪히는 것은 득보단 실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 모양새가 빠지더라도 SHJ의 요구를 수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점점 더 중국을 죄어오는 SHJ의 행보가 윈즈보는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 간의 대결이 아닌 SHJ라는 기업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승기는 중국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윈즈보는 마시던 찻잔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봐, 존 해밀턴이라고 불러야 하겠지? 당신 이름을 모르니 우선은 존 해밀턴으로 하자고.”

24시간 켜있는 밝은 불빛으로 인해 숙면이 뭔지 잊어버린 존 해밀턴은 감겼던 눈을 힘겹게 뜨며 목소리의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탈출을 꿈꿔도 봤지만, 사방에 카메라가 부착되어 빈 사각이 없었고 한 시간씩 2명의 무장인원이 교대되며 감시를 하고 있어,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카일 디푸어에 이어 제임스 리 회장님이 직접 나를 찾아오다니, 내가 유명인사가 되었나 봅니다.”

“약물에도 강한 저항을 한다고 들어서 궁금해서 직접 와봤어. 자네의 정체가 뭔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FRB를 반대한다는 자네의 말이 진심이라면 FRB의 반대세력일 테고, 역정보를 뿌린 거라면 FRB의 뒤를 미는 세력이라는 답이 떠오르더라고. 어찌 되었건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

태연한 경환의 모습에 존 해밀턴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약물에 내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속적인 약물 투입으로 존 해밀턴의 정신은 흩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손톱을 스스로 벗겨 내는 고통을 통해 흩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존 해밀턴은 느끼고 있었다.

“그 둘 중 하나라고 하면 SHJ 실력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쉽지 않겠지. SHJ란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을 테고. 그런데 말이지. 누가 되었건 방향을 잘못 잡았어. 차라리 날 암살하려 했다면 화해의 기회는 있었을 거야. 그러나 내 가족을 노렸다는 게 난 용서가 안 되거든. 그래서 난 자네에게 두 가지 선택을 강요할 생각이야. 사실을 말하고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든지, 아니면 평생을 여기서 썩든지. 잘 생각해봐.”

낮게 깔리는 차가운 경환의 목소리에 존 해밀턴의 동공이 심하게 반응했다. 삶을 포기하면서부터 삶에 대한 애착은 강하게 자신을 잡아채고 있음을 느꼈다. 삶을 애걸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강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성이 아직은 남아있었다.

“야, 제임스! 내가 이곳에서 나간다면 네 와이프의 젖가슴부터 네 앞에서 직접 도려내 주겠어. 그러니 날 그냥 깨끗이 죽이는 게 좋을 거야! 죽이라고, 어서 죽여!”

“너무 걱정하지 마. 넌 어차피 내 손에 죽어. 그때까지 잘 버텨 봐.”

몸부림치는 존 해밀턴을 뒤로하고 경환이 몸을 돌렸다. 분노를 참지 못해 깨문 입술에서 붉은 핏줄기가 경환의 목젖을 향해 흘러내렸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는 고통까지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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