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4화 (181/264)
  • #204

    다시 사는 인생 - 204

    며칠간 SHJ아시아본사의 보고와 점검으로 시간을 보낸 경환은 정우와 약속한 SHJ-JWH 기술연구소를 찾았다. 서산 SHJ타운 안에서 SHJ퀄컴 다음으로 규모가 큰 기술연구소는 경환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연구개발에 속도를 붙이고 있었지만, 아직 그렇다 할 성과는 돌출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의 손을 꼭 쥔 채, 기술연구소장인 황정욱의 안내를 받는 경환은 분야별로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내는 연구진들의 모습에 감개가 무량했다. 그러나 황정욱의 얼굴은 경환과 달리 밝지 못했다.

    “회장님, 특별한 성과를 보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입을 굳게 닫은 황정욱의 심정을 이해라도 하는 듯 경환은 노쇠한 황정욱의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는 현재의 기술연구소는 물먹는 하마일 뿐이었다.

    “소장님, SHJ그룹의 전체매출이 얼만지 아십니까? 작년 기준으로 1,800억 불에 영업이익만 해도 700억 불입니다. 올핸 2,000억 불을 가볍게 넘기게 될 겁니다. 이 중 R&D로 매년 220억 불이 지출되고 80억 불이 기술연구소의 몫입니다. 물론 실패하는 연구도 있겠지만, SHJ의 미래는 기술연구소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게 있으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십 년이든 이십 년이든 연구에만 매진해 주십시오.”

    오 년 만에 8배의 성장을 이뤘지만, 경환은 매출의 12%를 연구개발비로 할당했다. 지금의 성장을 유지하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연구개발비의 많은 부분이 기술연구소에 할당된 건 미래의 SHJ 동력원을 찾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경환은 황정욱을 위로하며 모든 연구를 직접 확인하고 연구원들을 격려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아빠, 저 핵융합로 개발하는 곳을 보고 싶어요.”

    사탕을 입에 문 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연구원들과의 대화를 듣던 정우가 경환을 올려다보며 핵융합로에 관심을 보였다. 경환은 핵융합로를 보고 싶다는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한 번도 말을 꺼낸 적 없는 핵융합로에 대해 정우가 어떻게 알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이 아무 말 없이 정우를 바라보자 황정욱이 급히 무릎을 굽히며 정우와 눈높이를 맞췄다.

    “네가 정우로구나. 핵융합로가 뭔지 아는 거니?”

    “조금요. 핵분열과 핵융합은 원자의 질량이 손실되면서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상대성 원리가 적용됐다고 알아요. 핵융합은 중수소와 삼중수소를 마이크로파로 가열해 1억 도까지 올리면 플라스마 상태가 되고 이때 질량의 차이로 에너지가 발생하는 거고요. 이런 고온의 플라스마를 가두는 장치가 핵융합로인 토카막인 거예요.”

    황정욱뿐만 아니라, 경환과 연구원들 모두 정우의 말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아이의 답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정우의 대답은 논리정연할 뿐만 아니라, 핵융합로의 개념까지 이해하고 있었다. 경환은 단지 핵융합이 미래대체에너지의 구심점이 될 거란 사실만 알았지 정우의 답변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이어지는 정우의 말에 주위의 모든 사람은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 핵융합로는 재료기술이 중요하다고 들었어요. 여기서 연구하는 고온 초전도체와 플라스마 대항면 재료기술, 증식재와 냉각제, 저방사화 재료기술을 보고 싶어요.”

    경환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세부적인 기술까지 정우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정우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연구원들도 똑같았다.

    “소, 소장님. 지금 정우가 말한 기술이 중요한 기술입니까?”

    “저도 지금 놀라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정우가 말한 기술은 핵융합로 건설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술입니다. 재료기술 개발은 현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고, 올해 말부터 건설되는 핵융합로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경환은 조용히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번쩍 안아 들었다. 정우는 영문을 몰라 초롱초롱한 눈을 껌뻑거렸다.

    “정우야. 아빤 네가 핵융합로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단다. 아빠한테 말해 줄 수 있겠니?”

    라이스 대학의 지능검사를 받을 때만 해도 또래보단 특별한 아이라고만 생각했지, 접할 수 없는 영역까지 이해하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다. 경환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흐물흐물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정우 앞에서 미소를 잃을 수는 없었다.

    “아빠가 린다 아줌마와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핵융합로를 개발한다고. 그래서 네이처지와 사이언스지를 읽어봤어요. 아빠한테 도움을 주고 싶었는데, 제가 잘못했나요?”

    “그랬구나. 아빤 정우 네가 너무 책만 읽는 게 걱정이야. 친구들과 뛰어놀고 좋아하던 그림도 다시 그렸으면 좋겠어.”

    “그림도 열심히 그려요. 근데 책 읽는 거 더 좋아요.”

    경환은 정우를 깊게 안아주었다. 수정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얻은 아들이었지만, 정우에 대한 애정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희수만큼의 특별한 애정을 쏟아주지는 못했었다. 경환은 짠한 마음에 정우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아빠, 여기 있을 동안엔 매일 연구소에 나와서 놀아도 돼요?”

    “소장님이 허락하시고, 네가 연구를 방해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반대하지 않을 거야.”

    정우는 고개를 돌려 황정욱을 바라봤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황정욱을 향해 웃음을 보인 정우가 경환의 목을 세차게 끌어안았다. 경환은 정우를 잠시 하루나에게 맡기고 황정욱과 함께 비밀스러운 장소로 사라져갔다.

    경환이 한국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MS의 로고가 선명한 전용기 한 대가 인천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에 빌과 멜린다는 지쳤지만, 유독 제니퍼만큼은 창밖으로 보이는 한국의 경치에 푹 빠져있었다. 빌 게이츠는 자신과 함께 한국을 찾은 스티브 발머와 마지막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어. 싹을 자르거나 흡수했다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거야.”

    “만약 우리가 SHJ를 죽이려고 했다면 제임스가 어떻게 나왔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도 큰 타격을 입었을 거야. 그 당시에도 SHJ는 힘든 상대였다고.”

    스티브 발머의 푸념에 빌은 웃고만 있었다. IT의 공룡 자리를 SHJ에 넘긴 이후, MS도 SHJ의 입김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매출과 영업이익을 역전당했고, 지금은 400억 불 매출로 2,000억 불에 육박하는 SHJ를 역전한다는 것은 말 자체가 되지 않았다.

    “꼬리 흔들러 이 먼 한국까지 왔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거야. 자넨 배알도 없어?”

    “이봐, 그런 자존심은 개한테나 줘 버려. 모바일OS와 윈도폰 개발로 인해 SHJ와 척을 진 건 분명 우리의 판단착오야. 실수에 대한 대가를 현금으로 갚으라는 제임스의 농담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고. 반대로 제임스가 우리의 독과점을 치고 들어온다고 가정하면 어떻겠나? 우리를 이기진 못하겠지만, 영업이익은 곤두박질칠 거고 성난 주주들에 의해 우리 목이 달아나지 않겠어?”

    스티브 발머는 답답함에 남아있던 와인을 단번에 입으로 넘겼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빌 게이츠의 말에 반박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독과점을 유지하려면 기술과 더불어 자금력이 뒷받침되어야 했지만, 기술과 자금 모두 SHJ에 밀리는 판국이었다.

    “모바일OS야 그렇다 쳐도 윈도폰 개발은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제임스가 안다는 건 과대해석하는 거 아닌가?”

    “자네가 SHJ시큐리티의 정보능력을 몰라서 하는 얘기야. 제임스는 내가 오늘 입은 팬티색깔도 아마 알고 있을 거야. 인정하긴 싫지만, 우린 지금 제임스의 손바닥 안에 있다고.”

    빌 게이츠의 말처럼 MS의 모바일OS 개발과 병행하여 개발 중인 윈도폰에 대한 정보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빌 게이츠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SHJ와 MS는 좋았던 관계를 청산하고 무한경쟁 체제로 바뀔 수도 있는 문제였다. 빌 게이츠는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의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방법으로 한국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내가 가진 SHJ홀딩스 지분 5%를 다시 팔라고 하더군. 그런데 말이지. 내가 MS의 지분은 전부 포기할 수 있어도 SHJ홀딩스의 지분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을 생각이거든.”

    “그래서 생각한 방안이 나를 한국에 데리고 오는 거였나?”

    “명분이 좋잖아? 중국에 건설하려던 데이터센터를 한국으로 돌리고, 한국정부에 생색을 좀 내는 거로 대신한다면 제임스가 좀 배가 아프겠지만, 우린 손해가 없잖아.”

    “SHJ 때문에 모양새가 빠진 중국이 우리에게 화살을 돌리며 난리 칠 생각은 하지 않는 가 보는군.”

    빌 게이츠가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는 순간, 비행기가 덜컹거리며 활주로에 착륙하는 진동이 몸에 전달됐다. 빌 게이츠는 환호성을 지르는 제니퍼에게 시선을 돌렸다. 딸을 사업에 이용했다는 자책감보다도 제니퍼가 정우의 짝으로 빨리 성장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MS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입국은 인천공항을 다시 들썩이게 했지만, 간단한 포토타임을 제외하고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는 각자의 역할을 위해 다른 방향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성전자의 이철승입니다.”

    “반갑습니다. 잭 무어라고 합니다.”

    수행원들의 통과가 허가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철승은 혼자 몸으로 잭의 집무실에 들어섰다. 경환과의 만남을 꾸준히 요청했지만, SHJ에선 이철승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격에 맞지 않는 만남을 요청하는 오성그룹을 향해, 불편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오성그룹을 긴장에 빠트릴 뿐이었다. 그나마 아시아본사 사장인 잭 무어를 만날 수 있었다는 걸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다.

    “컨소시엄에 남는다는 결정은 현명했다고 생각합니다. 컨소시엄에서 빠졌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잭은 이철승이 숨도 돌리기 전에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갔다. 잭 무어에 있어 이철승은 부모 잘 만난 애송이에 불과했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어붙이는 잭으로 인해 이철승의 얼굴은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잭 무어를 몰아세울 수단이 전혀 없는 이철승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뵌 겁니다. 오성전자는 컨소시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도 SHJ와는 동반자 관계를 유지한다는 방침엔 변함이 없습니다.”

    “그랬군요. 우리의 정보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사실 이철승 상무님과 이학승 부장이 주도했다는 정보가 있었거든요.”

    “저, 그게······.”

    사회 경험이 많지 않은 이철승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잭의 상대로는 격이 떨어졌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는 잭의 대답에 이철승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버지인 이형우의 귀에 이번 사태의 전말이 들어간 후로 이철승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자신의 영향력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SHJ와의 관계회복은 필수불가결했지만, 잭은 이철승의 머리 위에서 여유롭게 거닐 뿐이었다.

    당황하는 이철승의 표정을 읽은 잭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경환을 만났다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경환이 사막의 선인장이라면 이철승은 잘 가꿔진 온실 속 화초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 오십니다. 길게 시간을 내 드릴 수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상무님이 직접 서산에 오신 이유가 중국 때문입니까?”

    “그, 그렇습니다.”

    “불가합니다. 상무님의 제안은 우리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말도 꺼내기 전에 불가론을 펼치는 잭을 이철승은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바라만 보았다. SHJ가 중국정부와 전쟁 아닌 전쟁을 펼치는 와중에 오성전자가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보고 있었다. 중국정부가 엘리시움의 수입금지로 맞대응하자, 그 빈 공간을 오성전자의 사이보그폰이 빠르게 채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SHJ구글의 응용프로그램을 삭제 후 자체 응용프로그램으로 대체해 출시하라는 중국정부의 압력에 오성전자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래도 저희의 제안이라도 들어 보시는 게.”

    “SHJ구글이 모바일OS를 컨소시엄에 공개하면서 내민 원칙은 단 하나입니다. SHJ구글의 응용프로그램 삭제는 어떤 이유로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오성에서는 이 원칙을 무시할 생각입니까?”

    이철승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잭은 말꼬리를 잡아챘다. 경환이 막대한 개발비까지 포기하면서 OS를 오픈소스로 공개한 이유는 모바일 업체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겠다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SHJ와 중국정부와의 힘겨루기에 어부지리를 보고 있는 오성전자가 잭은 괘씸했다.

    “구동도 되지 않는 응용프로그램으로 중국 소비자의 불만이 많습니다.

    “한 말씀 더하자면, 상무님은 애당초 중국기업과 OS개발을 검토했다는 것을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린 오성전자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할 겁니다. 원칙에 위배된 사실이 적발된다면 어떤 조치가 이뤄질지는 상무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컨소시엄의 탈퇴와 소급적용된 매출액 10%에 대한 위약금이 이철승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있었던 내용이 이형우의 귀에 들어간다면, 자신의 후계구도도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철승은 심한 갈증을 느끼며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