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3화 (180/264)
  • #203

    다시 사는 인생 - 203

    인천국제공항으로 SHJ의 전용기 세대가 차례로 착륙을 시도했다. 휴가를 겸한 경환의 장기 방한에 한국의 재계와 정계는 들썩거렸다. 미국에서는 SHJ의 중요성을 고려해, 오산 미 공군기지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경환은 이런 백악관의 제안을 거절하고 인천국제공항을 선택했다. 그러나 각국의 언론이 경환의 방한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공항에 대거 기자를 파견하자, 한국정부와 알의 의견을 받아들여 VIP 통로를 이용해 빠르게 공항을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보다는 SHJ타운이 제모습을 갖춘 거 같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한 일도 아닌데요.”

    유창한 한국어로 의사를 전달하는 잭이 경환에겐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아직 발음이 어눌하긴 하지만, 정확한 문법과 표현은 경환을 놀라게 했다. 경환은 영어를 접고 한국어로 잭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한국어가 유창합니다. 잭이 귀화를 신청했다는 소리에 자다가 침대에서 굴렀다는 거 아십니까? 조안나도 잭의 의견에 동의한 겁니까?”

    “부끄럽지만, 조안나의 한국어 실력은 저보다 낫습니다. 귀화 신청을 제안한 것도 제가 아닌 조안나였습니다.”

    경환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한국인이면서도 사업을 위해 미국적으로 바꿨지만, 미국인인 잭과 조안나는 한국의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미국적을 포기한다는 게 아이러니한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론 미국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국적까지 포기하는 잭과 조안나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자신의 회귀만 아니었어도 잭은 KBR에서 승승장구할 인물이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린다를 통해 SHJ홀딩스의 지분 2%를 저에게 양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돈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제가 SHJ의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뻤습니다.”

    경환은 고개를 숙이려는 잭의 어깨를 잡았다. SHJ 내부에서도 잭의 주주참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잭의 의지를 확인한 경환은 린다와 황태수의 도움으로 잭에 대한 SHJ 내부의 반감을 불식시켰다.

    “한 번의 실수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잭은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요. 앞으로도 서산을 키우는 건 잭의 몫입니다. 전 그저 잭의 뒤를 봐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서산의 제 집무실에서 죽는 게 소원입니다. 그때까지 자르시면 안 됩니다.”

    “하하하. 오래 살기나 하십시오. 평생 부려 먹을 테니. 그건 그렇고, 손님 맞을 준비는 다 된 건가요?”

    잭과 함께 경환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하루나가 이끄는 비서실은 이미 업무준비를 마치고 경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휴스턴의 집무실과 똑같은 배치와 가구들로 인해 경환은 자신이 서산에 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물건 하나까지도 경환이 사용하던 것들로 완비되어 있었다. 잭은 경환이 커피로 목을 축이는 모습을 본 후에야 보고를 이어갔다.

    “청와대와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백악관 경호팀과 문제가 좀 있습니다. 앨 고어의 동선에 맞춰 경호라인을 점검하겠다는 이유로 서산 SHJ타운의 설계도와 각 건물의 비상출구를 실사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뭐라고요?”

    경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급히 카일을 불러들였다. 자신의 안방으로 속속들이 밝히라며 요청도 아닌 통보를 했다는 사실에 경환은 불쾌감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카일이 급히 경환을 찾기 전까지 경환은 헛웃음만 연신 터트렸다. 집무실에 들어서는 카일은 경환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회장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럽니다. 굳이 앨 고어가 서산을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를 전달하세요. 그래도 만남을 원한다면 서산이 아닌 오산 미 공군기지나 앨 고어의 방문이 예정된 용산기지에서 하자고 하십시오. 선택은 백악관에 맡기고, 장소가 정해지면 경호 점검을 위해 기지의 설계도를 요구하십시오. 아울러 SHJ시큐리티의 실사도 포함해서요.”

    카일은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 엷은 미소를 입가로 흘려보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불가하다는 통보는 전달한 상태입니다. 회장님의 의견을 다시 백악관 경호팀에 전달하겠습니다.”

    방한 후부터는 재선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할 앨 고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경환은 자못 궁금했다. 미국의 경쟁상대로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 앨 고어의 지지도는 하루가 다르게 바닥을 향하고 있어 민주당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존 매케인과 경환의 만남은 앨 고어를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경환은 앨 고어와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게 없었다.

    “회장님, 회장님의 장기 일정으로 인해 한반도 주변국들의 방문 요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 그리고 우리의 투자가 진행되고 있는 베트남과 태국, 인도 등 각국에서 회장님의 방문을 요청하고 있어 비서실 업무가 마비될 상황입니다.”

    “그건 잭이 알아서 판단하세요. 가능하면 여기서 만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방해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SHJ아시아본사에 대한 보고를 받은 경환은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일찍 몸을 돌렸다. 이번 방한에는 승연 내외도 동행해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였다. 경환은 이런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로저 밀러 실장,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유가 뭡니까? 이번 SHJ타운 방문을 어렵게 성사시킨 이유를 정말 몰라서 이런 겁니까?”

    다니엘 핑크 비서실장은 SHJ시큐리티 명의로 날라온 문서에 불같이 언성을 높였다. 백악관 경호실을 관장하는 로저 밀러는 다니엘 핑크의 호통에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경호의 기본 매뉴얼을 따른 거뿐입니다. 저는 오히려 SHJ시큐리티의 과민대응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SHJ는 오히려 오산 공군기지와 용산기지의 설계도와 실사를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SHJ의 반응이 괘씸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물러서야 할 시기란 말입니다. 대통령의 이번 방한의 목적이 SHJ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다니엘 핑크의 질책에도 로저 밀러는 물러설 수 없었다. 대통령의 경호는 비서실장이 아닌 자신의 고유업무였고 그 방문지가 어디였든 간에 사전 시찰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기 때문이었다. SHJ시큐리티의 반응이 의외였기 하지만, 그 문제는 자신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었다.

    “고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다시 SHJ시큐리티와 협상을 진행하십시오. 제임스 리의 성격으로 봤을 때, 대통령의 방문을 거절하려면 했지 SHJ타운의 문을 경호실에 열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제 말 아셨습니까?”

    한국의 청와대를 고압적인 자세로 굴복시킨 경호실이었지만, SHJ시큐리티는 그럴 바에야 오지 말라는 투로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로저 밀러도 백악관이 돌아가는 사정은 알고 있었다. 추락하는 지지도로 재선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SHJ는 재선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앨 고어의 마지막 수단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매뉴얼을 지키며 옷을 벗을 것인지 타협을 선택해 자리를 보전할지 로저 밀러는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SHJ시큐리티와 다시 협상을 진행하겠습니다. 그러나 기본을 놓칠 수는 없습니다.”

    “뭐요? 당신 옷 벗고 싶은 거야!”

    다니엘 핑크의 노기에 찬 목소리를 뒤로하고 로저 밀러는 비서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SHJ시큐리티의 삼엄한 경계를 알과 함께 살핀 경환은 서둘러 부모님이 계시는 저택으로 향했다. 승연이 미국으로 떠난 후 모처럼 모든 식구가 자리를 함께해서인지 경환의 부모님은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아빠, 나 할아버지가 내일 일하는데 데리고 가 주신다고 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아빠보다 더 높은 사람이지?”

    “그럼, 할아버지가 아빠보다 훨씬 높은 분이시지. 아빠도 할아버지 말씀을 들어야 하거든.”

    “히히, 그럴 줄 알았어. 아빠가 잘못하면 할아버지한테 일러야지.”

    할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희수가 얼굴만 내민 채, 경환의 퇴근을 반겼다. 수정의 잔소리에도 희수는 도통 할아버지 곁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수정은 배부른 동서를 대신해 준비된 음식을 살피느라 경환의 퇴근한 모습도 살피지 못하고 있었다.

    “형님, 정우의 IQ가 245란 말을 들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천재가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니, 좌우지간 부럽습니다. 형님.”

    정아와 함께 서산을 찾은 심석우가 놀란 듯 경환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질문을 퍼부었다. 경환의 아버지도 흐뭇한 표정으로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애는 애처럼 커야지. 아직 정우의 앞길은 정한 게 하나도 없으니, 너무 설레발 떨지 마라. 그나저나 박화수 이사의 말은 잘 따르고 있는 거야? 철저히 준비하라고. 괜히 너무 오버해서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거 명심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박화수 이사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고 있습니다. 무슨 모임을 그렇게 많이 주선하는지, 오늘도 언론사 인터뷰를 두건이나 했습니다.”

    겉으론 힘든 표정을 보이면서도 심석우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경환의 지시가 있었긴 하지만, 박화수가 재단이사로 임명되면서 심석우의 인지도를 높이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다. 각종 언론사 인터뷰는 물론이고, 소외당하는 계층을 직접 발로 찾아다닌 결과로 심석우란 인물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직은 심석우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경환의 매제라는 사실이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 형님, 박화수 이사는 앨 고어와의 만남을 통해 인지도를 높일 생각인 거 같은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지도가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지는 줄 알아? 전략과 계산이 없다면 그 인지도는 물거품과 같은 거야.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을 테니, 처신에 각별히 조심하면서 신경 써.”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SHJ시큐리티에서 똥 누는 시간까지 확인하는 걸 제가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감옥이 따로 없습니다. 감옥이.”

    “왜? 싫어? 싫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던지.”

    경환의 말에 심석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투정으로는 경환의 위안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안 심석우는 경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심석우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경환은 심석우를 손바닥에서 내려놓을 생각이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심석우가 자신이 원하는 목표에 다다른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대할 것을 알고 있던 경환은 심석우의 주변 인물을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가는 방법으로 심석우를 통제권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오빠, 너무 심 서방 몰아세우는 거 아니야? 나도 언니한테 제대로 시누이 노릇 한번 해 볼까?”

    “호호, 아가씨. 어머니가 제 편이란 사실 모르셨나 봐요. 하나도 안 무서운데요?”

    원군이 도착했다는 걸 알았는지, 심석우는 정아를 방패 삼아 숙였던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수정이 경환의 곁에 서며 부부 대 부부의 기 싸움이 벌어지자, 경환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 웃고 말았다.

    “자식,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인마 넌 출가외인이거든. 안 그래요, 아버지?”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난 누나 의견에 한 표를 던지겠어.”

    경환의 질문을 받은 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못하고 있었다. 경환에게 쌓인 게 많았던 승연이 정아에게 들러붙자, 경환은 싸늘한 눈빛을 승연에게 던졌다. 이 상황은 경환 어머니의 한마디로 깨끗이 정리되었다.

    “니들은 제발 철 좀 들어라. 어째 정우보다도 못하냐? 시답잖은 짓 그만하고 빨리 와서 밥이나 먹어.”

    한바탕 소란이 정리되자 모두 식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랜만에 모든 식구가 모인 자리라서 그런지 식탁 위엔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음식들로 채워져 있었다. 술이 한 잔씩 오가면서 옛날 얘기와 함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경환은 가족들의 밝은 표정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회귀 후 14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뤄낸 행복에 경환은 식구들이 알 수 없는 혼자만의 감회에 빠져들었다.

    “아빠, 내일 기술연구소에 저도 데리고 가실 수 있으세요?”

    밥을 입에 한가득 넣어 씹고 있던 정우의 말에 경환은 미소를 보이며 정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기술연구소를 구경하고 싶은 거니?”

    “네, 희수도 할아버지 사무실 구경하러 가는데, 저도 기술연구소를 구경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제니퍼가 서울로 놀러 온다는데 어떡할까요?”

    경환은 수정을 바라봤다. 제니퍼가 정우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한국에까지 온다는 건 독단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멜린다가 전화가 왔었어요. 우리만 좋다면 빌과 함께 서산에서 며칠 휴가를 보내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거든요. 온다는 사람 막을 수가 있어야죠.”

    “잘했어. 빌에게 당한 거 이번엔 좀 벗겨 먹어야겠어.”

    결국, 제니퍼를 핑계로 빌이 수를 부렸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경환은 모른 척 넘어갈 생각이었다. SHJ홀딩스 지분 5%를 강탈당한 앙갚음을 이번 기회에 앙갚음해 줄 생각에 경환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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