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1화 (178/264)
  • #201

    다시 사는 인생 - 201

    저택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올린 경환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 인상을 찌푸렸다. 정우의 재능을 확인하는 자리였지, 실험용 모르모트로 만든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거야?”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은 경환의 차가운 목소리에 거실에 모여있는 사람들의 대화가 일순간 정지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NASA 소속의 폴 허츠라고 합니다. 이 친구는 캘리포니아 공대 천체물리학 교수인 마커스 브라운 박사입니다.”

    “반갑습니다. 마커스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건네는 악수를 건성으로 받아넘긴 경환은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미국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SHJ 회장을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경환이 내뿜는 분위기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정우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저와 같이 온 심리학과 팀원들입니다. 자제분의 지능을 확인하는 게 중요할 거 같아서요. 자제분은 심리학 박사인 로버트 졸릭과 함께 있습니다.”

    “여보, 서방님이 테스트하는 자리에 같이 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SHJ시큐리티 경호팀이 삼엄한 경계를 피고 있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거란 걸 알고는 있었지만, 경환은 정우가 테스트받고 있는 2층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수정은 경환의 옆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경환의 손을 잡고는 나지막이 귓속말을 건넸다.

    “여보, 사람들이 불안해하잖아요. 정우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도와주러 온 사람들이니 분위기를 좀 풀어주세요.”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하는 수정에게 시선을 돌린 경환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존 해밀턴의 체포와 존 매케인과의 만남 등 피곤한 하루를 보내던 경환이 자신이 너무 예민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환은 자신의 앞에서 좌불안석인 폴 허츠와 마커스 브라운을 향해 궁금한 질문을 던지며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미안합니다. 복잡한 일로 인해 두 분을 불편하게 했던 거 같습니다. 제 동생은 정우를 천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두 분의 객관적인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직 로버트 졸릭 박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 정확한 말씀은 드릴 수 없지만, 제가 판단한 자제분의 능력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특히 물리학에 대한 이해력은 제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자제분이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책의 내용과 위치를 기억하는 거로 봐서, 완전기억능력(PHOTOGRAPHIC MEMORY)을 소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커스 브라운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믿지 못하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체물리학 이론과 관련해 정우와 의견을 나누던 마커스 브라운은 책의 내용과 페이지 수까지 정확히 맞추는 정우의 기억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정우를 대학으로 데리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SHJ그룹의 회장 아들이란 사실은 마커스 브라운의 입을 쉽게 열리게 하지 못했다. 마커스 브라운의 생각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던 경환은 서둘러 선을 그어 버렸다.

    “전 제 아들이 원하는 일을 하게 할 겁니다. 그 일이 제가 생각하는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회, 회장님. 교육만 뒷받침해 준다면 자제분은 제2의 니콜라 테슬라가 될 수도 있는 자질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십시오.”

    몸을 앞으로 숙이며 사정 조로 매달리는 마커스 브라운을 바라보는 경환은 냉정해 져야만 했다. 아직 9살인 정우에게 세상을 너무 빨리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정우의 재능을 썩히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경환의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정우에게 최선의 선택일지 고민하는 순간, 로버트 졸릭과 함께 승연의 손을 잡고 2층에서 내려오는 정우의 모습이 경환에 눈에 들어왔다. 경환은 소파에서 일어나 계단에서 내려오는 정우를 안아 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들었지?”

    “아니에요. 아빠. 재밌었어요. 박사님이 내준 문제도 재밌었고 대화도 즐거웠어요.”

    밝게 웃는 정우를 확인하고서야 안심이 된 경환은 정우를 크리스토퍼에게 넘기고 다시 거실로 발을 돌렸다. 거실에선 정우의 IQ 검사를 진행한 로버트 졸릭과 마커스 브라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경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사람들이 기다리는 거실로 들어섰다.

    “어떻습니까?”

    경환의 질문을 받은 마커스 브라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경환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섰다.

    “로버트 졸릭 박사의 의견으로는 자제분의 IQ는 최소 200은 넘는다고 합니다. 또한, 일반인과는 상이한 높은 기억력과 언어능력을 보이고 있어, 완전기억능력을 소지하지 않았나 유추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설이 갖춰진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자제분의 정확한 능력을 재검사할 것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제 아들은 아직 초등학교 5학년입니다. 남들보다 특출난다는 게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에 동화되지 못해 외롭고 나약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문제인 만큼, 쉽게 판단할 일은 아닌 거 같습니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경환은 학창시설 수학을 낙제할 수밖에 없었던 아인슈타인을 머리에 떠올렸다. 공식이 필요 없던 아인슈타인은 답만 적어 시험지를 제출했고 담당 교수는 공식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번 낙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천재는 일반인과 동화되지 못하고 항상 외톨이였고 주위로부터 미친 사람이라는 시선 속에서 살아가야만 했다. 경환은 그런 삶을 정우에게 줄 수는 없었다.

    “회장님의 생각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우를 이렇게 방치한다면 국가적인 낭비입니다. 한 명의 천재로 인해 세상이 바뀐다는 거 회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마커스 브라운은 집요했다. 그만큼 정우가 탐이 났다. 그러나 그 전에 경환을 설득해야 한다는 게 마커스 브라운에겐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마커스 브라운의 입이 열렸다.

    “회장님, 자제분은 일반 교육이 무의미합니다. 캘리포니아 공대를 강력히 추천하지만, 휴스턴의 라이스대학도 천체물리학에선 어느 정도 명성을 가지고 있는 대학입니다. NASA와 함께 라이스대학에서 자제분을 가르치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제 아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라이스대학이라면 저도 큰 반대는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오늘은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마커스 브라운은 착잡한 심정을 얼굴에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폴 허츠의 전화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의 흥분은 느낄 수 없었지만, 지금 마커스 브라운의 머릿속엔 정우로 인해 바뀌게 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같이 새겨넣고 싶은 생각밖엔 없었다.

    밤늦은 시간이었지만,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은 아직도 불이 꺼질 줄 몰랐다. 2004년이 새롭게 열리자마자, 한국은 초유의 사태인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야당의 치밀한 작전하에 국회를 통과했다. 여당을 지지해 달라는 대통령의 발언을 선거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구실로 문제 삼은 야당의 치졸한 대응에 국민들은 촛불시위로 대응했고, 국론은 보수와 진보로 분열하며 그 밑을 알 수 없는 진흙탕 싸움을 지속했다. 7차 변론까지 가는 지루한 싸움에서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기각을 결정하며 대통령의 직권은 복원되었지만, 이 때문에 대외신인도는 하락했고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런 대통령 탄핵엔 여당과 야당, 멀리 미국과 중국, 일본의 복잡한 수가 얽혀있었다. 그중에는 북한도 큰 몫을 담당했다.

    “대통령님, 좀 쉬시죠.”

    “괜찮습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났는데, 하룻밤 새는 거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문 실장이나 좀 쉬십시오.”

    비서실장인 문상국은 측은한 눈으로 노기찬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집권 초기부터 보수 기득권 세력에 의해 철저히 무시를 당하고 있었다. 특히 재벌 언론의 왜곡보도와 의혹 제기는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어, 원활한 국정이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재벌개혁에 필요한 여론을 조성할 수 없었고, 재벌들은 불황을 핑계로 투자와 고용을 최소화하며 대통령과의 타협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의 지지로 청와대에 입성했지만, 기득권 세력의 방해와 재벌개혁의 실패는 안정을 추구하는 중장년층을 이탈시키며 조기에 레임덕이 올 수도 있다는 위기설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문상국의 입으론 자그마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문 실장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그러나 저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아닙니다. 일본의 일정을 하루 줄이면서까지 방한에 무게를 두는 앨 고어의 꼼수에 진절머리가 납니다. 재선이 급하긴 했나 봅니다.”

    문상국은 작년 방미 때의 치욕이 머리에 떠올랐다. 대통령과 리차드 홀부르크와의 면담에서 미국 장갑차 사건으로 희생된 여중생을 거론하며 미국의 적극적인 자세를 주문했지만, 리차드 홀부르크는 서해 해전으로 희생된 해군 장병들의 이름을 기억하느냐는 질문으로 대신하며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라는 무례를 저질렀다. 그러나 장병들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던 노기찬은 그런 무례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와 달랄 땐 오지 않고 자기 필요로 일정까지 변경하는 걸 보면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죠. 이런 결례에도 감지덕지하란 투가 맘에 들지 않더군요.”

    “앨 고어의 일정을 봐도 그렇습니다. 단독회담은 일 회에 그치고, 모든 일정이 SHJ타운과 L & K 재단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결국, 이번 방한은 공화당 존 매케인과 SHJ의 틈을 벌리려는 앨 고어의 꼼수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노기찬은 하던 일을 멈추고 야식으로 준비된 두부 한 점과 함께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켰다. 미국 경제와 정계의 핵으로 부상하고 있는 SHJ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한국에서만큼은 그 영향력을 구사하지 않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히 회장인 경환이 한국계란 사실은 더욱 노기찬을 궁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 SHJ와 중국정부와의 힘겨루기는 SHJ의 승리라는 분석이 대세라고 보는데, 미국과 중국도 어쩔 수 없는 SHJ가 유독 한국에게는 조용한 정책을 추구하는 이유가 뭐라고 봅니까?”

    “조용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 경제는 SHJ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합니다. 오성전자의 주식 10%가 이미 SHJ 수중에 있습니다. 오성뿐만 아니라, 대현그룹, 대후그룹이 SHJ의 영향력 안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중요한 건 L & K 재단의 심석우 본부장이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서서히 움직이고 있다니요?”

    노기찬은 처음 듣는 소리에 마시던 막걸리를 중간에 끊고 책상 위에 사발을 올려놓았다. 노기찬에게 있어서도 SHJ는 넘기기 힘든 고목과 같은 존재였다. 전임 정권들과는 막후에서 거래했던 SHJ가 유독 이번 정권과는 어떠한 거래나 접촉조차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을 가진 SHJ가 한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그 여파는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었다. 노기찬은 문상국의 답변을 재촉했다.

    “이경환 회장의 매제인 심석우 본부장은 지난 서해 해전으로 얻은 국민적 지지를 자신의 정치적 야심에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앨 고어가 L & K 재단을 방문해서 단독 면담이라도 성사된다면, 쓰고 있던 양의 탈을 벗게 될 겁니다.”

    “허,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시작으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지금 심석우의 등장이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 게 될까 걱정입니다.”

    노기찬은 한미일군사협정에 강한 반발을 보이며 일본의 한반도 개입을 철저히 막는 한편, 투자를 통해 북한을 개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노기찬의 이런 노력에도 북한은 노기찬의 이상향에 쉽게 손을 내밀지 않고 있었다.

    “그게 좀 묘합니다. 심석우 본부장은 분명 자주국방을 통해 주변국의 입김에서 벗어나자고 주장하며, 야당과는 일정 부분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과 중국의 군사 대국화에 우리가 살길은 그에 상응하는 국방력을 키우는 거밖에는 없다는 말로 젊은 층의 호응을 이끌고 있습니다.”

    “허, 그 친구 갈피를 못 잡게 하는군요. 그 친구 뒤에 이경환 회장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나요?”

    “재단의 일에 SHJ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박화수 사장이 SHJ를 나와 재단에 합류한 것을 보면 이경환 회장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기찬은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주먹으로 지그시 눌렀다. 일본을 등에 업은 미국은 작계 5029를 통해 한미일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의 한반도 개입을 사실상 인정하고 있었고, 중국은 경제력을 근거로 군사 대국화의 길로 들어선지 오래였다. 국내정치 이상으로 꽉 막힌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노기찬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대통령님, SHJ와 손을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SHJ와 손을 잡다뇨?”

    “현 상황에서 앨 고어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이경환 회장밖에는 없습니다. 심석우는 아직 자라나는 새싹이라 차기는 힘들고 차차기를 노리게 될 겁니다. 한국의 재벌을 통제하고 미국의 양보를 얻어 내기 위해선 이경환 회장이 적격입니다.”

    “흠, 늑대를 쫓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들이자는 소리군요.”

    노기찬은 빈 사발에 막걸리를 부었다. 야식으로 나온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막걸리를 입에 부었고, 꿀꺽거리는 목젖을 타고 막걸리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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