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200화 (177/264)
  • #200

    다시 사는 인생 - 200

    “총리는 일이 이 지경까지 될 때까지 도대체 무얼 한 겁니까!”

    중남해 주석실에 호출되어 들어온 윈즈보 총리는 주석인 후콴더의 불같은 노여움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시간을 벌고 경환의 방중을 성사시키기 위해 파견한 왕즈핑 대사의 파견이 오히려 패착이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왕즈핑 대사가 고압적인 자세로 경환을 상대하다 SHJ타운에서 굴욕을 맛보며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워싱턴D.C의 외교가에 퍼지면서 제대로 망신을 당하는 중이었지만, 오만한 중국대사를 옹호하는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이 당한 망신이 아니었다.

    “본국의 훈령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왕즈핑 대사의 독단적인 행동이 이경환 회장의 반발을 산 거 같습니다.”

    “중국통인 이경환 회장의 반발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단 말입니까? 총리는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윈즈보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SHJ는 자신의 예상을 깨고 이미 언론을 통해 중국에 대한 모든 사업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했고, 그 발표를 뒷받침하듯 철수를 암시하며 후속조치를 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다. 더욱이 모종의 중대발표를 준비 중이라는 뉘앙스를 언론에 흘리고 있어 중국정부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즈핑 대사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문책성 소환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검토가 아니라 그 돌대가리 놈은 바로 경질시키세요. 문제는 SHJ가 왕즈핑에게 거론한 비자금 문제를 터트리겠느냐는 겁니다.”

    “이경환 회장의 성격으로 본다면 터트릴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죄송합니다. 주석.”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윈즈보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철수를 단순하게 엄포로만 생각했던 게 자신의 큰 오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SHJ는 SHJ구글의 컨소시엄을 유럽과 동남아시아로 확대하며 중국을 사방에서 포위하기 시작했다. IT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상태에서 SHJ가 중국에서 빠져나간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고생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더욱이 SHJ시큐리티의 정보력을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비자금에 대한 문제가 터진다면 지금 정권은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윈즈보는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왕즈핑을 씹어먹고 싶었다.

    “비자금도 문제긴 하지만, SHJ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만과 베트남, 태국, 인도까지 투자를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루 만에 했습니다. 느끼는 거 없습니까. 총리.”

    윈즈보의 입술을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국가도 아닌 일개 기업이 인접국들과의 협력으로 중국을 에워싼다는 게 맘에 들지 않았지만, 폭주하는 SHJ를 통제할 수단은 전혀 없다는 게 윈즈보의 발목을 잡았다.

    “주석의 걱정을 이해합니다만, SHJ를 통제하기 위해선 우리가 머리를 숙여야 할 거 같습니다.”

    “뭐요! 한국과 일본을 깔아뭉개고 미국을 상대하는 우리가, 한낱 기업인에게 고개를 숙이자니. 총리 당신 제정신으로 하는 말입니까!”

    “주석, 현재로선 폭주하는 SHJ를 제어할 방법이 없습니다. SHJ는 중국시장을 포기해도 아쉬울 게 전혀 없는 구조라는 게 큰 문제입니다. 총영사를 보내 사과를 함과 동시에, 왕즈핑의 독단적인 행동을 외교부를 통해 유감성명을 발표하는 선에서 마무리해서 SHJ를 붙잡아 두는 게 상수라고 생각합니다. 아직은 SHJ의 기술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후콴더는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감아버렸다. 작년의 사이버 공격부터 SHJ의 철수까지 너무나 완벽한 시나리오에 중국에 갇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이 모든 건 SHJ가 아닌 중국이 먼저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진행하세요. 총영사를 대사대리로 임명해 파견하고 허튼짓을 못 하게 철저히 교육하세요. 그리고 비자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총리.”

    “알겠습니다. 실수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윈즈보가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후콴더는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며 재떨이를 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저택으로 동생 부부를 부른 경환은 임신으로 배가 부른 김혜리의 뒤편에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승연을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바라보았다. 구글라인을 구글스토어에 필적할 정도로 성공으로 이끈 승연은 SHJ구글의 핵심인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지만, 경환에겐 아직은 고양이 앞의 쥐 신세일 수밖에 없었다.

    “동서, 몸도 안 좋은데 너무 일에만 몰두하는 건 태아에게 좋지 않아.”

    “괜찮아요. 형님. 몸이 더 무거워지면 쉴 생각이에요. 그나저나 정우가 너무 대단하지 않아요? 태어날 아기도 정우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이 요샌 가슴에 팍팍 꽂히고 있네요.”

    수정이 김혜리의 손을 이끌며 거실로 향하자, 어정쩡한 승연이가 뒤를 따라 나섰다.

    “얘기 들었다. 캘리포니아 공대의 마커스 교수가 정우 문제로 상의하자고 하는데, 승연이 너 생각이 어떤지 듣고 싶어 부른 거야.”

    “형이 그때 분위기를 몰라서 그런데, 어떻게 천재를 자식으로 두고 있으면서 그 재능을 몰라볼 수 있어? 그건 부모로서 심각한 직무유기라고 봐, 나는.”

    뜬금없이 NASA의 폴 허츠 박사와 캘리포니아 공대의 연락을 받은 경환은 자초지종을 승연을 통해 들었지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커가면서 말수가 줄어드는 정우가 걱정되긴 했지만, 사춘기가 일찍 찾아오는 성장통이라는 생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또래 아이보다 사색이 깊고 지능이 높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경환은 승연이 말한 직무유기란 소리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네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정우의 지능이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주목할 정도라고 보는 거야?”

    “형, 정우가 내 조카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고. 블랙홀과 타키온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어? 아니, 고등학교 수학문제를 가져다주면 풀 자신은 있는 거냐고. 대학수준의 수학문제를 암산으로 해결할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야?”

    경환은 정우에게 등한시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말로만 가족을 지키겠다고 떠들었지만, 정작 정우가 원하는 게 뭔지,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에 대해선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경환은 정우에 대한 미안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부끄럽다. 이제부터라도 정우의 미래에 대해 같이 의논해 보자. 네 말대로 우선 NASA와 캘리포니아 공대의 요청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대신해줘서 고맙다.”

    “여보, 정우는 아직은 뛰어놀아야 할 나인데, 걱정이 많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 난 정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할 생각이니까.”

    경환은 근심을 보이는 수정의 손을 살포시 잡아 주었다. 경환의 불호령이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승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때, 알이 경환에게 다가왔다.

    “회장님, 카일 사장이 서재에 도착해 있습니다.”

    알의 보고에 경환의 눈에선 다시 살기가 뻗어져 나왔다.

    “승연이 너는 폴 허츠 박사를 저택으로 부르도록 해. 난 잠시 서재에 다녀올 테니, 네가 날 대신해서 정우에 대한 테스트를 지켜봐.”

    굳은 표정으로 승연에게 부탁을 건넨 경환은 알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 지하 서재로 향했다.

    SHJ타운의 초입 검문소는 원하지 않는 손님들의 방문으로 인해 자그마한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몇몇이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검문소의 바리케이드는 이들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이 분은 중국 대사대리입니다. 제임스 리 회장님과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온 거니, 최소한 말은 전해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이거 보세요. 여기가 중국 땅인 줄 아십니까? 사전 예약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와도 열리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휴스턴 주재 중국영사관의 영사를 대사대리로 임명한 중국정부는 SHJ타운을 급히 찾도록 지시를 내렸다. 왕즈핑 대사의 낙마를 지켜본 휴스턴 영사는 본국의 훈령이 떨어지자마자 SHJ타운을 찾았지만, 외교 차량이라 하더라도 사전예약을 하지 않은 차량을 통과시킬 정도로 SHJ시큐리티 보안팀의 경비는 허술하지 않았다. 검문소의 강경한 자세에 차에 탑승했던 대사대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사정이 급하다 보니 미리 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제임스 리 회장님께 말씀이라도 전해 주십시오. 그래도 통과가 안 된다면 돌아가겠습니다.”

    대사대리가 직접 나서 사정을 하자, 검문소의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곤혹스러운 얼굴로 통화를 나누던 직원이 인터폰을 내려놓고 중국 대사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회장님께서는 다른 일정으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정중하게 돌려보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이 서신만 회장님께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서신이니 가능하면 바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쉽게 통과되지 않는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 실망은 하지 않았지만, 대사대리의 표정엔 그늘이 새겨졌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서신을 꺼내 검문소에 전달한 대사대리는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차를 빠르게 지나치며 SHJ타운 정문을 통과하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이 눈에 들어왔다.

    “화면을 띄우세요.”

    서재 정면에 설치된 대형모니터엔 SHJ시큐리티의 작전이 실시간으로 모니터링되고 있었다. 여러 개의 화면은 모두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 화면의 중심엔 결코 잊을 수 없는 에릭 프린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접선 인물이 에릭 프린스의 배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팀원들의 배치는 모두 마친 상태고 접선 인물의 등장과 함께 작전을 개시할 예정입니다.”

    경환의 시선은 에릭 프린스에 고정되어 카일의 보고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반년 전에 에릭 프린스를 포착했지만, 배후를 찾기 위해 원거리에서 감시와 감청을 하며 지루한 수 싸움을 했고 오늘 드디어 배후를 밝힐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총기를 소지했다는 가정하에 직원들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작전이 돼야 합니다.”

    식구를 암살하기 위해 킬러까지 고용한 에릭 프린스를 경환은 결코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미국 정부의 처결권까지 확보한 마당에 자신을 막을 수 있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릭 프린스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경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니터로 다가갔다.

    태국 파타야의 밤은 네온사인의 흔들림 만큼이나 화려했다. 위킹스트리트의 구석진 골목 스트립바에는 사내들의 본능을 자극하기 위해 티팬티만 걸친 접대부들이 풍만한 가슴을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한국 관광객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1불짜리 지폐를 티팬티 끈 사이로 꽂으며 접대부의 젖가슴을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에릭의 눈에 들어왔다.

    “젠장, 내 꼴이 우습군. 냄새나는 원숭이 새끼들 침 흘리는 모습만 보고 있다니.”

    일 년이 넘는 도피생활은 에릭을 점점 파멸시키고 있었다. 도피자금은 바닥나고 SHJ시큐리티의 집요한 추적으로 언제 잠을 잤는지도 기억조차 없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댄 마약은 에릭의 의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에릭. 더는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에릭은 마시던 맥주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앞에 앉은 사내를 죽일 듯 올려보았다. 오랜 연결시도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사내는, FBI에 자수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태국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약속된 돈을 다 달라는 것도 아니야. 최소한 내 도피생활이 유지될 정도는 뒤를 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일차 대금은 이미 지불을 완료한 것으로 아는데. 실패한 거래에 돈을 달라는 건 상도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능글거리며 실실 웃고 있는 사내의 면상에 총알을 박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에릭은 자신의 떨리는 손을 멈추게 할 마약 살 돈이 당장 필요했다.

    “평생 고자로 지내고 싶지 않다면, 딴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약속된 돈을 주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어 나가든지 선택은 자유롭게 하라고.”

    사내는 탁자 밑으로 자신의 심벌을 겨누고 있는 총을 슬쩍 바라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라에 가까운 접대부가 맥주를 올려놓자 사내는 맥주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고, 에릭은 그런 사내의 태연함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너무 과격해졌군. 수전증이 심해 보이는데, 내 심벌을 제대로 맞출 수 있겠어? 그래도 눈먼 총알에 섹스의 참맛을 잃어버릴 수는 없겠지. 자, 돈은 준비되어 있으니, 냄새나는 여기서 좀 벗어나자고.”

    그때, 에릭의 뒤통수로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전달되며 에릭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거친 호흡을 내뿜고 있는 에릭은 뒤통수에서 양쪽 관자놀이를 겨누는 총구에 의해 옴짝달싹 못 했고, 사내는 에릭의 손에서 권총을 빼앗아 안쪽 호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이런 위험한 물건은 자네에게 어울리지 않아. 자, 밖으로 나가서 자네에게 필요한 만큼 돈을 들고 가라고. 나갈까, 에릭?”

    사내가 눈짓을 보내자, 양복 안쪽으로 에릭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던 두 수하 중 하나가 에릭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에릭이 자신의 죽음을 직관하며 밖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돌릴 때, 접대부들이 춤을 추던 무대가 시끄러워지며 접대부의 젖가슴을 쓰다듬던 한국 관광객 한 명이 무대 위로 올라섰다.

    “돈맛 제대로 보여줄 테니, 여기 가시나들 확실하게 한 번 놀아보라고.”

    20불짜리 지폐를 양손 가득 쥔 사내가 지폐를 공중에 던졌다. 여성 접대부뿐만 아니라 일부 손님들까지 지폐를 줍기 위해 무대 앞으로 달려가면서 에릭을 부축해 밖으로 향하던 사내들은 입구가 막혀 움직임이 둔해졌다.

    “분위기가 수상해. 주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사내가 급히 소리를 쳤지만, 에릭을 끌고 나가기 위해 총을 겨누던 수하 둘이 사지를 떨며 쓰러지는 모습에 사내는 급히 양복 안쪽에서 권총을 빼 들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존 해밀턴, 이 씹탱아. 너 때문에 지긋지긋한 알랑미를 육 개월 동안 먹었거든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에 존 해밀턴이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자신의 몸으로 전해지는 380만 볼트의 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눈을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시끄럽던 스트립바는 정리되었지만, 젖가슴에 광분하던 한국 관광객들이나 에릭을 끌고 가려던 사내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카일 디푸어 사장님,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존 해밀턴의 입을 여세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할 일을 한 거뿐입니다. 에릭의 배후가 존 해밀턴일 줄은 몰랐습니다. 짐은 오늘 저녁 서산으로 모두 옮길 예정입니다. 에릭이나 존은 서산을 살아서는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경환도 존 해밀턴의 모습이 모니터에 나타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4년을 넘게 연락이 없었던 존 해밀턴이 암살의 배후였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존 해밀턴 역시 일개 하수인에 불과했기에 경환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고는 하지만, 존 매케인은 자신을 마냥 기다리게 하는 경환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대사까지 경질시킬 정도의 힘을 지닌 SHJ인 만큼 지금 아쉬운 사람은 경환이 아닌 자신이었다.

    “존 매케인 상원의원님. 회의 중이라 몸을 뺄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제가 일찍 도착한 거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60대 후반인 존 매케인은 나이답지 않게 정열적으로 경환과 포옹을 나눴다. 에릭의 체포로 배후에 한 발 가까이 갔다는 흥분을 감추며 경환은 존 매케인을 맞이했다. 앨 고어의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하는 존 매케인은 경환에겐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대선 준비로 한창 바쁘실 텐데, 이곳까지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SHJ가 이번 중국과의 다툼을 보면서 제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중국에 끌려만 다닌 앨 고어 정권으로 답답했는데, 정치권을 대표해 제가 오히려 SHJ에 감사를 드려야 할 판입니다.”

    SHJ를 치켜세우며 앨 고어를 깎아내리는 존 매케인을 경환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경환은 앨 고어와 존 매케인이란 떡을 양손에 쥐고 가늠 질을 통해 최상의 선택을 하고 싶었다.

    “SHJ는 정치에 있어선 절대 중립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만한 일이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동양 속담에 과유불급이란 표현이 있더군요.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이란 뜻입니다. 백악관엔 많은 쥐가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SHJ가 정부와 추진했던 일이나 앨 고어에게 이용만 당한 것은 저도 잘 알고 있고요. 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솔직한 성격의 존 매케인이 적극적으로 경환에게 다가왔지만, 경환은 묘한 웃음만 보이며 존 매케인의 애를 끓게 만들었다.

    “국가에 충성했을 뿐입니다. 정부에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요. 그러나 저도 인간이다 보니 신뢰를 잃은 파트너와는 다시 일하기가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더군요.”

    “당연하지요. 이 나라의 미래가 안정되기 위해선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또한, 막힘이 없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미래산업에 끊임없이 투자하는 SHJ 같은 기업이 큰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전 골통 보수주의자인 딕 체니와는 노선이 다릅니다. 하지만 강한 미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이번 SHJ와 중국과의 싸움을 전 감명 깊게 지켜봤습니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내뱉는 존 매케인에 대한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지금이야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 사탕발림에도 망설이지 않지만, 백악관 주인이 된 후까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질문엔 누구도 답을 할 수 없었다. 경환은 오늘 존 매케인을 만났다는 거 자체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상원의원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SHJ는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의원님을 지원할 생각입니다.”

    “하하하, 첫술에 배부르지 않지요. 전, 저와 리 회장이 좋은 파트너가 될 거란 기분이 듭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는데 먼저 김칫국부터 마시는 존 매케인을 경환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루한 대화 속에서 경환의 생각은 캘리포니아 공대의 테스트를 받고 있을 정우에게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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