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9화 (176/264)
  • #199

    다시 사는 인생 - 199

    NASA 소속으로 천체물리학의 권위자인 폴 허츠는 우주의 블랙홀과 초신성 폭발을 연구하며 관측하고 있었지만, 1999년 우주 폭발이 관측된 후로 규모가 큰 폭발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줄어든 NASA 예산으로 인해 필요한 연구가 지연되고 있던 상태에서 SHJ의 지원은 목마른 사막을 횡단하던 폴 허츠에겐 오아시스와 같았다.

    그런 와중에 SHJ의 부탁을 받은 폴 허츠는 앞뒤 가릴 거 없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많은 민간기업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SHJ만큼 장기적이고 인공위성 사업을 통해 NASA의 이익까지 고려하는 기업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사님, 어떻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테스트 중입니다.”

    자신 앞에서 미적분 문제를 풀고 있는 아이로 인해 폴 허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순하게 천체물리학을 좋아하는 아이를 응원해주려는 차원이었지만, 잠깐의 대화로 확인한 아이의 지능은 폴 허츠를 사로잡았다.

    “다 풀었습니다. 박사님.”

    아이가 내미는 답안지의 문제풀이 방법을 꼼꼼히 살핀 폴 허츠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 수준으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미적분 문제를 너무도 쉽게 풀었고,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 또한, 전혀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폴 허츠는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바라보다 좀 더 어려운 문제를 아이에게 내놓았다.

    “수영장의 지름이 10M이고 깊이는 동서 직선을 따라 일정하지만, 남쪽 끝의 1M부터 북쪽 끝의 2M까지 선형으로 증가한다면 수영장 안의 물의 부피는 어느 정도겠니?”

    적어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지 않는다면 삼중적분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폴 허츠는 이 아이의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기 위해 좀 무리한 문제를 제출했지만, 아이는 문제를 풀 생각도 하지 않고 눈만 아래위로 굴리고 있었다.

    “75/2π 인데요.”

    폴 허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다. 삼중적분 문제를 간단히 암산으로 풀어내는 이 아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폴 허츠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너, 천체물리학에 관심이 있다고 했는데, 블랙홀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니?”

    “중력이 강한 별이 중력이 무너지면서 계속 축소되고 마지막에는 한점으로 모이게 됩니다. 이 점의 밀도나 중력의 세기는 무한대이기 때문에, 공간이 변형되고 시간이 늦어지게 되는 거고요. 안에서는 강한 중력으로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사건의 지평선이 생기는데 그 안쪽을 블랙홀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폴 허츠는 이 아이로 인해 천체물리학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박사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뭐든 물어봐. 너라면 내 지식을 모두 전해 줄 수도 있으니까.”

    “만약에 빛보다 빠른 물질인 타키온을 발견하게 된다면, 광속 이상으로 비행할 수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이나 UFO는 있을 수 없다는 칼 세이건의 이론은 모두 틀리게 되는 거겠지요? 또한, 블랙홀도 통과할 수 있고, 시간여행도 가능해지겠죠?”

    폴 허츠는 움찔했다. 소립자론의 계산으로는 타키온의 출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은 이론상으로만 존재할 뿐,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입자였다. 새로운 물질을 찾겠다고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에서 실험을 계속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폴 허츠는 크게 보고 있지 않았다.

    “이론상으로는 가능한 물질이지만, 그 실존 여부조차 아직 불분명하고 지금의 기술로는 타키온의 속력을 측정하기엔 불가능하단다. 네가 도전해 보면 어떻겠니?”

    “아직 모르겠어요. 지금은 천체물리학에 관심이 있지만,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찾는 중이거든요. 오늘 박사님을 만나서 너무 즐거웠어요.”

    박사와 초등학생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만 있던 승연은 조카인 정우의 능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신이 읽기에도 벅찬 천체물리학 서적을 동화책 읽듯이 읽어가는 정우를 승연은 그냥 넘길 수 없어 폴 허츠 박사를 찾았다. 자신의 형인 경환이 특별나다고는 생각했지만, 결코 천재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 자신의 눈으로 본 정우는 일반적인 아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경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찾아온 NASA였기에 승연은 정우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작은 아빠, 나 배고파요.”

    “어, 어. 그래 작은 엄마 불러서 같이 점심 먹자. 너 먹고 싶은 건 뭐든지 다 사줄게.”

    승연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자, 폴 허츠는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이런 아이를 촌구석인 휴스턴에 썩이는 것은 국가적인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폴, 통 연락도 없던 친구가, 오늘은 어쩐 일이야?’

    “마커스,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휴스턴으로 건너올 수 있겠나?”

    ‘이 사람아. 이유라도 알아야 가거나 말거나 하지.’

    “만약에 9살짜리 아이가 삼중적분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내고 블랙홀의 개념을 이해하는 건 물론, 타키온을 거론하는 수준이라면 자넨 어떡하겠나?”

    ‘자네 꿈이라도 꾼 거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거 아냐.’

    폴 허츠는 자신의 친구이자 천체물리학으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공대의 교수인 마커스 브라운을 찾았다. 정우라고 불리는 이 아이를 무슨 수를 쓰든지 천체물리학으로 끌어들일 생각인 폴 허츠는 당장 넘어오라는 호통으로 마커스 브라운을 재촉하고 있었다.

    승연이 정우와 함께 NASA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경환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우주에 대한 관심은 어린아이라면 당연한 거였고, 그 호기심을 풀기 위해선 NASA만큼 좋은 곳도 없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가볍게 넘겨버렸다.

    “회장님, 중국대사님이 도착하셨습니다.”

    “모시세요.”

    중국정부와 SHJ구글 간의 감정싸움은 간을 보는 중국정부로 인해 소강상태에 빠졌지만, SHJ는 중국정부의 답변을 기다리면서도 이미 철수준비를 모두 마친 상태였다. 워싱턴D.C에서 급히 건너온 중국대사는 외교관례를 무시하고 SHJ타운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진행된 검문검색으로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SHJ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왕즈핑 대사님.”

    “흠, 흠. SHJ의 검문검색을 받다 보니 제가 꼭 도둑이 된 기분입니다. 제임스 리 회장님.”

    왕즈핑의 불만에 경환은 물끄러미 중국대사의 눈을 바라봤다. 무슨 수를 가지고 왔는지 왕즈핑의 눈매는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지만, 경환은 엷은 미소를 보이며 왕즈핑의 오만한 눈빛을 되받아쳤다.

    “지금도 중국의 해커들은 SHJ를 해킹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더군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대사님이야 그러지 않겠지만, 수행원 중에 스파이가 없다고 장담하실 수 있으십니까? 왕즈핑 대사님,”

    눈에서 살기를 띠며 몰아세우자 왕즈핑의 입술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재 미국에서 외교적으로 가장 강력한 힘을 구사하고 있는 중국대사인 자신을 아무런 대우 없이 몰아세우는 경환이 어이가 없었다. 시간을 벌면서 SHJ와의 감정싸움을 원만하게 처리하라는 본국의 훈령만 없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겠지만, 왕즈핑은 분노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수행원 중 일부는 MSS 소속의 무관이었지만, 검문검색을 통해 전자장비를 모두 압수당했고 수행원 수보다 더 많은 SHJ의 보안요원들이 인의 장막을 치고 있었다.

    “앉으시죠. 먼 곳에서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하시죠.”

    “좋습니다. 세월이 좀 먹진 않으니까요.”

    자존심이 상한 왕즈핑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불편한 감정을 속이지 않았다. 그런 왕즈핑을 바라보는 경환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하루나가 차를 내려놓을 때까지 두 사람은 여전히 기 싸움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중국 본토보단 못하지만, 그리 나쁜 차는 아닌 거 같군요.”

    “그렇습니까?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군요. 그런데 중국 본토 운남성에서 직접 공수해온 보이차를 몰라보시는군요.”

    한국계인 경환이 당연히 한국에서 생산된 차를 내어 놓을 줄 알았지만, 경환은 왕즈핑의 머리 위에서 놀고 있었다. 왕즈핑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지만, 경환은 차만 홀짝거릴 뿐이었다.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은 경환이 첫 운을 뗐다.

    “자, 대사님이 어렵게 여기를 찾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흠, 중국은 엄연히 법치국가입니다. 외자 기업들은 응당 중국의 국내법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번 SHJ구글에 대한 조치는 세간의 말이 많긴 하지만, 법률을 공정하게 집행하려는 의지라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영업 허가를 취소하겠다던 강경한 자세에서 한풀 꺾인 표현을 쓰는 왕즈핑을 바라보는 경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 중국정부의 행태에 짜증이 몰려왔지만, 그걸 내색할 만큼 하수가 아니었다.

    “대사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인터넷을 통제하려는 중국정부에 우리는 반대의사를 명확히 밝혔습니다. SNS인 구글라인의 접속도 현재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언론통제 목적과 자국 검색엔진인 바이두와 163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SHJ구글은 눈엣가시였겠죠. 말 돌리지 마시고 원하는 걸 말씀해 보시죠.”

    “좋습니다. 중국정부는 지금까지의 문제를 닫고 미래지향적인 자세로 임할 생각입니다. SHJ구글에 대한 유예기간을 5년까지 확대하는 조건으로 사이보그OS 컨소시엄에 중국기업을 참여를 원합니다. 또한, 엘리시움 생산공장을 중국에 설립해 줄 것을 제안합니다.”

    경환은 이 말을 전하는 왕즈핑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환은 왕즈핑에게 펜으로 갈겨쓴 메모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메모지를 바라보는 왕즈핑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가 심심해서 대사님이 과연 무슨 제안을 할까 적어봤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맞히는 걸 보니 저도 예언가 기질이 있나 봅니다. 대사님의 제안 모두 거절하겠습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이미 서면으로 전달했고, 중국정부의 시간 끌기나 핑퐁게임은 제 스타일과는 거리가 멉니다. 대사님.”

    “SHJ는 16억 중국시장에서 퇴출당하는 게 무섭지 않나 봅니다.”

    왕즈핑은 아차 하며 눈을 감았다가 떴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경환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하기 시작하며 왕즈핑을 죽일 듯 바라보았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왕즈핑 대사. 아시아만 해도 아직 24억 이란 인구가 버티고 있습니다. SHJ가 중국시장에서 퇴출당하는 걸 무서워하는지 아니면 우스워하는지 대사 앞에서 직접 보여주겠습니다.”

    경환은 하루나를 통해 급히 황태수를 찾았고 밖에서 대기하던 황태수가 급히 집무실에 들어섰다. 경환의 노기를 접한 황태수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부회장님은 제 지시를 바로 시행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중국정부는 약속한 시간을 한 시간 전에 넘겼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무시한 처사라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에 진출한 모든 사업을 철수하십시오. 또한, 베트남과 인도, 태국에 엘리시움 생산공장 설립을 빠르게 추진해 내년 말부터는 생산할 수 있도록 조치하시고, 오성전자에 국한된 칩셋 생산을 대만에서도 생산될 수 있도록 협의를 진행하세요.”

    “바로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황태수가 급히 집무실 밖으로 사라지자, 왕즈핑은 눈알만 돌릴 뿐, 제대로 상황을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혹 떼러 왔다 혹만 하나 더 붙인 꼴로 변하자, 왕즈핑의 이마엔 굵은 땀이 연신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SHJ의 태생에 대한 기밀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왕샹첸과 장성궈가 SHJ와 연결된 문제로 수감 중인 걸 잊으시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왕즈핑의 마지막 발악은 사태를 더욱 극한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정권이 바뀌고 가장 먼저 왕샹첸과 장성궈가 부패관리와 기업인으로 찍혀 체포되었지만, 정확한 죄명은 발표되지 않았다.

    “쥐고 있다면 까면 될 거 아닙니까! 왕샹첸과 장성궈의 비자금이 어디로 흘러들어 갔는지, 지금 중국정부 수뇌부의 누가 연결되어있는지, 전임 주석의 비자금 규모와 현 주석의 비자금 내역을 내가 모른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못 까면 내가 깔 테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아셨소! 왕즈핑 대사!”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서로 까보면 알 거 아닙니까! 지금 이후에 벌어지는 일은 모두 왕즈핑 대사의 책임이란 걸 잊지 말아야 할 겁니다.”

    경환은 더 이상 왕즈핑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지, 인터폰으로 알을 급히 찾았다. 왕즈핑은 경환의 강공에 기를 다 빼앗긴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본국의 훈령을 무시하고 경환의 기선을 빼앗으려던 계획은 오히려 경환의 반발에 무너져내렸다. 화려했던 미국대사 생활에 종지부가 찍히는 소리가 왕즈핑의 귓가에 맴돌기 시작했다.

    “손님 나가십니다. 먼저 수행원들의 몸을 철저히 수색하세요. 만약 이쑤시개 하나라도 발견되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산업스파이 혐의로 체포하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왕즈핑은 SHJ시큐리티 직원의 손에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경환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애원해 보고 싶었지만, 경환은 왕즈핑을 무시하며 집무실과 연결된 서재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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