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4화 (171/264)
  • #194

    다시 사는 인생 - 194

    ‘헉, 헉’

    뒤를 돌아볼 새도 없는지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사내가 경기도 화정의 야산을 숨 가쁘게 내달렸다.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서서히 좁혀오는 추격을 느껴서인지 흐르는 땀을 닦을 정신조차 없어 보였다. 야산만 벗어나면 아파트단지로 숨어들어 유리한 지형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사내의 동작엔 거침이 없었다.

    ‘젠장. 살아만 돌아가면, 내 손으로 다 죽여버리고 말겠어.’

    한 달 전부터 준비한 계획은 완벽했다. 야산의 정면으로 보이는 L & K 직업훈련원과의 거리는 800M로 최적의 장소에 저격을 위한 비트를 확보한 상태였다. 직업훈련원의 졸업식 하루 전에 비트에 도착해 저격 대상을 기다렸지만, 서산에서 출발한 차량은 시간이 지나도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순간, 뒷골에서부터 전달되는 살기에 몸을 급히 옆으로 굴리지 않았다면 뒤에서 덮쳐오는 정체불명의 인물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허리춤에 준비한 나이프로 상대방을 어렵게 제압했지만, 자신의 볼을 스치며 나무에 박히는 탄알을 확인한 사내는 저격용 소총을 챙기지도 못한 채, 급히 그 자리를 벗어나야만 했다.

    경찰은 아닌 거 같고 총기 휴대가 불가능한 한국에서 소음총을 휴대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안전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미리 확보한 탈출 동선을 포기하고 도심지로 이동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지만, 촘촘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포위망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추면 어김없이 총탄이 날아들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토끼몰이를 당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쉽게 잡혀 줄 수는 없었기에 사내는 이를 악물고 도심지를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퍽.’

    갑자기 사내의 다리에서 피가 튀며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사내의 몸이 허공을 향해 크게 튕겨 올랐다가 급속도로 내려앉았다.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의 헝클어진 몸 앞으로 두 명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젠장, SHJ시큐리티였나?”

    “더 용을 써보지 그랬냐. 다리가 아니라 주둥아리에 총알을 박아 줬어야 했는데.”

    “이봐, 한국말 못 알아들으니까. 만국 공용어인 영어로 해 달라고.”

    총상이 심각했는지 나무에 기대고 있는 사내의 허벅지에선 굵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위장한 두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보이며 사내의 곁으로 서서히 이동을 시작하자, 나무에 기대에 마지막 기회를 살피고 있던 사내의 감춰진 손이 허리춤의 나이프로 향하고 있었다.

    “꼴에 지랄을 떨어요. 좋아 영어로 해 주지. 네 손가락이 일 센티라도 움직이면 총알이 니 대가리에 박히게 될 거야. 이 개자식아.”

    사내는 소음기의 총구가 자신의 머리로 향하는 것을 눈으로 바라보며 나이프로 향하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마지막 수단까지 저지당한 것을 느끼자, 사내의 입가엔 미소가 흐르며 평정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긴 한국이라고. 자네가 미국인인 나를 어찌할 수는 없지 않겠어? 그러니 어서 총상을 치료할 의사나 불러주지그래.”

    “어이구 그러세요? 미국놈이라 아주 좋으시겠어요. 네놈이 칼침 먹인 자식이 내 동기야. 이 개새끼야.”

    총구를 겨누고 무장을 해제당한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어 보이려고 애썼지만, 묵직한 워커가 자신의 배를 강타하는 걸 느끼며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이보그폰과 SHJ퀄컴의 상장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한국을 방문한 경환으로 인해 서산의 SHJ타운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정부와 여론은 갑자기 이뤄진 경환의 한국방문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경환은 SHJ타운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아 의문만 증폭시키고 있었다.

    “여보,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회사 일도 바쁠 텐데.”

    “왜? 마누라하고 애들 보고 싶어, 한걸음에 왔더니 푸대접만 받으니. 괜히 왔나?”

    “그런 말이 어딨어요? 직업훈련원 졸업식에 참석하라고 신신당부하더니 갑자기 와서는 참석하지 말라고 하고, 궁금해서 그런 거죠.”

    눈을 흘기는 수정을 가만히 안은 경환이 수정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수정은 영문을 몰라 경환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지만, 경환의 얼굴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며칠 전부터 SHJ시큐리티 직원들이 SHJ타운과 저택 주위로 배치되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총기까지 착용한 모습에 수정은 불안했었다. 경환까지 갑자기 한국에 오자 수정은 자신의 신변에 위험이 발생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경환에게 걱정을 주기 싫었던 수정은 모른 척 이를 넘길 생각이었다.

    미셸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알이 급히 경환에게 다가왔지만, 수정과 포옹을 나누고 있는 경환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알,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네, 회장님.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눈치 빠른 수정이 아이들을 살피기 위해 미셸과 함께 자리를 뜨자, 경환은 수정을 향했던 미소를 급히 거둬들였다. 자신의 생명보다도 소중한 가족을 노린 이번 일을 경환은 쉽게 넘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직업훈련원 뒤 야산에서 방금 저격수를 확보했습니다. 다리에 총상을 입에 현장에서 응급조치 후에 서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SHJ시큐리티의 피해는 없었습니까?”

    “체포하는 과정에서 한국지사의 직원 한 명이 복부에 자상을 입어 후송 중입니다.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보고입니다.”

    “부상자가 쾌유할 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마세요. 그리고 에릭 프린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경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SHJ시큐리티의 보안과 정보수집 업무를 SHJ퀄컴과 SHJ구글의 연구진을 SHJ시큐리티로 이동 배치하면서까지 강화했었다. 처음 이유는 경쟁업체의 산업스파이를 대비하고 NSA의 도청과 감청시스템을 무력화하기 위한 방어를 목적으로 한 프로그램 개발이었다. 휴스턴 SHJ구글의 서버와 견줄 말한 시설을 SHJ타운 지하에 건설한 이후 구글라인과 구글메신저의 무한대의 정보를 이용해 이번 테러를 사전에 감지할 수 있었다.

    온라인에서 SHJ나 SHJ와 관련된 언어나 내용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정보를 취합했고, 정보 취합 부서를 세분화시켜 자신이 무슨 일을 담당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도록 해 자칫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NSA의 애셜론과 비교해 아직 위성을 이용한 정보수집은 불가능하지만, 올해부터 발사되는 SHJ구글의 인공위성이 본격적인 사업궤도에 오른다면 애셜론에 필적할 만하다는 자체분석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런 사실을 미국 정부나 국민들이 알게 된다면 SHJ의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사법 처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경환은 이런 정보 취합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카일이 직접 팀을 이끌고 에릭의 근거지를 급습했지만, 이미 종적을 감춘 상태입니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에릭 프린스를 잡으십시오. 생포를 목적으로 하지만, 직원들의 안전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살해도 좋습니다.”

    경환의 입에서 사살이란 단어가 나오자 알은 가족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환의 분노를 알 수 있었다. 처음 느끼는 경환의 살기에 알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우리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했다면, NSA도 어느 정도는 감지했다고 봐야겠지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NSA의 기술이라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에릭은 이번 일을 계획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합니다. 회장님.”

    경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NSA에서 이런 정보를 놓칠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왜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을지 경환은 고민하고 있었다. 또한, 에릭을 사주한 조직이나 인물에 대해서도 아직은 오리무중이었다.

    “회장님, SHJ시큐리티에서도 베테랑으로 조직한 팀이 에릭을 뒤쫓고 있습니다. 당분간 경호팀을 증강하고 정보팀을 최대한 가동하겠습니다.”

    “머리가 없어도 SHJ는 돌아가지만, 머리가 미쳐버리면 SHJ도 무너진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알, 이번 일에 관여한 자들은 누가 되었건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SHJ시큐리티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뒤를 추격하세요. 정보기관보다 빠르게 시행돼야 합니다.”

    구급차 두 대가 어떠한 저지도 받지 않고 SHJ타운의 검문소를 통과해 들어갔다. SHJ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있었던 테러는 SHJ시큐리티의 빠른 대처로 막을 수 있었지만, 혹시 모를 2차 테러에 대비라도 하는 듯 보안요원들의 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외부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32사단 병력은 갑작스러운 SHJ시큐리티의 경계 강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외곽 경비를 강화하는 선에서 SHJ와 보조를 맞춰갔다.

    이번 테러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묻혀가고 있을 때, SHJ타운은 SHJ퀄컴의 쇼케이스로 몰려드는 인파를 정리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폐쇄적인 SHJ타운이 쇼케이스로 잠시 개방된다는 소식은 전 미국을 들썩이게 했다. 사전 신청을 받아 신원조회가 마친 사람에 한해 출입을 허가하겠다는 공고가 있었지만, 허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무작정 휴스턴으로 몰려드는 바람에 경비를 담당하는 SHJ시큐리티는 전 인원을 투입하고도 손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휴스턴 경찰이 SHJ타운의 외곽을 정리하는 사이, SHJ에서 제공한 차량으로 SHJ타운을 돌아보는 방문자들은 어느 도시보다도 깔끔하게 정리되고 친환경적인 SHJ타운에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이 무색하게 SHJ타운은 직원 개인에 대한 복지를 가족까지 확대해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번 SHJ타운의 일시 개방은 직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소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조치로 절반의 성공을 거둔 상태였다.

    주택단지를 돌아 경비가 한층 더 삼엄한 SHJ퀄컴에 도착한 차량에서 방문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서인지 사진을 찍으려는 방문자들과 이를 제지하려는 SHJ시큐리티 직원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큰 사고 없이 쇼케이스가 진행되는 장소로 방문자들이 모여들었다. 방송용 카메라가 설치되자,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SHJ퀄컴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형스피커에서 들리는 매혹적인 여성의 목소리는 방문자들의 시선을 끌며 좌중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대형스크린으로 미래형 도시가 펼쳐지며 가족들의 평온한 일상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인간을 닮은 안드로이드들이 인간을 시중들며 벽 전체로 비추던 숲이 아이의 손짓 한 번으로 우주로 바뀌는 모습은 방문자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탁자 위에 놓인 사이보그폰을 들어 터치스크린 방식을 통해 영상통화와 메일 전송, 인터넷 검색과 구글스토어를 통한 MP3 다운로드, 사진을 찍어 구글라인에 올리는 기능까지 화면을 통해 전달되었다. 스크린 하단에 엘리시움(ELYSIUM)이란 자막을 마지막으로 어두웠던 조명이 서서히 밝아졌다.

    “후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제이콥스 사장님, 수고 많았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부회장님. 회장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에서 엘리시움을 발표하게 돼서 아쉬울 따름입니다.”

    “저도 아쉽긴 하지만, 쇼케이스보다 가족의 안위가 더 급하셨겠지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쇼케이스였지만, 참석하지 못한 경환으로 인해 황태수와 어윈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엘리시움 발표는 10년 전부터 경환에 의해 준비된 만큼 큰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엘리시움보단 가족들이 경환에겐 더 소중했다. 자신들보다도 경환이 더욱 아쉬워할 거란 생각에 황태수는 후속조치를 위해 어윈에게 다가갔다.

    “시장의 반응을 면밀히 살피시고, 대대적인 광고에도 신경을 쓰십시오. 다음 달에 있을 상장에 극적인 효과를 보기 위해선 엘리시움이 모바일 시장을 뒤흔들어야 합니다.”

    “이미 SHJ에이전트와 함께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늘부터 골든타임 광고는 엘리시움으로 도배하게 될 것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장님의 부재로 인해 직원들이 동요할 수도 있으니 제이콥스 사장님은 최대한 직원들의 동요를 잠재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일은 철저히 비밀에 부치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때일수록 뭉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을 위해 SHJ시큐리티를 키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시기적으로 너무 앞서 간다는 우려와 함께 기존 휴대폰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하긴 어렵다는 분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엄청난 투자와 기술이 집약된 엘리시움이 시장의 외면을 받기라고 한다면 SHJ도 큰 타격이 예상됐지만, 황태수와 어윈은 경환이 공들인 엘리시움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모든 방송은 오늘 있었던 쇼케이스를 방영하며 모바일 시장이 엘리시움으로 인해 한 치 앞을 모르는 경쟁으로 빠졌다는 분석과 함께 다음 달에 있을 애플의 차기작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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