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3화 (170/264)

#193

다시 사는 인생 - 193

한국의 대선은 연속해서 터지는 악재로 야당후보가 스스로 자멸하며 여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며 보수진영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임대통령의 이상주의가 기득권 세력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면서 국정 장악력에 문제점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이 전임 정부의 소비증대 정책으로 무분별하게 발급된 신용카드가 4백만 명이라는 신용불량자와 260조 원의 가계부채를 초래해 의욕적으로 추진하려는 신임 정부의 경제정책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며 외환위기에서 벗어나 재도약하려는 한국 경제에 발목을 잡고 있었다.

이런 한국의 꼬인 정국과는 다르게 SHJ의 IPO 진행은 일사천리와 같이 진행되었다. SHJ퀄컴의 IPO 주간사 선정을 놓고 금융업계의 로비가 극에 달했고 SHJ는 골드만삭스와 시티은행을 주간사로 선정해 SHJ실사와 예비심사를 진행했고, 증권거래위원회는 재심사 없이 SHJ의 IPO를 승인했다. 사상 최대 규모인 4백억 불에 달하는 SHJ퀄컴의 상장은 침체한 주식시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시작했고, 이번 IPO를 이끈 앨 고어의 지지도 상승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휴일은 맞은 경환에게 월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SHJ퀄컴의 상장은 경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경환의 머리엔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가는 두 아이와 수정에 대한 생각밖엔 없었다.

“당신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SHJ퀄컴 상장도 있고, 자리 비우기가 쉽지 않아서 그래. 당신이 이해를 좀 해 줘.”

수정의 아쉬운 표정에 경환은 미안했지만, 지금은 휴스턴을 비울 여력이 없었다. 짐을 정리하는 수정을 살포시 안은 경환이 수정의 입술을 찾자, 수정은 조그마한 입술을 열어 경환의 뜨거운 숨결을 받아들였다. 경환의 손이 수정의 하복부를 향하자, 수정은 급히 경환의 손을 제지하고 나섰다.

“여보, 아이들이 봐요.”

“내 마누라 내가 만진다는데 누가 뭐래? 정우와 희수가 빨리 커야 독립이라도 시키지.”

방학하자마자 어김없이 찾아온 제니퍼로 인해 한국 일정이 밀려서인지 정우와 희수는 한국에 간다는 사실에 들떠 2층과 거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아빠 엄마의 애정행각을 힐끗거렸지만, 평소에도 그런 모습을 자주 봐 왔던지 아이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경환은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며 수정을 품에서 놔줘야만 했다.

“상황 봐서 나도 넘어갈 테니까, 그때까지 서산에서 머물고 있어.”

“그럴 거예요. 대단한 남편을 둬서 어디 돌아다니지도 못해요.”

한국계로 타임지의 표지모델을 장식하고 세계최대 갑부 대열에 합류한 경환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언론과 파파라치의 표적이 된 지 오래였다. 수정의 한국 방문이 한국언론에 의해 공개되면서 인천공항과 서산 SHJ타운 주변에는 벌써부터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회장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미셸, 아내와 아이들을 잘 부탁합니다.”

수정의 한국 일정의 경호책임자인 미셸의 어깨를 경환은 가볍게 두들겼다. 두 사람은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의 신뢰가 손끝을 통해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알고 있는 알이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경호팀 중에서도 최정예로 선발했고, SHJ시큐리티 한국지사에서 백업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하나 봅니다. 출발합시다.”

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수정과 아이들을 실은 전용기가 활주로를 이륙해서야 공항을 벗어날 수 있었다. SHJ퀄컴의 상장과 SHJ구글의 모바일OS 발표가 연이여 잡히면서 SHJ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태연함과는 다르게 시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케빈 너 소식 들었어? SHJ가 세틀러-6을 끝으로 시리즈를 종결한다고 했다더라고.”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난 세틀러-6으로 갈아탄 지 반년도 안 지났는데.”

세틀러-6으로 애인과 영상통화를 하던 케빈은 노크도 없이 자신의 방에 침입한 애이든의 다급한 목소리에 급히 영상통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애인의 성화에 못 이겨 사용하던 노키아 구형모델을 세틀러-6으로 바꿨지만, 세틀러-6을 마지막으로 세틀러 시리즈가 중단된다는 소리에 케빈은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SHJ에서 혁신적인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을 선보인다더라고. OS가 장착된 휴대폰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건 다음 주에 있을 모바일OS가 발표돼야 정확한 걸 알 수 있을 거 같아.”

“젠장,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이게 뭔 소리야. SHJ 이 엿같은 놈들.”

케빈의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왔다. SHJ퀄컴의 상장을 극대화하기 위해 혁신적인 휴대폰을 선보이겠다는 선전을 본 기억이 났지만, 케빈은 세틀러 시리즈가 중단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SHJ 추종자인 애인의 광분하는 모습이 케빈의 눈에 오버랩 되면서 케빈은 인상을 찡그렸다. 새로운 모델을 구매한 애인이 자신에게 강매를 권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케빈 네가 운이 없는 거지. 그래도 기존 세틀러를 사용한 고객은 보전해 준다니까 그나마 다행이지. 넌 30%는 받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만하면 불행 중 다행 아니야?”

“그게 정말이야? 휴대폰 하나 바꾸려면 두 달 동안 샌드위치만 먹어야 한다고.”

휴대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기능 이외에는 사용을 하지 않는 케빈은 혁신적인 기능엔 별 관심이 없었다. 케빈은 자신의 애인 손에 새로운 휴대폰이 들려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모바일OS 작업이 마무리 단계인 애플도 어제 쇼케이스를 통해 발표된 SHJ구글의 모바일OS인 사이보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는 손에 쥐고 있던 티비 리모컨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젠장, SHJ 이 자식들은 왜 항상 내 발목을 잡아당기는 거야.”

“스티브, 선수를 또 SHJ에 뺏겼지만, 석 달 후면 아이폰을 선보일 수 있으니 우리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않나. 제임스 리는 영악한 놈이야.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인수할 때부터 냄새를 풍기더니.”

팀 쿡은 분을 참지 못하고 사무실을 서성거리는 스티브 잡스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스티브 잡스의 귀에는 팀 쿡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인수를 단순한 특허권 확보로 생각했지만, 사이보그의 발표로 특허 소송을 사전에 막기 위한 인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앤디 루빈이 SHJ에 합류한 게 우리로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일이 된 거야. 사이보그란 이름도 개발자인 앤디 루빈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지. SHJ는 OS만 발표한 거뿐이야. 새로운 모델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만큼 어쩌면 아이폰이 시장에 빨리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팀, 지금까지 SHJ의 전략을 보면 모르겠어? 컨소시엄과는 별개로 이미 새로운 모델은 개발해 놓았을 거야. 내가 아는 제임스 리라면. 세틀러 시리즈를 종료하겠다고 발표했다는 건 이미 차기 작품을 준비했다고 봐야 해.”

팀 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애플 내부엔 SHJ의 마케팅을 전담해서 분석하는 부서가 있을 정도로 스티브 잡스는 SHJ를 최대 경쟁상대로 의식하고 있었다. SHJ는 애플의 허를 찌르며 사이보그를 오픈소스로 제공해 휴대폰업계와 애플의 양강구도로 만들어 버렸다. 생각할수록 SHJ의 치밀한 전략에 말려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 스티브 잡스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아이폰이 실패라도 한다면 더는 자리에 붙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폰이 좀 늦더라도 아이패드를 먼저 출시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다시 수정해야 할 거 같아. SHJ가 태블릿 PC 사업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걸 보면 MS와 오성전자를 의식했다고 봐. 태블릿 PC에서 MS와 오성전자를 깬다면 아이폰의 출시가 좀 늦더라도 충분히 SHJ를 추격할 수 있을 테니까.”

“흠, 자네의 의견에 동감은 하지만, 섣불리 아이패드를 출시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이폰까지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겠어?”

“팀, 우린 이게 마지막 기회야. 지금은 모험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스티브 잡스의 강한 어조에 팀 쿡은 입을 다물었다. 아이맥으로 기사회생했지만, 기대했던 아이팟의 판매저조와 주가하락은 애플의 유동자금을 서서히 말리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이란 말에 팀 쿡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도 스티브 잡스와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SHJ퀄컴의 상장 일자를 새로운 형태의 차세대 휴대폰 출시일 뒤로 미룬 건 최대의 효과를 보기 위한 경환의 주문이 있어서였다. SHJ 내부에서도 OS를 장착한 휴대폰의 성공을 불확실성에 무게를 두며 상장 일자를 당기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경환은 이런 의견을 일거에 일축해 버렸다.

“누오보 소장님, 생각한 거보다 사이보그폰이 잘 나온 거 같습니다.”

경환은 시제품으로 나온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화면 속에 나와 있는 응용프로그램을 조작했다. 소형화가 추세인 휴대폰과는 다르게 다소 커 보이는 사이보그폰은 한 손으로 조작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디자인연구소장인 프랭크 누오보는 경환 앞이라 그런지 긴장했다.

“회장님의 의견을 받고 디자인연구소에서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4.7인치로 다소 크다는 지적이 있긴 하지만, 한 손 조작이 가능한 안의 범위에서 디자인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차기 모델의 디자인 작업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시안은 마쳤고 탑재 기능이 확정되면 수정작업을 할 예정입니다.”

경환은 전면 터치스크린 방식의 사이보그폰을 앞뒤로 살펴보다 뒷면을 열어 배터리 연결 부분까지 세세하게 살폈다. 2007년 첫선을 보인 아이폰보다 4년을 앞당겨 출시하는 만큼 시장의 반응에 대해선 확신을 할 수 없었지만, 분명 모바일 시장은 사이보그폰으로 인해 큰 변화를 겪을 것이란 사실에 대해선 자신할 수 있었다.

“제이콥스 사장님, 애플이 태블릿 PC를 먼저 선보인다는데, 업계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게 오성전자는 나름대로 출시일을 조율하고 있지만, MS 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거 같습니다.”

경환은 사이보그폰을 만지던 손을 잠시 멈추고 어윈을 바라봤다. MS와의 지분교환 이후로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동종업계의 협력관계란 유리잔과 같아 쉽게 깨질 수 있었다. 경환은 어윈의 말을 이해한 듯 입술을 슬쩍 말아 올렸다.

“윈도우의 영향력이 줄어들까 염려를 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MS 내부적으로 사이보그와는 별개의 모바일 OS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직 성공 여부를 판단할 수 없어 노키아처럼 관망하려는 거 같습니다. 태블릿 PC는 오성전자와 소니가 준비하고 있지만, 애플보단 늦어질 거 같습니다.”

“떡을 손에 쥐여줘도 싫다는 애를 무슨 수로 달래겠습니까? 심각하게 대처하지 말고 MS가 우리와 결별했을 때를 대비하세요.”

경환은 SHJ구글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이보그폰에 장착된 구글스토어와 어플스토어, 구글라인과 구글어스 등 다양한 응용프로그램을 조작하다 회의에 참석한 임원들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저는 이 사이보그폰이 앞으로의 모바일 시장을 좌지우지할 것으로 판단합니다. 세틀러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경쟁업체들은 우리의 기술과 디자인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경쟁업체들이 우리를 추월할 거란 가정하에 미래에 대한 예측과 기술개발에 소홀하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NASA와의 계약이 성사된 만큼, 올해부터 우리 소유의 인공위성을 우주에 띄우게 될 겁니다. 순간의 이익에 안주하지 않고 먼 미래를 바라보는 계획을 수립하겠습니다.”

경환은 입맛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SHJ가 독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지만, 모바일 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45억 불이란 엄청난 자금으로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인수하고, 그보다 더 많은 금액으로 개미핥기처럼 IT 기업을 싹쓸이해 SHJ구글의 덩치를 키운 이유도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경환은 자신의 말뜻을 이해한 황태수에게 신뢰를 담은 눈빛을 전달하고 있을 때, 알이 메모지 한 장을 경환에게 건넸고, 메모지를 읽던 경환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윈 사장님과 누오보 소장님은 최종 점검을 해 주시고 쇼케이스에 대비해 주십시오. 특별한 안건이 없다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서둘러 회의를 마친 경환은 임원들과의 인사도 마다한 채, 알과 함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경환은 굳은 표정으로 알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제대로 확인한 내용입니까?”

“80%의 신빙성이 있는 내용입니다. 내려가시겠습니까?”

경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은 경환의 집무실 밖으로 SHJ시큐리티 인원을 배치해 다른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경환이 자신의 방과 직접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는 끝없이 지하를 향해 내달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