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2화 (16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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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92

    오성전자 경영진을 모두가 모인 회의실 중심엔 심각한 표정의 이형우가 자리 잡고 있었다. SHJ의 꽁지를 쫓아 목덜미를 잡아챌 정도까지 다가가면 SHJ는 오성의 추격을 비웃듯 더 멀리 달아났다. 한국에 한정되긴 했지만, 점유율에서 세틀러를 2위로 밀어내고 미국과 유럽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휴대폰 사업은 SHJ의 모바일OS의 개발로 오성전자의 추격 의지에 찬물을 끼얹고 있었다.

    “이철승 상무, SHJ가 퀄컴의 IPO를 준비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하버드 MBA를 수료하고 작년부터 오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로 복귀한 이철승은 자신의 아버지기도 한 이형우의 질문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올해 SHJ그룹의 총 매출은 650억 불에 매출이익은 250억 불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NASA와의 인공위성 사업에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긴 하지만, SHJ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이번 SHJ퀄컴의 IPO는 자금문제라기보다는 백악관과의 특별한 교감이 필요해서 이뤄진 조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철승의 대답을 들은 이형우는 만족했다. 3대 경영체제를 준비하기 시작한 오성은 이철승의 후계자 작업에 공을 들이고 있었고, 핵심 계열사인 오성전자 경영기획팀에서 무리 없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철승을 대견하게 생각했지만, 이형우의 얼굴 한편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동년배이긴 하지만, 이철승이 경환을 상대하기엔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SHJ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지만, 기업 간의 관계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자란 이철승이 자신도 다루기 어려운 경환을 동등한 위치에서 상대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형우는 잠시 고민을 마친 뒤, 머리를 들었다.

    “이세일 사장, SHJ구글이 많은 투자로 개발한 모바일OS를 오픈소스로 제공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분석을 하나?”

    모바일OS에 대한 검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수익성 좋은 모바일 기기를 가지고 있는 오성으로썬 기존 모바일을 파괴하는 혁신적인 새로운 모델을 고려하는 거 자체가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SHJ에게 또 한 번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이형우는 이세일로는 오성전자의 미래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무덤덤한 시선을 이세일로 향했다.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고 봅니다. SHJ구글은 API만 오픈소스로 제공하고 독자 개발한 VM은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모바일OS를 통해 업계의 지배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현재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 인수합병을 협의하는 것으로 봐서 발생할 수 있는 특허권 침해를 오픈소스로 무마시키거나 혹은 컨소시엄으로 리스크를 분산하려는 조치라고 판단됩니다.”

    “오성전자는 매번 뒷북만 치고 있군요. 도대체 우리 오성은 언제까지 SHJ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닐 생각입니까!”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격노한 이형우로 인해 회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세일은 자신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며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치며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경환 회장은 SHJ구글을 설립할 때부터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구글이란 검색엔진을 미끼로 해서 메일, 메신저, 구글스토어, 구글라인과 함께 이번엔 디지털위성회사인 키홀까지 인수해 구글어스까지 출시한 이유는 이번 컨소시엄을 대비한 SHJ 이익을 보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봅니다. 적은 것을 던져주고 큰 것을 먹겠다는 이경환 회장의 노림수라는 말입니다.”

    이형우의 한탄에도 회의에 참석한 오성전자의 임원들은 반론을 꺼낼 수 없었다. 무거운 분위기를 의식한 듯 이철승이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잡았다.

    “회장님, SHJ의 차세대 휴대폰이 혁신적이긴 하지만,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컨소시엄에는 발만 담그는 형태를 취하고, IMT 2000 모델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세틀러를 확실히 잡을 기회라고 봅니다.”

    “멍청한 놈. 우리가 무서워 SHJ가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하는 게냐!”

    “회, 회장님. 그, 그게······.”

    “오성전자는 이번 SHJ의 컨소시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모바일OS를 바탕으로 한 모바일 기기의 기능과 획기적인 디자인에 전력하세요. 당분간 SHJ와의 경쟁은 자제하고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전념해야 할 겁니다.”

    이철승에 대한 이형우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자신의 시대가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지만, 이철승의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선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이형우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철승이 자신과 동년배인 경환을 상대할 수나 있을는지 이형우의 이마엔 깊은 주름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경환은 하루나가 건네는 타임지의 표지를 보고는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책상 구석으로 밀어버렸다. 올 초부터 타임지에선 끈질기게 인터뷰 요청을 해왔지만, 경환은 이를 계속 거절했었다. 그러나 SHJ퀄컴의 IPO가 다가오면서 SHJ 내부에선 타임지와의 인터뷰가 도움이 될 거란 분석에 경환의 인터뷰를 종용했고, 경환은 이를 마지못해 수락했다. 타임지 표지는 올해의인물로 선정된 경환의 얼굴로 장식됐고 끊임없이 울려대는 축하전화에 비서실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회장님, 부회장님이 오셨습니다.”

    하루나의 뒤로 황태수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경환이 그룹 업무를 부회장과 계열사 사장에게 위임하면서 경환이 한가해지는 만큼 황태수의 업무는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50대 중반을 넘어가는 황태수는 아직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열정을 SHJ에 쏟아 붓는 중이었다.

    “퇴근 시간 다 돼가는데 어쩐 일이세요?”

    “회장님 칼퇴근하시는 거 배 아파서 찾아왔습니다. 위스키 한잔 주십시오.”

    황태수의 투정에 경환은 얼음과 함께 위스키를 따른 잔을 황태수에게 건넸다. 경환도 타임지로 인해 시달렸던 하루가 피곤했던지 황태수의 의견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IPO 분위기가 좋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지분의 20%를 1차로 시장에 풀다 보니 시장의 기대가 상당합니다. SHJ퀄컴의 시장가치가 부풀려 있다는 우려도 있긴 하지만, 시가총액 1,600억 불은 무난할 거란 것이 대세입니다.”

    20%만 하더라도 400억 불을 이번 IPO로 조성할 수 있었다. SHJ퀄컴의 상장 소식에 관련 IT기업의 주가가 반등을 시작할 정도로 SHJ퀄컴의 상장은 바닥을 치고 있는 월가에 큰 이슈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자제분이 군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사모님 맘고생이 심하시겠네요.”

    “저도 사실은 군대를 보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자식이 아비보다 낫더군요. 몸 성히 다녀오기만 바라고 있습니다.”

    황태수는 위스키를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경환도 황태수를 따라 술잔을 비우고는 빈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황태수의 큰아들은 미국 영주권을 취득해 35세 전까지는 군대에 갈 이유가 없었지만,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한국 군대에 자원입대를 결정해 한창 훈련을 받고 있었다.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자랑스러우시겠습니다. 저도 정우가 군대에 입대한다면 반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부모 마음이야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은 한국의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보십니까?”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한국은 지지율에서 앞서는 야당 후보와 이를 역전시키려는 여당 후보와의 피 튀기는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정권 심판론을 기본 전략으로 삼은 야당캠프의 네거티브 전략은 구태 정치 청산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열겠다는 여당캠프의 포지티브 전략에 말려 들어가면서 지지율의 격차가 급속도로 좁혀지고 있었다. 더욱이 대선 막바지에 터진 야당 후보 아들의 군면제 의혹은 지지율에 치명타를 가하고 있어 대선의 향방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글쎄요. 현명한 국민들이 잘 선택하길 바라야겠죠. 우리가 이번 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만큼 여당이 재집권에 성공한다면 우리에게도 영향이 있지 않겠습니까?”

    “회장님께선 그렇게 보고 계시는군요. 여당과 야당 대선캠프에서 은밀히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하며 접근해 왔다고 합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경환은 마시던 잔을 급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한국 정치인들과의 유착을 강하게 반대해온 경환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금전적인 지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양 대선캠프의 경제정책을 지지하는 선에서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고 합니다. 잭에겐 절대 개입하지 말고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정부 여당보단 야당의 집권이 우리에게 유리하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경환은 내려놓은 술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딕 체니를 내쫓기 위해 미국 대선에 개입했지만, 한국은 상황이 달랐다. 미국과 밀착할 야당후보보다는 어느 정도 미국과 불협화음을 보일 여당후보의 집권이 경환이 준비하는 십 년 대계를 위해선 좋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우린 이방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저히 중립을 고수하고 일절 개입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그건 그렇고, 박화수 이사는 불만이 많을 텐데, 부회장님이 좀 잘 다독여 주십시오.”

    “잘 설명했습니다. 한동안 고민하더니, 다음 달부터 출근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SHJ-화성플랜트가 SHJ엔지니어링에 합병되면서, 애초 예상됐던 그룹기획조정실장이 아닌 L & K 재단 이사로 박화수를 발령했다. 경환의 뜻을 오해한 박화수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었다. 경환은 그런 박화수를 휴스턴으로 불러들여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큰 계획의 상세히 설명해준 후에야 박화수를 설득할 수 있었다.

    “심 본부장은 아직 햇병아리입니다. 박화수 이사 같은 브레인이 중심을 잡아주지 않는다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나마 박 이사가 이해를 해줘 다행입니다.”

    퇴근 시간은 이미 훌쩍 지나버렸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SHJ타운 서쪽으로 붉은 태양이 화려한 노을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젠장, 조지, 이 망할 자식.”

    딕의 대선 실패와 홀리버튼의 지원중단은 블랙워터의 자금줄을 압박하며 어렵게 키워 놓은 블랙워터는 공중분해 돼 버렸다. 믿었던 조지 브라운이 SHJ시큐리티로 자리를 옮기면서 쓸만한 인원들이 빠져나가자 더는 블랙워터를 운영할 수 없었다. 알콜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버티는 에릭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에 앉아 술병을 나발 불고 있었다.

    “앞에 앉아도 되겠소? 에릭 프린스 씨.”

    에릭은 눈만 치켜들어 중절모를 깊게 눌러쓴 사내를 죽을 듯 노려보았다. 에릭은 긴 다리를 앞 의자에 걸쳐 자리에 앉으려는 사내의 행동을 제지했다.

    “죽기 싫으면 꺼져.”

    “후후, 예상대로 입이 무척 지저분하구먼. 난 좀 앉아야겠네.”

    사내의 행동은 빨랐다. 에릭이 발을 들어 사내를 제지하려 했지만, 사내는 그런 에릭의 행동을 한 손으로 가볍게 거두며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에릭은 물 흐르듯 한 사내의 움직임에 눈을 번뜩였다.

    “사람 무안하게 뭘 그리 노려보나. 술도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은데 내가 술 한잔 사도 되겠지?”

    “당신 누구야?”

    이미 자신의 이름까지 파악할 정도라면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에릭의 눈이 사내의 눈과 마주쳤지만, 사내는 에릭의 시선을 바라보며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줄 끊어진 블랙워터가 해체된 걸 아쉬워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해 두지. 한동안 잘 나가던 에릭 프린스가 이런 허름한 술집에서 자신을 썩히고 있을 줄 나도 몰랐어.”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돌려대다 명줄 끊어진 인간들이 많다는 걸 알아야 할 거야.”

    “하하하, 지금 상태로 총이라도 제대로 잡을 수 있겠어?”

    에릭은 끓어 오르는 분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사내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미소만 흘리고 있었다.

    “워워, 위세가 대단하군. 이러다 눈먼 총알에 맞아 비명횡사할 수도 있겠는걸? 내 부탁 하나 들어준다면 자금과 함께 블랙워터를 다시 재건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는데 한번 들어 보겠나?”

    사내의 능글거리는 말에 에릭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걸음을 멈췄다. 아직 에릭의 가슴엔 PMC에 대한 꿈을 완전히 접은 게 아니었다. 새로 놓인 위스키병을 손에 쥔 에릭이 어정쩡한 자세로 사내의 정수리를 노려봤다.

    “허튼수작이라도 부린다면, 이 병이 네놈의 머리에서 터져나가게 될 거야,”

    에릭을 슬쩍 올려다본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서류철 하나를 탁자에 올려 에릭을 향해 밀었다. 한 손으로 서류를 넘기던 에릭은 순간 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현금 천만 불, 블랙워터 재건은 옵션.”

    서류를 끝까지 넘긴 에릭은 어느새 술병을 손에서 풀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현금 3천만 불.”

    “딜. 자세한 내용은 따로 연락하지. 그리고 술값은 내가 계산하고 나가겠네. 좋은 밤 보내라고.”

    재빠르게 술집을 빠져나가는 사내를 에릭은 바라볼 수 없었다. 자신의 꿈을 다시 꿀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에릭은 술잔에 가득 차 있는 위스키를 바닥에 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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