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91화 (168/264)

#191

다시 사는 인생 - 191

“제임스는 떠났나?”

“제임스의 전용기가 방금 이륙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앨 고어는 다니엘의 보고를 한 귀로 들으며 CNN 속보에 집중했다. 자신과 함께 경환이 브리핑룸에서 SHJ퀄컴의 상장과 미국 경기를 일으키기 위한 대규모의 투자를 약속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었다. 추락하는 인지도를 상승시키기 위한 이벤트를 성공한 앨 고어의 가슴 한구석엔 찜찜함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니엘, 제임스 그 친구 말이야. SHJ퀄컴의 상장을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는 기분이 드는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연방거래위원회를 통한 압력도 코웃음 치던 제임스가 순순히 꼬리를 말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사에 대한 투자를 얻어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최대 수혜자는 제임스라고 봅니다.”

다니엘의 객관적인 분석에 앨 고어는 집무실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30년이 넘는 정치 연륜으로 제임스를 밀어붙였다고 생각했었지만, 결과적으론 경환의 전략에 말렸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앨 고어의 입가로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엘론 머스크가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NASA에 대한 올해 예산이 150억 불로 10년 전과 비교해 40% 이상 줄었는데, 신생기업인 스페이스X보단 SHJ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겠나. 제임스 그 친구의 노림수가 기가 막히는군. 대규모 투자로 기업이미지를 상승시키고 실속은 다 가져가니.”

CNN 속보엔 SHJ가 예산 부족으로 허덕이는 NASA에 향후 십 년간 총 50억 불을 지원하고, 지원과는 별도로 NASA와 합작을 통해 상업용 인공위성 100기를 순차적으로 쏘아 올리는 프로젝트를 시행하며, 최종 민간 우주왕복선 개발에 투자하겠다는 발표를 보도하고 있었다. 인공위성 한 기에 1억에서 3억 불이 소요되는 만큼 상상을 초월한 금액일 수밖에 없었다.

속보를 보도하는 기자는 이런 SHJ의 투자로 만성적인 예산 부족에 시달리는 NASA에 큰 환영을 받을 것을 예측하며, 상업용 궤도 운송서비스를 위해 올해 설립된 스페이스X가 SHJ의 물량공세에 버티기 힘들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었다.

“젠장, 소는 농민이 키우고 돈은 상인이 번다더니. 제대로 당한 거 같군.”

“SHJ기술연구소를 인정했다는 게 더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가 대단한 친구라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어. 내가 너무 NASA에 대한 투자에 혹했던 거 같아. 결국은 SHJ의 입지만 키워준 꼴이니.”

앨 고어는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SHJ기술연구소의 연구를 모두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처음부터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달랑 SHJ퀄컴의 상장을 이유로 핵융합로를 포함한 방위산업 연구를 승인해줄 만큼 멍청하지 않았지만, 경환은 반대급부로 러시아항공우주국인 RASA와 협의 중인 상업용 인공위성 프로젝트를 NASA로 돌리겠다는 조건을 추가했다.

최소 2백억 불이 넘어가는 사업을 러시아에 뺏길 수 없던 앨 고어는 현금 지원 50억 불을 추가하는 조건으로 경환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경환의 흔쾌한 동의로 지루했던 두 사람의 머리싸움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앨 고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 전용기 안에서 앨 고어의 사인이 새겨진 서류를 바라보는 경환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휴스턴에 도착한 경환은 귀가를 잠시 미루고 경영진이 소집된 회의실로 급히 들어섰다. NASA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발표돼서인지 텍사스 주 정부는 SHJ의 투자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NASA가 위치한 휴스턴은 항공산업의 메카로 재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며 들떠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휴스턴 시민들은 휴스턴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서슴없이 SHJ를 꼽고 있었다.

“다들 모였습니까?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다 보니 정신이 없으셨을 겁니다.”

3년 전에 이런 대규모 투자 약속이 이뤄졌다면 빠듯한 자금으로 린다부터 반대하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3년 전과는 사정이 달랐다. 매출규모만 봐도 3배 이상의 성장을 했고 매출이익은 250억 불을 넘기고 있었다. 회의실에 모인 경영진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을 넘어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우리가 SHJ퀄컴의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앨 고어가 알면 아마 거품 물고 쓰러질 겁니다.”

“하하하.”

황태수의 농담으로 회의장은 웃음바다로 변했고, 경환은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린다, SHJ퀄컴은 준비를 마쳤습니까?”

“준비는 오래전에 끝냈습니다. SHJ구글과 연관된 기술과 특허는 양도를 마쳤고, SHJ매니지먼트와 SHJ시큐리티와는 20년 장기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경환은 린다가 작성한 기업상장 보고서를 통해 SHJ퀄컴의 사업분야와 SHJ구글과 공동연구된 특허기술을 분산하는 작업을 지시했다. IPO로 SHJ퀄컴의 내부자료가 공개되어야 하는 만큼 서둘러 내부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IPO 신청은 언제가 적격이라고 판단하나요?”

“SHJ퀄컴의 기업가치는 1,600억 불로 추산됩니다. 내년 초가 적기라고 판단되고 35%를 일시에 내놓는 거보단 20%를 먼저 내놓는 게 가장 유리하다는 판단입니다.”

20%만 하더라도 320억 불이란 막대한 금액이 경환의 손에 떨어지지만, 경환은 이를 전부 투자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320억 불이 아니더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돈으로 인해 투자와 기부에 쏟아 붓더라도 넘칠 정도의 돈이 남아있어. 아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 문제는 SHJ홀딩스에서 판단해서 시행하십시오. 그리고 슈미트 사장님, 오성전자에선 반응이 있습니까?”

“우리가 제안한 컨소시엄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오성전자와 금성전자 모두 같은 반응이고 이미 MS와 모토로라, 도시바, T-모바일, AT&T, 스프린트 등은 기술협력과 투자를 역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중국 정보산업부에서 참여를 타진하고 있는데 머리가 좀 아픕니다.”

중국의 검색엔진인 바이두가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자국 검색엔진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SHJ구글에 대한 독과점 조사와 민감한 키워드의 검색을 차단하려는 중국정부의 행동에 맞서 각을 세우고 있었다. 경환은 철면피를 한 중국정부의 행태에 어이가 없었다.

“우선 컨소시엄 기업을 최대한 늘리세요. OS의 소스를 공개하는 이유는 SHJ구글의 지배력을 늘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지배력을 늘리면서도 이익을 확보하는 방안에 대해 연구하시고, 중국 기업의 참여는 당분간 보류시키세요.”

“API(응용프로그램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는 오픈소스로 제공하지만, 독자적으로 개발한 VM(가상머신)은 철저히 닫도록 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선마이크로시스템스에서 API에 대한 저작권 침해를 문제 삼을 수도 있다는 자체분석이 있습니다.”

경환은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인수한 오라클과 구글의 소송전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와의 저작권 문제로 SHJ구글은 독자적인 VM을 개발했지만, API를 오픈소스로 제공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슈미트 사장님, 혹시 선마이크로시스템스를 인수하려면 자금이 어느 정도 소요가 되겠습니까?”

“IT버블 붕괴로 시가총액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50억 불은 되지 않겠습니까?”

적은 금액이 아니었다.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인수가 SHJ에 큰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오라클과의 특허권 분쟁을 사전에 막기 위해선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경환은 손에 쥔 펜을 두들기며 계산에 몰두하고 있었다.

“슈미트 사장님이 개인적인 인연이 있으니 조심스럽게 인수를 제안해 보십시오.”

“회장님, 선마이크로시스템스가 우리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리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굳이 인수를 추진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선마이크로시스템스가 다른 곳에 인수된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입니다. 소송에 우리가 진다는 생각은 없지만, 지루한 소송전으로 인해 피해를 볼 시간이 아까워서입니다.”

이 문제를 일단락지은 경환은 NASA와의 합작 제안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경환이 백악관에서 앨 고어와 피 튀기는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을 때, SHJ는 이미 NASA에 대한 투자와 합작에 대해 검토를 마친 상태였다.

“NASA는 이미 우리의 투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예산이 줄어든 만큼 한 푼이 아쉬운 상황입니다.”

린다의 의견에 고개만 끄덕일 뿐, 시선을 제안서에서 떼지 않던 경환이 두 손을 맞잡으며 기지개를 켰다. 한국에서의 강행군으로 피곤이 덜 풀린 상태에서 회의를 주재하는 자신의 집중력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정리가 잘 되어있네요. 수고했습니다. 린다는 NASA와 협상을 진행하시고, 이 사업을 추진할 인원을 확보하세요. 민간 우주왕복선 개발은 스페이스X와 중복되는 만큼, 초장에 스페이스X를 누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매년 5억 불을 지원하겠다는 우리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더욱이 100기의 위성은 NASA로써는 놓치기 힘든 사업이고요.”

“마지막으로 기술연구소 부분은 앨 고어와 타협을 했으니 눈치 보지 말고 연구에 매진하라고 전달하세요. 자, 고생들 하셨습니다. 급한 사항이 없으면 내일 다시 얘기합시다.”

회의를 마무리한 경환은 집무실을 거치지 않고 서둘러 저택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저택으로 향하는 경환의 옆 좌석엔 하루나가 아닌 미모의 여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빠, 왜 이제 와.”

“아빠, 다녀오셨어요?”

“여보, 고생하셨어요. 한국이 위험하다고 뉴스에서 하도 떠들어서 많이 걱정했어요.”

크리스토퍼의 인사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서자 희수가 달려와 경환의 목에 안겨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집만 한 장소가 없다고, 그제야 긴장이 풀린 경환은 아주 의젓해 보이는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승연이는 왜 안 보여? 이 자식 아직 안 온 거야?”

“뭐가 무서운지 거실에서 통 나오질 않네요. 그나저나 사람을 세워 놓고 뭐하시는 거예요? 인사라도 시켜 줘야지.”

수정의 핀잔에 머쓱해진 경환이 고개를 돌렸고 희수는 경환의 목에 안긴 채, 낯선 여자의 출현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혜리라고 합니다.”

“호호호, 반가워요. 앞으로 도련님 잘 부탁할게요.”

승연의 참석 없이 상견례까지 마치자 경환은 김혜리의 동행을 권유했고, 양가 부모님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김혜리의 목소리에 모습을 드러낸 승연은 얼마나 시달렸던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었다.

“정우하고 희수도 인사드려야지. 작은 엄마 되실 분이야.”

경환의 품에서 내려온 희수는 정우의 손을 잡고 김혜리를 향해 머리를 숙였고 그런 두 아이를 품에 안아 주는 거로 김혜리는 인사를 대신했다. 정우와 희수를 크리스토퍼에 맡긴 경환은 뻘쭘하게 서 있는 승연의 등을 후려치고는 거실로 향했고, 수정은 다소곳해 보이는 김혜리가 맘에 든 듯 손을 잡고 경환의 뒤를 따랐다.

“자, 양가 상견례도 끝났고 부모님들의 승낙도 떨어졌으니, 지금부터 제수씨로 부르겠습니다. 승연이 너는 좋은 의도였다 하더라도 제수씨를 속인 건 속인 거니 따로 용서를 빌어.”

“형이 나서지만 않았어도 내가 잘 설명하려고 했었다고. 악덕기업주도 모자라 남 연애사까지 들쑤시면 어쩌자는 거야? 아니 이건…….”

승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싸늘한 김혜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누가 사고를 치라고 등 떠밀었냐? 자식이 입만 살았어요. 제수씨, 저놈 쉽게 용서해 주지 말고 아주 들들 볶으세요.”

“이번엔 도련님이 백번 잘못하신 거예요. 형님 아니었으면 어쩌실 뻔했어요?”

수정까지 경환을 거들고 나서자, 승연은 사면초가를 느끼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승연을 바라보는 김혜리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승연이 너는 당분간 제수씨하고 이 집에서 머물도록 해. 아주 조용한 구석진 방 내 줄 테니까. 여긴 방음도 아주 잘 되어 있다고.”

“내 집 놔두고 불편하게 여길 왜 있어? 안 그래요, 혜리 씨?”

그동안 승연이 때문에 맘고생이 있었던지 경환은 이 기회에 제대로 앙갚음을 할 생각으로 승연을 몰아세우고 있었고, 승연은 이런 숨 막히는 경환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힘으론 경환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 승연은 김혜리의 동조를 원하며 어색한 시선으로 김혜리와 눈을 마주쳤다.

“감사합니다. 아주버니. 정우와 희수도 예쁘고 여기에서 머물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이 승 연 씨!”

“호호호, 도련님이 임자를 제대로 만났네요.”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김혜리의 대답에 승연은 고개를 꺾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대놓고 아주버니라는 호칭을 쓰는 김혜리가 승연은 무섭게 느껴졌다. 프로그래머로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던 자신의 꿈이 여기에서 끊어지고 있음을 느낀 승연은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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