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8화 (165/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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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88

    오전 7시를 갓 넘은 시간이었지만,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엔 앨 고어를 중심으로 많은 인물이 모여있었다. 조지 부시와의 피 말리는 대선 경쟁을 승리로 이끈 앨 고어는 백악관에 입성하자마자, 민주당 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거스트 기븐스를 NSA 국장으로 임명했다. 대 테러 전문가이기도 한 어거스트는 그 과격함으로 인해 많은 적을 가지긴 했지만, 애국심과 사명감만큼은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미국의 안전을 위해 물불을 안 가리는 성격이었다.

    유일무이한 도청능력을 갖추고 있는 NSA는 작년 항공기를 이용한 테러를 사전에 감지, 어거스트의 지휘 아래 테러 시도 자체를 원천봉쇄함으로써 앨 고어를 만족하게 했지만, 플로리다 주 아메리칸 미디어에서 발생한 탄저균 테러에서 사상자가 생기며 미국을 흰색가루 공포에 몰아넣자 어거스트의 입지는 많이 줄어들었다.

    “기븐스 국장, 톰 클랜시의 TWINS는 결과가 있습니까?”

    “익명으로 톰 클랜시에게 전달된 내용은 확보했습니다. 면밀 조사 중이긴 하지만, 아직 특별한 소스를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항공기 테러를 막는 과정에서 TWINS와의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어거스트는 톰 클랜시를 압박하며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지만, 그 출처에 대한 추적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어거스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통령님, TWINS에 대한 조사는 시급한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TWINS가 결과적으론 부시의 낙선을 도운 만큼 우리에게 적대적인 세력이라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작년에 있었던 항공기 테러와 탄저균 테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빈번해지는 테러에 대해 시급히 대 테러전선을 형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성장과 북한의 핵 문제로 복잡하게 흘러가는 동북아 정세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교가의 베테랑답게 국무장관인 리차드 홀부르크가 고착된 국제정서를 시급히 풀 것을 종용하고 나섰다. 집권 초기 70%에 달하는 지지도는 탄저균 테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경제하락으로 실업률이 증가하자 간신히 50%대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러시아가 대 테러전선에 동참의사를 밝혔고, 영국과 독일이 뒤를 잇고 있으니 대 테러전선 형성에는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문제는 중국과 한국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중국은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군사력 증강에 매진하고 있고, 한국의 김환기 대통령은 지원을 통한 남북대결구도 해소를 외치고 있어 우리와 엇박자를 보이고 있습니다.”

    “페리 장관은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던 윌리엄 페리는 이번 앨 고어 정권에도 국방장관을 이어가며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대북정책관으로 북한의 핵시설을 사찰하기도 한 페리는 심각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94년 제네바 합의로 매년 중유 50만 톤을 공급하고 한국 주도로 경수로원자로를 지어 주고는 있지만, 북한이 핵을 포기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군사력을 당해낼 자신이 없는 북한이 이후 남북관계와 미북관계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카드가 핵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흠, 우선 6자회담으로 북한의 주변국들과의 공조를 기해 봅시다. 이와는 별도로 국방부에선 북한의 핵을 원천제거하는 작전을 만들어 보세요.”

    “대통령님, 군사적 방법은 한국을 넘어 일본의 피해까지도 고려를 해야 합니다. 94년 클린턴 정부에서 공습을 중단한 원인도 이 문제 때문이지 않습니까?”

    “군사적인 대응은 부수적인 사항입니다. 우선은 6자회담에 집중해 주십시오. 국무장관은 한국과 일본과도 이 문제에 대해 미국의 의견을 전달하십시오.”

    윌리엄 페리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입을 닫고는 어거스트 기븐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대통령과 만나기 전, 모종의 거래를 통해 입을 맞춘 어거스트 기븐스는 앨 고어를 바라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SHJ란 기업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앨 고어는 SHJ란 말이 NSA 국장 입에서 나오자 인상부터 구겼다. IT버블이 붕괴하면서 18.5조 불의 시가총액에서 8조 불이 사라졌고, 이것은 기업의 도산과 실업률 증가로 앨 고어의 발목을 확실히 잡아채고 있었다. 이를 타계하는 방안으로 연방거래위원회를 동원해 SHJ의 기업상장을 압박했지만, SHJ는 오히려 MS와 IBM, 인텔과 모토로라까지 동원해 자신의 방침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었다. 또한, 텍사스 주 정부와 휴스턴 시 정부까지 나서 SHJ를 두둔해 SHJ 상장을 통해 주가를 회복하려던 자신의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 촌뜨기인 SHJ가 사고라도 쳤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현재 SHJ 회장인 제임스 리가 한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NSA 장비로도 유일하게 뚫을 수 없는 곳이 SHJ타운과 제임스 리 회장입니다. 한국에 설립된 기술연구소에서 핵융합로와 저온핵융합 실험을 하고 있는데 한국의 국방연구소의 연구진들도 기술연구소에 합류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제임스 리 회장이 한국계이긴 하지만, SHJ는 엄연히 미국기업이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연구에 성공한다면 미국의 기술이라고 보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핵융합 연구는 SHJ 단독으로 성공하긴 어렵다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SHJ가 무기개발에 뛰어들었다면 이건 상황이 달라집니다. SHJ가 유독 막대한 투자를 한국에만 집행하는 것도, 저희는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다.”

    NSA는 SHJ를 뚫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침투를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다. 단지, SHJ시큐리티의 보안능력이 NSA의 능력을 초월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 유일한 성과면 성과였다.

    “이번 한국 대통령은 틀렸습니다. 차기 정권과 의견을 통일할 방법을 연구해 보세요. 그리고 제임스 리의 한국 일정을 감시하면서, SHJ가 무기개발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강한 경고를 보내세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임스 리는 공화당 색채가 강하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자칫 우리가 강하게 나간다면 공화당의 반발을 초래할 수도 있으니, 대통령님께서 제임스 리 회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해서 먼저 만나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계륵 같은 존재인 SHJ가 앨 고어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SHJ는 IT 공룡이었던 MS의 320억 불 매출과 순이익 60억 불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였다. 진정한 IT 공룡으로 자리매김한 SHJ는 자신도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민주당 일색인 IT 산업에서 공화당 색을 띤 SHJ를 품에 넣기 위해 앨 고어의 움직임이 바빠지고 있었다.

    “제임스 리가 막 도착했습니다.”

    “아직 내부 감청은 확인이 안 되는 건가?”

    “갑자기 신호가 죽은 뒤로는 모두 먹통입니다. 요원을 내부에 파견했으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 경환의 한국방문에 맞춰 급히 한국으로 파견 나온 스미스는 이를 갈고 있었다. SHJ를 보안시스템을 깨기 위한 작전을 담당한 스미스는 NSA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에셜론 프로그램으로도 SHJ의 보안시스템을 깨지 못하자 스스로 한국까지 경환을 따라나섰다. 이미 NSA는 SHJ의 보안시스템에 자극받아 에셜론을 업그레이드 한 엑스키스코아 프로그램을 개발 중에 있었다. SHJ와 NSA의 막고 뚫는 싸움은 프로그래머들의 자존심 대결로까지 발전하며 지금도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저, 저기 한국 경찰이 다가옵니다.”

    스미스의 인상이 구겨졌다. 동맹국이긴 하지만, 한국에서의 불법 감청이 걸리기라도 한다면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운전석으로 연결된 조그마한 창틈으로 밖을 내다보던 스미스는 욕지거리를 뿜어대기 시작했다.

    “젠장, 어서 차량 빼, SHJ시큐리티 놈들한테 이미 발각됐어.”

    경찰과 함께 서너 명의 사내가 택배 차량으로 다가오는 걸 확인한 스미스는 운전을 담당한 요원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좀처럼 허점을 들어내지 않는 SHJ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스미스는 헤드셋을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

    “회장님, 내부도 모두 정리되었습니다.”

    접대부로 보이는 여자가 SHJ시큐리티 요원들에 의해 저지당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경환의 곁으로 알이 귓속말을 전했다. 고개만 끄덕인 경환은 한복을 차려입은 여주인의 안내에 예약된 방에 들어섰다.

    “어이구, 이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우리 먼저 시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산에 들렀다가 오느라 제가 좀 늦었습니다. 후래자 삼배라 했으니 석 잔을 먼저 마시겠습니다.”

    자리에 앉은 경환은 서둘러 잔 세 개에 술을 따르고는 술 석 잔을 입에 부어버렸다. 자신이 약속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시간에 늦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경환의 방문에 맞춰 오성그룹 이형우는 만남을 제안했고 이 자리엔 어울리지 않지만, 김우상 대통령 비서실장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하하하, 역시 젊다는 게 좋은 거군요. 그나저나 작년에 SHJ가 선보인 세틀러-6에 제가 된통 당했습니다.”

    이형우가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에 대한 막대한 투자로 경기를 살리는데 큰 몫을 담당한 SHJ였지만, 김우상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경환은 김우상의 살갑지 않은 표정을 무시한 채 경환은 이형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십니까? 오성전자 때문에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세틀러-6으로 겨우 수지타산은 맞췄지만, 오성이 또 무슨 모델로 승부를 걸어올지 제 똥줄이 다 탑니다.”

    “이 회장님의 똥줄을 더 타게 하기 위해선, 컴페니언 시리즈를 잡아야 하는데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하하하.”

    이형우는 입맛을 다셨다. 잡을 듯 잡히지 않는 SHJ는 이미 자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경쟁과 협력이 반복되면서 두 회사는 상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고, 경환의 손엔 오성전자의 지분 7.5%가 쥐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형우도 나이 어린 경환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기술연구소의 연구는 잘 진행이 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술잔만 기울이던 김우상이 한마디 내뱉었다. 경환은 그제야 김우상의 얼굴이 밝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김우상에 술을 따라 부은 경환은 이번 정부와 선을 가를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대북지원정책으로 대현그룹이 휘청이기 시작했고, 미국과도 엇박자를 보이고 있어 SHJ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성과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몇 년 안으로 좋은 결과가 있지 않겠습니다. 아는 사람이 적어야 뒤탈이 없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님도 보고를 받지 않기로 하셨으니 실장님께 보고를 드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이 회장 말에 동감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오성도 참여해야 했는데 아쉽군요.”

    핵융합로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높지 않게 판단한 이형우는 초전도도체 개발에 집중하며 핵융합로 개발과 관련된 오성중공업의 연구원을 SHJ로 넘긴 상태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 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대통령을 거론하자 김우상의 얼굴은 벌게지며 연거푸 술을 입에 털어 넣기 시작했다. 이형우가 그런 김우상을 바라보며 슬쩍 인상을 찡그리고는 경환에게 질문을 던졌다.

    “SHJ가 모바일OS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문이 여러 곳에서 들었습니다. 애플도 아이팟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모바일OS에 주력하고 있다고 하고요.”

    “사실입니다. 그거 때문에라도 회장님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이형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성전자 내부에서도 모바일OS에 대한 검토를 했었지만, 현재 3세대 휴대폰이 대세인 상태에서 성공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HJ라면 상황이 달랐다. 단, 10년 만에 MS를 뒤로 보내고 거대공룡으로 자리 잡은 SHJ가 전면에 나선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이형우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이형우는 경환의 다음 대답을 기다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올 연말이면 좋은 소식을 발표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 전에 SHJ구글에서 개발한 모바일OS와 관련해 컨소시엄을 구성할 생각입니다. 이 컨소시엄을 통해 모바일 기기의 공개 표준을 정하고 모바일 플랫폼을 발표할 것입니다. 이미 모토로라, 스프린트, T-모바일, 도시바 등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회장님께서 이 컨소시엄 구성을 맡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SHJ 내부적으로도 컨소시엄 구성 문제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었다. 죽기 살기로 개발한 OS를 컨소시엄화해 이익을 놓치면 안 된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우후죽순으로 개발될 OS로 인해 치열한 경쟁이 발생하는 거보다는 컨소시엄을 통해 SHJ구글이 개발한 OS를 기기의 표준으로 삼고 구글스토어와 구글라인 구글맵 등 SHJ구글이 개발한 응용프로그램과 SHJ퀄컴의 칩셋을 장착하는 조건과 OS의 업데이트를 통해 장악력을 높이며 이익을 창출하자는 에릭의 의견에 경환이 손을 들어주었다. 이형우는 경환의 제안에 깔린 복선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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