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5화 (162/264)

#185

다시 사는 인생 - 185

백악관의 주인을 다투는 개표작업이 시작되면서 숨 막히는 승부가 계속되고 있었다. 미국 선거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승자 독식이라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각 주의 유권자 득표수를 집계한 후 승리하는 후보가 각 주에 배정된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제도였다. 따라서 전체 득표수에 앞서더라도 확보한 선거인단 수가 적다면 선거에 패배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막판 뒤집기를 시도하며 무섭게 따라붙은 부시는 남부 주들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중서부 주, 그리고 로키산맥을 끼고 있는 주와 함께 중북부 주들의 선거인단을 독식하며 기세 좋게 출발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자신의 근거지인 테네시 주에서조차 패배한 앨 고어는 서부 주들과 북동부 주들에서 승리하며 총 선거인단 538명 중에서 255명을 확보해 246명을 확보한 부시를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개표가 진행 중인 다른 주들은 결과에 큰 영향을 줄 수 없었지만, 25명의 선거인단 가지고 있는 플로리다 주의 개표는 문제가 달랐다. 플로리다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후보가 백악관의 주인이 결정되는 만큼, 공화, 민주 양 진영과 모든 언론사의 시선이 플로리다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앨 고어의 대선캠프엔 숨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다니엘 지금 상황이 어떤가?”

넥타이를 반쯤 푼 앨 고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유세 초반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던 대선은 랄프 네이더의 선전과 부시의 공세에 추격을 당한 상태로 자신의 정책적 실수가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0.1% 앞선 상황입니다. 아직 결과를 예측하긴 어렵습니다. 랄프 네이더가 2%의 득표를 가져간 게 결정적입니다.”

“계속 결과를 알려주기 바라네. 마이클, 알아보는 건 소식이 있는 건가?”

“죄송합니다.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FBI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조직이 국내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추적이 힘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FBI의 은밀한 내사에도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자 앨 고어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앨 고어는 선거 막판에 이르러 자신의 개인 메일주소로 밑져야 본전이란 메일을 받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대선에 승리하려면 모든 역량을 플로리다에 집중하고 플로리다 발전 공약을 내세워 표심을 확보하지 않으면 이번 대선의 승리는 공화당이 될 거란 내용이었다.

“마이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조직을 반드시 알아내야 하네. 이번 대선을 보면 잘 짜진 체스판을 보는 거 같아. 난 단지 체스판의 기사에 불과하고 말이지.”

“너무 비약이 심한 거 같습니다. 부통령님. 그러나 녹색당의 선전이나, 플로리다가 대선의 향방을 가르게 될 거란 예측은 정말 소름이 돋긴 합니다.”

“마이클 자네의 말이 맞아. 우리가 플로리다를 등한시했다면 백악관은 조지 부시의 차지가 되었을 테니 말이지. 정말 소름이 돋아. 이런 조직이라면 반드시 내 곁에 둬야 할 거야. 그러기 위해선 그 조직의 실체부터 파악해야 하네.”

티비 화면으론 플로리다의 선거가 혼전 양상을 띠는 가운데 앨 고어가 근소하게나마 앞서 가고 있다는 보도가 쉴 새 없이 나오고 있었다. 앨 고어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메일의 내용을 백 퍼센트 신뢰했다기보다 앞 전 보내왔던 정보가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맞아떨어지는 것을 봐 왔기 때문에 앨 고어는 찜찜한 기분으로 마지막 유세를 플로리다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선 공약에 포함되지 않은 40MW 규모의 태양광 발전소 건립을 약속하고 존 F. 케네디 우주센터를 확장, 텍사스 주 휴스턴과 함께 우주산업을 선도하는 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티비에 눈을 떼지 못하는 앨 고어에게 다니엘이 다가왔다.

“격차는 아직 0.1%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유세 마지막을 플로리다에 집중하지 않았다면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을 거 같습니다. 8천 표밖에 차이가 안 날 줄이야.”

다니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을 시간조차 없어 보였다. 플로리다의 전체 유권자 수가 8백만이니 8천 표 정도는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격차였기에, 만약 급조된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다면 플로리다는 부시 손에 떨어졌다는 것을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게 말일세. 보이지 않는 조직이 대선에 방관했거나, 부시 손에 정보를 쥐여 줬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지.”

앨 고어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대선 전략을 수립하고 기획한 대선 캠프의 수많은 인재도 이 정도로 정확한 예측은 할 수 없었다.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대선을 좌지우지한 조직이 자신과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지 지금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부시보단 자신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

“와!”

초조하게 플로리다의 집계 결과를 지켜보던 직원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넥타이를 풀어 제쳤다.

“부통령님, 아니 대통령님. 플로리다에서 우리가 이겼습니다. 하하하.”

CNN에선 플로리다의 개표가 사실상 마무리 되었고 0,1% 차이로 앨 고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속보로 방영되고 있었다. 앨 고어는 입을 굳게 닫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캠프를 지원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일일이 악수와 함께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예상대로 앨 고어가 백악관 주인이 되었습니다.”

“네오콘이 상당히 당황하겠군요. 엄청난 물량공세에도 딕을 백악관에 보내지 못했으니까요. 우리가 딕의 후원자란 소문이 있으니 당분간 몸을 좀 사려야겠네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 티비에서 보도되는 대선 결과에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경환에게 알이 조용히 다가왔다. 앨 고어의 축하 인터뷰에 이어 부시 진영이 재검표 요청을 했다는 소식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었다.

“재검표가 쉽게 이뤄질까요?”

“글쎄요. 재검표 요청을 철회하지 않을까요? 플로리다는 부시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네오콘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곳입니다. 선거용지만 보더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죠. 부시가 멍청한 놈이 아니라면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경환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곳과 달리 플로리다의 투표용지는 맨 위에 기재된 부시는 찍지 편했지만, 두 번째로 명기된 앨 고어를 찍기 위해서는 세 번째에 기표해야 하는 이상한 구조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앨 고어의 표를 분산시키기 위해 네오콘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있어 재검표가 받아들여진다면 이 문제 또한, 부각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기에 경환은 재검표가 쉽지 않다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하하, 디푸어 사장도 제법 경영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 다들 자리에 앉읍시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알 이 녀석 때문에 천성에 맞지도 않은 넥타이를 매느라 아주 죽을 지경입니다.”

SHJ시큐리티가 카일 디푸어를 사장으로 임명되면서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다. 경환의 직속으로 있는 SHJ시큐리티는 돈 먹는 하마라는 비판 속에도 일절 외부 영업을 금한 채, SHJ타운의 외곽경비와 각 건물의 보안, 경호에만 치중하고 있었다. 카일이 죽는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자, 알이 경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부족한 점은 없나요?”

“회장님도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정직원이고 복지가 잘 되어있다가 보니, 현역 특수부대원들의 입사 문의가 끊이질 않습니다. 오죽하면 국방부에서 채용을 자제하라는 공문까지 보냈겠습니까?”

“두 분의 노력이라고 봅니다. 제가 SHJ를 떠나기 전엔 SHJ시큐리티에 대한 지원은 변함이 없을 거니, 디푸어 사장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NAVY SEAL과 NSA에 뒤처지지 않을 장비와 조직으로 만들어 보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번 대선에 개입하면서 경환은 SHJ시큐리티의 장비와 인적자원에 만족하고 있었다. 특히 작전을 기획하고 실행한 정보팀의 능력은 그동안의 투자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환은 SHJ시큐리티 직원의 복지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까다로운 선발방식을 통과해 육 개월의 수습기간을 거친 직원들에겐 최우선적으로 SHJ타운 입주가 허용되었다. 또한, 훈련수당과 생명수당을 지급해 다른 계열사 직원들과의 급여차이를 좁혀주어 맞벌이가 아니더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SHJ시큐리티에 취업을 원하는 현역군인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흠, 디푸어 사장이 보기에 한국에서 채용된 인원들은 어떻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익히 말은 듣고 있었지만, 장비를 다루는 솜씨나 팀 작전 등 NAVY SEAL의 현역 대원들과 견줄만합니다. 오히려 일대일 전투에선 기존 대원들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입니다.”

경환은 카일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의 열세를 제외한다면, 한국 특수부대는 미국 특수부대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다행이군요. 그럼 한국의 인원들을 확대해도 된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문제없겠습니까?”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어 소통에 힘들어하는 대원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한국 인원을 늘리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좋습니다. 언어는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보고 영어 교육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십시오. 한국에 SHJ타운이 건설되면 SHJ시큐리티의 활동범위도 한국까지 넓혀져야 합니다. 현재 인원으론 불가능할 테니 직원 채용을 늘리는 방안을 만들어 보세요.”

현역군인을 스카우트하기 힘들었지 퇴역군인 중에서 인원을 모집하는 건 큰 어려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카일과 알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SHJ시큐리티에서 요구하는 인성 문제를 통과할 수 있는 인원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미국사회에서 국가가 아닌 SHJ에 충성을 맹세할 인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무기 휴대가 불법이다 보니 한국정부와 아직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지난번 현 대통령과의 협상에서 긍정적 검토를 약속받았습니다. 서산지역이 한국 32사단 관할이니 SHJ타운의 외곽을 32사단에 맡기면서 일부 지원을 해 준다는 조건으로 협상해 보세요.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파견될 직원은 2/3 이상 한국에서 채용된 인원을 선발하시고요. 그건 그렇고, 지시한 정보팀 확대는 잘 이뤄지고 있습니까?”

“FBI, CIA, NCSI(해군수사국), CID(육군수사국)에서 퇴직한 정보통들과 일대일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만, 각 기관의 역공작에 말릴 수도 있어 검증작업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결과를 보고드리겠습니다.”

전생과 달리 앨 고어가 백악관을 차지하면서 국제정세는 경환의 기억과는 다르게 흘러갈 수 있었다. 남들보다 한발 앞서 정보를 가진 자만이 미래를 예측하고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경환은 정보팀의 확대를 지시했었다. 아울러 백악관 입성을 성공한 앨 고어가 연방거래위원회를 다시 움직여 SHJ의 기업공개를 추진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경환은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SHJ를 전방과 후방에서 지킬 곳은 SHJ시큐리티밖에는 없습니다. 두 분만 믿습니다.”

경환의 신뢰에 카일과 알의 표정은 굳어졌다. 경환이 아니었다면, 에릭이 만든 블랙워터에서 용병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었다. 카일과 알은 경환의 신뢰에 부담감을 느끼며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보, 피곤하시죠? 물 받아 놨으니 몸을 먼저 담그세요.”

“역시 마누라밖에 없네. 내 맘을 알아주는 사람은.”

현관을 열어 경환을 맞이하는 크리스토퍼 뒤로 밝은 웃음을 짓는 수정이 서 있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경환은 수정을 볼 때마다 찐한 성적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경환은 크리스토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수정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수정은 경환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고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들였다.

“아빠, 나 많이 보고 싶었지?”

“아빠, 다녀오셨어요? 저, 다음 주에 야구시합이 있는데…….”

2층에서 뛰다시피 내려온 희수가 경환의 품에 안기고 정우가 말을 흐렸다. 지난번 미키와의 싸움으로 일주일 동안 티비 시청이 금지된 정우는 아직 경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직 후보이긴 하지만, 첫 야구시합에 참가한다는 걸 경환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경환은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첫 야구시합인데,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지. 엄마, 희수 모두 데리고 갈 테니까 열심히 해봐.”

“네! 열심히 할게요.”

그제야 환한 얼굴을 한 정우가 넓은 거실을 뛰기 시작했다. 정우가 뛰기 시작하자, 이유도 알지 못하는 희수가 경환의 품에서 내려 덩달아 정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참, 아빠. 제니퍼가 또 놀러 오겠다고 하는데, 오지 말라고 할까요? 귀찮은데.”

한참을 뛰어다닌 정우가 숨을 헐떡거리며 제니퍼에 대한 말을 꺼내자, 경환은 영문을 몰라 수정을 바라봤다.

“멜린다가 전화 왔었어요.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고 제니퍼가 휴스턴으로 놀러 가자고 떼를 써서, 식구들과 며칠 묵었다 가도 되겠느냐고 하더라고요. 오겠다는 사람 말릴 수도 없어서 그러라고 했어요.”

빌과 자꾸 엮이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앨 고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만큼 MS와의 협력이 한층 더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환은 수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환은 정우와 희수를 양팔에 안은 채, 2층 계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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