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4화 (16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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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84

    샌디에이고의 출장에서 의외의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경환은 JWH 인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황정욱은 미 해군과의 협상에 돌입했다. 미 해군에선 저온핵융합 연구를 담당하는 JWH의 이탈에 난색을 보였지만, 위약금 외에 천만 불을 더 지급하겠다는 SHJ의 의사를 확인하고 이를 승인해 버렸다. SHJ 3천4백만 불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JWH와 미 해군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데 성공하고 JWH에 인수금액으로 1억 불을 제시했다. 이미 대략적인 합의를 마친 상태에서 황정욱은 직원들을 설득, SHJ와의 합병에 걸림돌을 제거하는 한편, 직원들을 한국과 휴스턴으로 선별해 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미 대선은 녹색당 랄프 네이더의 선전에 혼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시의 선전이라기보다는 민주당의 표를 갈아먹는 랄프 네이더로 인해 앨 고어의 지지도가 2% 하락하는 사태가 벌어져 민주당 대선 캠프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민주당 대선 캠프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을 무렵, SHJ도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치솟던 SHJ퀄컴의 성장세에 빨간 신호가 켜지고 있었다. 퀄컴과 구글의 경영진이 모두 참석한 그룹 회의실엔 침묵으로 조용했지만, 회의실 중앙에 자리 잡은 경환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다들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해도 기울면 지는 법이지만, 그러나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해는 또 떠오릅니다. 기운들 내세요. 원인을 먼저 분석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회장님. 컴페니언의 독주는 지속하고 있지만, 오성전자와 노키아의 휴대폰 신형모델이 의외로 강세를 보이며 세틀러의 판매 점유율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오성전자는 중국과 동유럽의 판매망을 재구축하고 공격적인 저가판매가 소비자를 움직이고 있고, 노키아는 자신의 텃밭인 유럽과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기존 노키아 휴대폰을 사용하는 고객에 한해 정상금액의 80%로 교환을 해 주는 정책이 먹히고 있습니다.”

    새로운 디자인과 기능을 선보이며 휴대폰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던 세틀러 시리즈는 기존 강자인 노키아와 후발주자인 오성전자의 추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세틀러의 새롭고 신선한 디자인과 기능은 기존 휴대폰업계의 신형모델에 참고자료를 제공하며 기술의 격차를 점점 좁혀가고 있어 세틀러의 독주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오성전자와 노키아가 우리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고 있네요. 원인 분석이 끝났다면 대책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SHJ퀄컴과 SHJ에이전트에서 준비한 대책을 보고해 주십시오.”

    “올해 출시할 세틀러-5는 원터치 슬라이드 형태로 카메라의 화소를 110만으로 상향했습니다. 오성전자와 노키아, 모토로라가 저희가 같은 시기에 새 모델을 내놓는 만큼 경쟁은 심화될 거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세틀러-5보다는 내년 출시할 세틀러-6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IMT 2000의 상용화를 2002년으로 잡고 있지만, 이것을 내년으로 앞당기는 방안을 협의 중입니다. 그 시기에 맞춰 다시 한 번 세틀러를 도약시키는 기회로 삼을 계획입니다.”

    보고를 마친 어윈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경환의 아이디어로 세틀러가 제작되었지만, 세틀러-4는 경환의 조언이 첨가되지 않은 퀄컴의 연구진에 의해 개발된 작품이었다. 무거운 심정으로 자책감에 빠져있는 어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환이 입을 열었다.

    “물론 우리가 빠른 성공에 자만한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감마저 상실해선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제이콥스 사장님이 말씀하신 대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아울러 판매방식에도 변화를 줘야 할 거 같은데, 노키아가 세틀러를 벤치마킹했다면 우리도 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김창동 사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년 IMT 2000 상용화에 맞춰 선보일 세틀러-6에 적용을 검토하겠습니다. 새로운 형태의 휴대폰인 만큼 점유율 상승에 큰 몫을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노키아보다는 오성전자를 주목해야 합니다. 기반이 튼튼한 오성전자가 디자인 쪽에 막대한 투자를 집행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오성그룹의 해외판매망을 이용해 공격적인 판매전략을 취하고 있어, 우리의 잠정적 경쟁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국내외 판매를 담당하는 SHJ에이전트 사장인 김창동은 경환의 질문을 받자 빠르게 답변을 시작했다. 휴대폰이 3세대 서비스로 넘어가더라도 경쟁의 심화는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환은 고민하고 있었다. 연말 출시 예정인 세틀러-5는 현상유지를 하고 세틀러-6으로 승부를 봐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퀄컴과 에이전트는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세틀러-6을 대비해 마케팅 계획을 전면 수정하십시오. 슈미트 사장님. 신규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두 가지 분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수한 동창찾기는 플랫폼을 전면 수정해 다음 달 서비스가 되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바일 OS는 앤디 루빈의 합류로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내년 말이면 그 성과를 보고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애플이 쫓아오고 있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다그친다고 모바일 OS가 하늘에서 떨어질 수는 없었다. SHJ플랜트와 SHJ엔지니어링이 꾸준함을 무기로 휴스턴의 경쟁상대인 KBR을 넘어서고 있는 데 반해 SH퀄컴은 하루가 다르게 치고 올라오는 오성전자와 노키아의 반격을 힘겹게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린다, 우리의 가용자금이 어느 정도입니까?”

    “한국에 투자된 10억 불과 JWH의 인수자금을 계산한다면 106억 불입니다. 계획된 투자분과 유동자금을 뺀다면 50억 불의 여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건설 중인 SHJ타운과 앞으로 SHJ기술연구소에 투자될 금액을 생각한다면 여유자금은 계속 확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금에 대한 걱정하던 경환은 피식 웃음을 보였다. 등록금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에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금액을 가지고도 자금 걱정을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 다들 기운 냅시다. 우리가 당장 망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위기를 알고 준비를 하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이럴수록 한 발짝 뒤로 물러나 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봅니다. 각 계열사는 연구개발이 중단되지 않도록 투자를 과감히 진행하세요.”

    경환의 노력으로 무거운 회의실 분위기는 많이 풀려 있었다. 경환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린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어떻습니까? 잠잠해진 거 같은데.”

    “그게 좀 이상합니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더니 물밑접촉도 끊어졌습니다. 대선의 향방을 지켜보는 거 같기도 한데,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기업공개를 할 시기는 아니지만, 우리도 대책은 세워 놉시다.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방식의 기업공개 안을 검토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SHJ기술연구소에 투입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기업공개는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 오늘은 이만 마칩시다. 밑에 직원들 주눅이 들지 않게 너무 인상 쓰고 다니지 마시고, 활기차게 일합시다.”

    회의를 마친 경환은 밝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경환이 자리를 비우자 어윈과 에릭, 김창동은 후속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지만, 경환은 모른 척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집무실에 돌아온 경환은 어지럽게 판이 벌어지고 있는 대선상황을 살피기 위해 CNN에 채널을 맞췄다. 각 지역을 돌며 유세가 한창인 대선은 앨 고어의 우세가 예상되는 가운데 부시의 반격이 심상치 않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회장님, 랄프 네이더의 선전에 앨 고어가 당황하는 거 같습니다.”

    책상에 걸터앉아 뉴스를 시청하던 경환의 곁으로 다가온 알이 말을 건넸다. 언제나 과묵하며 경환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 적이 없던 알이 먼저 말을 건네오자 경환은 티비를 끄고 정면으로 알을 마주했다.

    “소비자 권위와 환경문제로 자신을 공략하니, 앨 고어도 죽을 맛일 겁니다. 이 정도면 우리가 녹색당을 지원하고 있다는 뉘앙스는 풍긴 거 같은데, 다음 계획을 진행해도 무리가 없을 거 같은데, 알 생각은 어떻습니까?”

    경환은 랄프 네이더와의 연결점이 없었다. 앨 고어 스스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랄프 네이더로 인해, 지원이 흘러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유도한 것이 주요했다. 똥줄이 탄 앨 고어라면 내심 다음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판단한 경환은 대선의 화룡점정을 찍기 위해 마지막 칼을 빼 들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앨 고어의 보좌관인 마이클 펠프만이 우리를 추적하기 위해 FBI를 비밀리에 동원한 거 같지만, 결코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할 겁니다.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앨 고어도 우리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고, 회사의 이익을 위해선 딕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알의 말이 맞습니다. 앨 고어나 딕이나 그놈이 그놈이죠. 딕과 거래를 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결국 저는 딕과 네오콘의 호구 짓만 하게 될 겁니다. 그럴 바에야 일면식 없는 앨 고어와 새롭게 관계를 맺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거뿐입니다.”

    알은 질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가볍게 고개를 숙인 알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알의 말처럼 딕의 백악관 입성을 지지했다면, 이라크 재건사업으로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었겠지만, 하이에나 같은 딕의 손아귀에서 돈주머니 역할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띠리리, 띠리리.’

    휴대폰 화면으로 수정의 이름이 뜨는 것을 확인하고 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사모님께서 웬일이야? 전화를 다 주고. 그새 하늘 같은 서방님이 보고 싶기라도 한 거야?”

    ‘여보,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정우가 학교에서 친구랑 싸워서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정우가 왜 싸워? 자세히 말 해봐.”

    캐나다 출신의 애플의 프로그래머였던 기욤 베스는 SHJ구글의 초창기 멤버로 참여하며 지금은 구글스토어의 팀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SHJ타운으로 이주한 후, 아내의 내조를 받아가며 풍족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속상한 심정에 위스키를 마시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기욤은 눈 주위가 퍼렇게 멍들고 다리에 깁스한 미키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미키가 학교에서 싸움을 해 다리 인대가 늘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분을 참지 못해 당장에라도 달려가 미키를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의 볼기를 칠 생각이었지만, 그 녀석의 부모가 SHJ 회장인 경환이란 사실을 알고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여보, 미시즈 리가 직접 사과를 했어요. 사정을 알아보니 미키가 먼저 정우를 놀렸다고 하더라고요. 더는 문제 삼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재키, 아무리 그래도 애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절대 용서가 되질 않아. 난 지금 그 집에 쳐들어가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바보스럽다고.”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당당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자괴감으로 기욤이 마신 위스키는 어느새 반병을 넘어가고 있었다.

    ‘띵동, 띵동.’

    “누구세요?”

    “미키네 집이죠? 오늘 학교에서 미키와 싸움을 벌인 정우의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 문을 열어 주십시오.”

    문밖에 서 있는 경환과 수정을 발견한 재키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경환이 직접 찾아올 줄 상상도 하지 못한 재키는 남편인 기욤을 찾았고, 경환과 수정은 정우를 앞세워 집안에 들어섰다. 위스키를 마시며 화를 삭이던 기욤은 경환의 등장에 오르던 취기가 사라짐을 느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들놈을 대신해 사과 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제 아들도 잘못한 부분이 있더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스터 기욤 베스. 정우 너는 뭐하는 거야? 친구한테 사과해야지.”

    경환의 노기 섞인 명령에 정우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앞으로 걸어 나와 미키 앞에 섰다.

    “미키, 널 다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내 사과를 받아 줘.”

    고개 숙인 정우의 모습에 의기양양해지려던 미키는 아빠와 엄마의 따가운 눈총에 급히 얼굴을 정우에게도 돌렸다.

    “나도 널 원숭이라고 놀려서 미안해. 앞으론 절대 놀리지 않을게.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자식이 맞는 거보단 때리는 게 낫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정우에게 화를 내긴 했지만, 경환의 마음 한구석엔 어느새 이만큼 자란 정우에 대한 대견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함부로 힘을 쓰면 안 된다. 아빤 정우가 약자를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는 친구에게 먼저 손을 내민 정우 네가 자랑스러웠다. 참, 아빠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싸움은 어디서 배운 거니?”

    초등학교 1학년의 싸움치고는 미키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정우는 경환의 질문에도 눈을 바닥으로 향한 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누군가에 의해 단단히 교육을 받은 거 같은 느낌을 받은 경환은 다시 한 번 정우를 다그칠 생각이었다.

    “아빠, 알 아저씨가 가르쳐줬어. 알 아저씨가 나하고 오빠하고 배워야 한다고 그랬어.”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경환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알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굳어있는 알의 몸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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