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다시 사는 인생 - 183
샌디에이고 공항은 검은 슈트에 짙은 선글라스를 낀 사내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선 통신기를 귀에 꽂은 채 주위를 살피는 사내들 사이로 도수 높은 안경을 낀 두 사내가
“지사장님, 퀄컴이 휴스턴으로 이전한 후부터 샌디에이고의 민심이 좋지 않은데, 회장님께서 갑자기 오셔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SHJ가 인수하지 않았다면 퀄컴이란 이름은 예전에 사라졌을 수도 있어. 짧게 머물다 가시니까, 자네는 다시 한 번 일정을 확인해봐. 이번 JWH와의 만남을 위해 그룹 전체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거 자네도 알잖아.”
퀄컴이 휴스턴으로 이전하면서 샌디에이고의 민심은 SHJ에 등을 돌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틀러의 판매실적은 샌디에이고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SHJ는 샌디에이고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SHJ퀄컴의 미서부지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한번 떠난 민심은 쉽게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제 집사람이 SHJ타운으로 언제 입주하느냐고 쪼는 통에 아주 죽을 맛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년에 순환보직이 시행된다니 좀 기다려 보자고.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걸 보니 전용기가 도착한 거 같은데, 빨리 가 보세.”
경호원들에 둘러싸인 채로 경환의 모습이 입국장에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하게도 경환의 품엔 잠든 희수가 안겨 있었다. 정우가 학교에 다니고부터 희수의 생활은 단조로워질 수밖에 없었고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부리는 바람에 경환은 희수를 데리고 출장에 동행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수고 많으시네요. 잭 오닐 지사장님. 이쪽은 미스터 딘 스톡웰 맞죠?”
“그렇습니다. 회장님. 어서 차에 오르십시오.”
경환이 자신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먼저 악수를 청하자, 두 사람은 감격하며 경환의 손을 마주 잡았다. 2만 명이 넘는 직원 중에서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샌디에이고에 처박혀 있는 자신들을 그룹 회장인 경환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의 고생을 잊게 하여 주었다. 두 사람의 안내를 받으며 준비된 차량에 오른 경환은 잠든 희수를 좌석에 눕혔다.
“황정욱 박사와 만나려면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희수 아가씨는 제가 숙소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딸과 같이 황 박사를 만나겠습니다. 황 박사도 이해해 주겠죠.”
수행비서로 따라온 하루나의 손에 맡겨도 되지만, 경환은 집도 아닌 낯선 샌디에이고에서 희수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잠든 희수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잠에 취해 있는 희수를 경환은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고 차는 샌디에이고 시내를 관통해 황정욱과 약속된 한식당으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샌디에이고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정욱입니다. 그리고 예쁜 아가씨는 누구 신가요?”
50대 후반의 머리가 허연 황정욱은 큰 키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다부진 몸을 하고 있어 나이보다 젊어 보일 정도였다. 같은 한국계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황정욱은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한국말로 경환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SHJ를 맡고 있는 이경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제 딸입니다. 희수야, 어서 인사드려야지.”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는 이희수라고 합니다.”
잠에서 덜 깼는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희수가 배꼽에 손을 얻고 또박또박한 한국어로 황정욱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정욱은 뭐가 좋은지 함박웃음을 지으면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이구, 난 아직 할아버지가 아닌데. 하하하.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구나.”
“아빠가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된데요. 나 한국말 잘해요.”
흐뭇한 눈으로 희수를 바라보던 황정욱은 예약된 방으로 경환과 희수를 안내했고 경환은 위화감을 황정욱에게 주기 싫어 하루나와 알이 인솔하는 경호팀을 식당 외곽에 대기시켰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식당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맞는 한국 음식냄새는 경환의 미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미 주문을 끝냈는지 탁자 위에는 여러 가지 밑반찬이 올려져 있었고 황정욱을 소주병을 들어 경환에게 내밀었다.
“미국 사회에서 진정한 아메리카드림을 이룬 이 회장을 꼭 한번 만나고 싶었습니다.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전 여기에 들러 소주로 맘을 달랩니다. 소주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맛보는 소주라 그런지 군침이 도네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아가씨는 뭘 시켜 줄까?”
“나 아가씨 아닌데. 희수예요. 이희수.”
희수의 당돌한 대답에 황정욱은 연신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소주잔을 부딪친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잊은 채 서너 잔을 더 마신 후에야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 회장님이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대충 눈치로 알고 있습니다. KSTAR 프로젝트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셨고 서울에 기술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진을 모집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JWH는 미 해군 SPAWAR(항공 및 해양전투시스템 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뚜렷한 성과는 없지만, SPAWAR의 자금이 이미 들어와서 연구 중입니다.”
경환은 황정욱의 말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 해군의 자금으로 이미 연구가 시작되었다면 황정욱이나 JWH를 인수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황정욱의 빈 잔을 발견하고 술을 한잔 따랐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돈은 과할 정도로 벌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이란 사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더군요. 제가 핵융합에너지에 관심을 둔 것도 제 개인적인 욕심보다는 적어도 한국이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을 가지길 원해서입니다.”
황정욱은 경환의 솔직한 대답에 웃던 얼굴을 급히 거두고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박사님, 제 경호원들이 이곳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용의주도하시군요. 전 ROTC 1기생입니다. 이 회장님은 군대를 갔다 오셨습니까?”
“네, 현역으로 복무하고 만기제대를 했습니다.”
“그렇군요.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조국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깊어지는 거 같더군요.”
황정욱은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소주를 몇 잔 더 마실 뿐이었다. 경환은 황정욱의 속도에 맞춰 소주잔을 기울일 뿐, 황정욱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젓가락질이 서툰 희수가 짜증을 내자 경환은 접시에 희수가 원하는 음식을 담아 주고는 포크를 건네주고 있었다.
“이 회장님의 말에 동감은 합니다. 저 또한, 한국에 대한 애착은 이 회장님 못지않다고 자부하고 있고요. 한국정부의 행태에 울분을 토하다가도 조국인 한국을 버릴 수가 없더군요. 지금 제 회사의 연구원의 상당수가 한국인입니다. 비록 미 해군과 계약이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만약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반은 한국의 기술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황 박사님, 연구가 성공한다면 미국이 한국에 기술을 나눠줄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박사님이나 연구원들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연구가 성공하더라도 숟가락 얻으려고 한국정부를 압박하지 않겠습니까?”
황정욱은 경환의 말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ITER 가입이 미국과 일본의 방해로 성사되지 못한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에 성공하더라도 이 기술이 미국 밖 특히 한국에 이전된다는 보장은 황정욱 자신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연구원들과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공동연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한국에 연구성과가 흘러가길 바라고 있었지만, 아직 한국의 투자가 들어오고 있지 않았다. 경환은 고민하는 황정욱을 향해 자세를 바로잡았다.
“황 박사님, SHJ의 모든 자금을 투입해서라도 한국에 번듯한 기술을 손에 쥐게 하고 싶습니다. 한국에 대규모의 SHJ타운을 건설하는 것도 이 사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박사님께서 SHJ기술연구소를 맡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경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깊게 숙였다. 경환의 돌발적인 행동에 황정욱은 손사래를 치며 경환의 어깨를 들어 올렸지만, 경환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미 해군의 자금 6백만 불이 들어와 있습니다. JWH의 모든 연구는 미 해군에 소속되어 있고요. 막대한 위약금으로 쉽게 몸을 뺄 수 없는 처지입니다.”
“연구결과에 대한 확신은 아직 없을 겁니다. 계약된 위약금의 두 배를 지불하는 조건이라면 SPAWAR도 쉽게 물리치지는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황정욱은 미간을 좁혔다. 위약금의 두 배면 5천만 불이란 엄청난 금액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투자를 하겠다는 경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온핵융합 연구는 이론만 세워졌을 뿐, 성공을 예측하는 과학자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정욱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한국에 대한 그리움에 커지고는 있지만, 자신을 받아주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박사님, 전 한국은 믿지만, 한국정부는 믿지 않습니다. 제가 이 연구를 SHJ 주관으로 하려는 이유는 한국정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SHJ기술연구소를 맡아 주신다면 박사님이 원하시는 이상으로 투자하겠습니다. 또한, 일절 연구방향과 연구소 운영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지금 제 옆에 있는 딸의 이름과 제 명예를 걸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흠. 이 회장님이 투자하신 KSTAR와 제가 연구하는 방향은 다릅니다.”
“KSTAR는 실패를 위한 투자입니다. 모든 연구는 SHJ기술연구소에서 진행이 될 것이고, 박사님께서 연구소를 맡아 주신다면 토카막 개발과 저온 등 다각적인 연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망설이는 황정욱을 밀어붙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황정욱은 KSTAR가 실패한다는 경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경환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키운 JWH엔 자신만 바라보는 140명의 연구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나빠! 우리 선생님이 한국사람은 한국을 잊으면 안 된다고 그랬단 말야! 으앙.”
“희, 희수야.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 아니야. 어서 사과 드려야지.”
아빠가 힘든 모습이 보기 싫어서인지 희수는 포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당황한 경환은 손수건을 들어 희수의 눈물을 닦아주며 황정욱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여섯 살도 채 되지 않은 희수의 말이 황정욱의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허허, 내가 인생을 잘못 산 거 같습니다. 희수야, 이 할아버지가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아직 어린애라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니에요. 희수 말을 들으니 제 눈이 밝아집니다. 어리더라도 배울 건 배워야지요. JWH엔 제 가족인 140명의 직원이 있습니다. 모두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희수의 눈물로 인해 상황은 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희수를 달래기 위해 여념이 없던 경환은 황정욱의 결심을 확인하고는 먼 샌디에이고까지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SHJ의 마지막 사활을 건 핵융합에너지 개발은 황정욱의 영입으로 그 정점을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박사님. 미 해군과의 위약금에 대해 협의를 해 주십시오. 정확히 위약금의 두 배까지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JWH는 가장 좋은 조건으로 인수하고 SHJ기술연구소는 SHJ-JWH기술연구소로 명칭을 바꾸겠습니다. 또한, 한국 근무를 원하는 직원은 물론이고 SHJ에 남기를 원하는 직원 모두를 수용하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박사님의 연구지원은 SHJ의 여력이 닿은 선에서 무한대로 이뤄질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허허, 같은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성공한 이 회장님과 소주 한잔 기울일 생각이었는데, 우리 꼬맹이 아가씨에게 넘어갈 줄 몰랐습니다.”
“치, 나 아가씨 아니라니까요! 이희수라고요. 이희수.”
“하하하.”
울음을 그친 희수는 포크를 다시 집고 처음 먹어보는 잡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어려울 거 같은 황정욱의 영입을 희수의 도움으로 성사시킨 경환은 그제야 거하게 차려진 한국 음식을 맛보며 빈 소주잔을 새롭게 채우고 있었다.
“KSTAR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던 말은 한국 정부에서도 인정했다는 말로 들립니다. 제 예상이 맞나요?”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KSTAR가 성공하더라도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굴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게 된다면 그 기술이 유출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고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더라도 제값은 받아내겠다는 취지로 한국정부를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술은 SHJ기술연구소가 있는 한국을 벗어나게 하지 않겠다는 이면 각서를 한국정부에 제출했습니다.”
황정욱은 경환의 배짱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자금이 얼마나 투입되어야 할지 계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경환의 결단이 확고부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의 마지막 연구를 한국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기로 마음을 굳힌 황정욱은 오늘따라 달게 느껴지는 소주를 입에 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