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다시 사는 인생 - 182
“스캇, 한국에 갔다 왔으면 술이라도 한잔 사야 하잖아.”
한국에서 돌아와 그동안 밀렸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던 승연의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고 세르게이와 래리가 들어섰다.
“억만장자인 두 사람이 나 같은 빈털터리를 뜯어먹을 생각인 거야? 벼락 맞는다.”
올해 처음 5억 불을 배당금을 산정한 SHJ구글은 배당을 받은 두 사람은 5천만 불이란 엄청난 금액이 손에 쥐어졌지만, SHJ타운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에겐 돈을 쓸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스포츠카를 구매하고 SHJ타운 내 부지를 사들여 SHJ매지니먼트를 통해 개인 저택을 건설하는 데 돈을 사용한 게 전부였다. 단순히 연봉만 받는 승연에겐 두 사람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래리, 세르게이.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자리에 좀 앉아봐.”
“왜? 혹시 한국에서 여자라도 만난 거야?”
장난기 섞인 세르게이의 말에 승연은 잠시 김혜리와의 뜨거운 밤을 떠올리곤 고개를 급히 저었다.
“두 사람을 속이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내가 너희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었어.”
“뭔데 자꾸 뜸을 들이는 거야? 속 시원하게 말을 해봐.”
의자에 걸터앉은 세르게이가 승연을 독촉했지만, 승연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승연은 세르게이보다는 래리의 반응이 어떨지 신경이 쓰였다. 래리의 지지가 없었다면 SHJ구글과의 인연은 애당초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만 보고 있는 래리를 바라보던 승연은 무겁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임스 리 회장이 내 친형이야. 절대 속이려고 한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줘. 난 내 힘으로 성장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앞으로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너희도 알잖아, 제임스가 어떤 인간인지.”
승연의 느닷없는 고백에 세르게이와 래리는 눈을 크게 치켜들고는 망부석이 되어버렸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 승연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동안 속에 담아둔 짐을 풀어버린 홀가분함을 느꼈지만, 두 사람의 반응이
“너, 너. 제임스가 네 친형이란 거 사실이야?”
“스캇, 네가 말을 하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잖아.”
세르게이가 입에 거품을 물고 승연을 쪼아대기 시작했고 래리도 섭섭함을 표현하자, 승연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정말 미안하다. 날 달리 볼까 걱정했었어.”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해 줘서 고맙다. 안 그래, 세르게이?”
“너나 제임스나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너 오늘 지갑 제대로 열어야 할 거야. 절대 그냥 못 넘어가. 어쭈, 아직도 자리에 붙어 있겠다는 거야?”
동창찾기를 인수한 이후 새로운 형태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 쓰고 있었지만, 오늘은 퇴근해야 할 분위기였다. 다행히 두 사람의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승연은 세르게이의 성화에 못 이겨 퇴근을 일찍 서둘렀다.
“다니엘, 아직 연락받은 건 없는 건가?”
“아직 없습니다.”
수석비서인 다니엘은 초조하게 집무실을 서성이는 앨 고어 곁을 지키고 있었다. 톰 클랜시의 소설이 알게 모르게 딕과 네오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대선은 앨 고어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아직 확실한 격차를 벌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공화당의 강세지역인 남부와 동부, 중부 지역은 아직도 부시를 지지하고 있어 의문의 서류에서 말한 거처럼 선거는 이기고 대통령은 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었다.
“부통령님, 출처도 모르는 정보에 우리가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시와의 격차가 벌어진 만큼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부시의 유세를 살펴보면 그 정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는 게 개운치 않아. 우리 전략도 마찬가지지만. 이번 전당대회의 시위도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란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나?”
앨 고어는 손을 턱에 고인 채 생각에 잠겼다. 예언가가 아닌 이상 공화당과 민주당 혹은 외부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정보들이었다. 이번 대선에 실패한다면 다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앨 고어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평소 같으면 관심을 두지도 않을 정보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앨 고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마이클이 급히 집무실로 들어섰다.
“헉, 헉. 부통령님, 방금 제 개인 메일주소로 메일이 들어왔습니다.”
“추적은 하는 건가? 쥐새끼를 까발려야 하지 않겠나.”
급히 뛰어와서인지 두 손으로 양 무릎을 잡은 채 헉헉거리고 있는 마이클을 향해 다니엘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보안팀에서 발신지 역추적을 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습니다. 우선 내용을 확인해 보십시오. 저 이외는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숨을 돌린 마이클이 출력된 서류를 앨 고어에 전달하자, 앨 고어는 메일 내용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앨 고어의 인상이 급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마이클에게 눈짓을 줬지만, 마이클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뜬 앨 고어는 메일 내용을 다니엘의 손에 쥐여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둠이 내리는 집무실 밖을 바라보았다.
“젠장, 이젠 아주 가지고 놀 생각인가 보군. 부통령님, 정부를 상대로 협박을 한 죄가 얼마나 무모한지 알게 해 줘야 합니다. 마이클 자네는 FBI에게 정식 의뢰를 해 보게.”
“잠시만 기다려. FBI에 의뢰한다 해서 출처를 밝힐 수 있다고 보나? 지난번 FBI 의뢰를 막은 사람이 자네 아닌가? 그리고 문서 내용은 우리 캠프 내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정보란 게 신경 쓰이네.”
다니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앨 고어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니엘은 밑져야 본전이란 제목의 메일을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지난번과 다르게 간략하게 적혀있는 글에는 조지 부시와 다를 게 없는 앨 고어의 행보를 비난하며 이번 대선을 녹색당을 이용해 대선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니엘, 만약에 랄프 네이더에 힘이 실린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겠나?”
“저, 그게. 솔직히 말하면, 녹색당은 우리의 표를 갉아먹는 조직입니다. 유권자의 3%가 랄프 네이더 쪽으로 흘러간다면 결과는 예측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성의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녹색당에 힘을 싣겠다는 말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탄소세와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내가 백악관에 입성한 후에 계획된 내용이지만, 이 자는 명확히 이 문제를 지목하고 있다니.”
세 사람이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무렵, 보안팀장이 조용히 마이클을 찾아 귓속말을 전한 후 빠져나갔다.
“메일 발신지를 역추적한 결과 중국에서 끊어졌다고 합니다. 중국도 사실 발신지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전문가라고 보는 게 맞을 거 같습니다.”
앨 고어의 반응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한 조직이 역추적에 걸릴 정도로 어리숙하게 행동하진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니엘, 최근 바뀐 정책이 뭐지? 아니면 계획과 다르게 진행되는 사항이라도 있을 텐데.”
“주식을 처분하고 석유업계와 각을 세우며 환경운동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이는 거 말고는 특별한 건 없습니다.”
“뭘까? 이 자가 우리를 부시와 다를 게 없다고 본 이유가. 흠, 마이클 자네는 조심스럽게 이 자를 추적하고, 다니엘은 당분간 이권에 개입된 일을 중단하고 랄프 레이더의 움직임을 지켜보게. 당분간은 대선에만 집중하면서 추이를 살피는 게 아무래도 좋을 거 같아.”
적인지 아군인지 앨 고어는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앨 고어는 랄프 레이더를 밀겠다는 메일이 맘에 걸렸다. 대선은 앨 고어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승리를 장담하기엔 아직 변수가 많았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아빠!”
크리스토퍼가 현관문을 열자 희수가 빠르게 달려와 경환의 품에 안겼다. SHJ타운으로 이전한 이후 경환은 오전에 잠깐 출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저택에서 희수와 시간을 보내거나 급한 일은 서재에서 처리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요. 크리스토퍼. 자, 우리 희수는 아빠와 같이 들어갈까? 오빠는 뭐하니?”
“여보, 오셨어요? 정우는 선생님하고 한국어와 한국역사 공부하고 있어요. 공부가 끝나면 내려올 거예요.”
수정은 정우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호칭을 여보로 바꿨지만, 경환의 입에선 아직 여보라는 호칭은 어색할 뿐이었다. 경환은 수정과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 후 희수를 안은 채 거실로 들어섰다.
“희수야, 아빠 배고픈데 같이 밥 먹으러 갈까?”
“네! 나도 배고파. 엄마가 밥도 안 줘.”
“기가 막혀서, 희수 너. 아빠하고 같이 먹겠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엄마가 못 먹게 했다는 거니?”
희수는 활짝 웃으며 얼굴을 경환의 품에 묻었고, 그런 희수의 앙큼함에 수정은 어이가 없는지 혀를 끌끌 차며 희수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겼다.
“여보, 시장하더라도 좀 기다려요. 도련님이 오시겠다고 전화 왔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식사하면 어떻겠어요?”
“승연이가? 나한텐 전화 한 통 없는 놈이, 지 형수는 뻔질나게 찾아대네. 크리스토퍼, 내 동생이 오면 거실로 안내해 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회장님.”
식탁으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한 경환은 희수의 재롱을 보며 하루에 쌓인 피로를 풀고 있었다.
“아빠, 나 할아버지 보고 싶어.”
“희수야. 넌 할아버지가 왜 보고 싶은 거야?”
“몰라. 그냥 막 생각나. 꿈에 할아버지가 우는 것도 봤어.”
경환의 희수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경환은 희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자식의 이혼과 사업실패로 마음에 병을 얻은 부모님은 차례로 세상을 등지게 되었고, 희수를 끔찍이 아꼈던 경환의 아버지는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도 희수의 손을 움켜잡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경환은 희수의 맑은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희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옥 끝이라도 찾아가 마몬의 사지를 찢어버릴 각오를 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회장님, 동생분이 도착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재에 가 있겠습니다.”
처음 저택을 찾은 승연은 그 크기와 화려함에 입을 벌린 채 눈을 사방으로 돌리고 있었다. 희수를 크리스토퍼에게 맡긴 경환은 승연의 등을 후려쳤다.
“자식, 뭔 바람이 불어서 찾아온 거야? 혼자 성공하겠다고 난리를 칠 땐 언제고.”
“직원들은 뼈 빠지게 일하는데, 오너는 아주 으리으리한 집에 사니, 너무한 거 아니야?”
“형수한테 인사 끝났으면 잔말 말고 따라와.”
서재와 연결된 엘리베이터에 반강제로 승연을 집어넣은 경환은 앞장서 서재로 향했다. 독립심 강한 승연이 자신을 찾았다면 뭔가 중요한 문제일 거라 추측은 하지만, 주말도 아닌 평일 저녁 시간에 찾을 정도로 급한 일이 무엇일지는 경환도 알지 못했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형, 사실은 오늘 슈미트 사장이 날 찾더라고, 한국에서 인수한 동창찾기를 토대로 새로운 형태의 SNS 개발팀을 맡으라고 하는데 형이 뭐 아는 거 있어?”
“그게 뭐 어떻다는 건데? 네가 능력 있고 실력이 있으니 팀장을 맡으라는 건데 뭐가 불만이야?”
며칠 전 에릭의 보고로 SNS 사업팀을 신설한다는 내용은 알고 있었다. 팀장이 승연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충격이었다. 어리게만 봤던 막내가 SHJ구글이라는 잘나가는 회사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것은 형 입장에서 기쁜 일이었다. 경환은 이 문제가 무슨 문제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실은 어제 래리와 세르게이에게 형이 내 친형이라는 사실을 말해 줬어. 미국 와서 처음 사귄 친구들인데 더는 속일 수 없었거든. 그리고 오늘 내가 팀장 발령을 받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래. 만약 내가 형의 동생이라서 팀장을 맡게 된 거라면 형이 그 발령을 취소해줘.”
“미친놈, 인마. 형 성격 아직도 몰라? 네가 실력 없었으면 진작에 SHJ구글에서 쫓아냈을 거다. 그리고 에릭이나 래리, 세르게이가 실력 없는 놈한테 SHJ구글의 차기 사업을 맡길 정도로 어리숙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말을 중간에 끊은 경환은 서류철을 뒤지다 한 통의 보고서를 승연에게 건네주었다.
“인마, 너 어제 사실을 말했다고 했지? 이 서류 봐라. 지난주에 에릭이 신규 사업계획서 보고한 서류다. 네 이름 적혀 있는 거 보이냐? 원래 졸따구들이 볼 서류는 아니지만,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보여주는 거니까 확인만 해.”
승연은 경환이 건네 서류를 살피기 시작했다. 경환의 말대로 지난주 날짜가 적혀있는 보고서엔 SNS 개발팀 팀장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번 신규 사업 말아 먹으면 내 손에 아주 죽을 각오 해. 그건 그렇고, 너 한국에서 만난 여자 도대체 누구야? 사실대로 불어 인마.”
승연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가족이라면 끔찍하게 생각하는 경환은 SHJ시큐리티를 통해 승연의 한국 일정을 꿰고 있었고, 당연히 김혜리와의 일을 알고 있었다. 혹 떼러 왔다가 본전도 못 건지게 된 승연은 인상을 쓰며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