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다시 사는 인생 - 181
애플은 예상외로 저조한 판매를 보이는 아이팟으로 인해 긴 침묵에 휩싸였다. 아이맥 출시 이후 야심 차게 준비한 스티브 잡스의 차기작인 아이팟의 판매저조는 주주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었다.
애플의 대주주인 CPERS(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의 감사인 토니 클락은 비밀주의와 폐쇄주의로 일관하는 스티브 잡스의 경영철학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한 사람이기도 했다. IT버블 붕괴에 따른 애플의 주가하락과 아이팟의 판매저조는 스티브 잡스를 공격하기 위한 좋은 먹잇감이었다.
“스티브, 96년 이후 재투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배당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SHJ 컴페니언의 아류작이란 오명에도 우리는 스티브의 자신감을 지지했다고 보는데, 아이팟의 판매실적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더군요.”
토니의 빈정거림에 울컥한 스티브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그러나 1985년 독선으로 인해 애플에서 쫓겨났던 기억이 스티브를 다시 자리에 주저앉게 했다.
“토니, 말이 지나치군요. 아이팟을 출시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컴페니언의 독주 속에서 MP3 시장의 10%를 장악했다는 건 의미가 큽니다.”
“그 10%가 한계치라는 분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매킨토시 골수팬을 제외하고 아이팟으로 갈아타는 소비자들이 없다는 게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컴페니언의 독주를 막기는커녕 오성전자를 추격하기도 벅차 보인다는 말입니다.”
토니는 애플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취약점인 골수팬 문제를 거론하며 스티브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이맥으로 상승세를 이어가던 주가는 IT버블 붕괴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팟의 판매저조로 40불에 이르던 주가는 15불로 떨어졌고, 10불대를 유지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스티브의 얼굴이 붉어질수록 토니의 얼굴엔 승리자의 도취감이 가득했다.
“스티브, SHJ는 아이팟의 디자인과 아이튠즈의 플랫폼 도용문제를 놓고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MS 내부 정보로는 작년부터 아이팟과 아이튠즈의 저작권 침해문제를 SHJ 측이 치밀하게 검토했다고 하더군요.”
“토니, 우리는 SHJ의 법적 대응을 내심 기다리는 중입니다. 현재 MP3 시장은 컴페니언의 독주 속에 40%의 시장을 놓고 우리와 오성전자, 중소업체들이 나눠 먹는 형국입니다. 만약 SHJ와 소송전을 한다면 아이팟의 브랜드 가치는 상승하게 될 겁니다. SHJ와의 소송은 정체된 10%를 뚫는 계기가 될 거란 말입니다.”
토니의 미간이 좁혀졌다. 스티브를 압박하기 위해 꺼낸 SHJ의 정보가 오히려 스티브의 반격을 허용하며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스티브의 말처럼 SHJ와의 소송전은 단시간에 끝날 싸움이 아니었고, 지루한 법정 싸움은 아이팟을 호기심 대상으로 만들어 애플로썬 손해 볼 장사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토니의 발목을 잡은 스티브는 쐐기를 박을 생각이었다.
“우리가 법정 대응을 하는 동안 외부의 힘을 이용해 SHJ를 압박하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한번 발목을 잡힌 토니는 스티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올핸 배당을 받고 스티브의 독선을 방지할 이사 선임에 제동을 걸기 위해 애플을 찾았던 토니는 스티브의 전략에 말려들어 가고 있었다.
“SHJ는 아직 기업도 공개하지 않았고, 더욱이 컴페니언은 MP3 시장의 60% 이상을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미국은 독점금지법이 가장 잘 지켜지는 나라라고 보는데요.”
“다른 손을 이용해 SHJ의 독주를 막아보겠다는 생각이군요. SHJ가 MS와 연합되어 있고 부시의 러닝메이트로 선임된 딕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은 못 들은 겁니까?”
“이거 왜 그러십니까? 저도 돌아가는 사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SHJ의 기업공개를 압박하기 위해 연방거래위원회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제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리고 이번 대선은 공화당이 패할 거란 소문이 파다한데, 자기 앞가림도 못 하는 딕이 누굴 봐 줄 수 있을까요?”
토니는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IT버블 붕괴로 주식시장은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미 대선에도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 민주당은 민심이탈을 방지하고 주식시장의 원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SHJ의 기업공개를 위해 물밑작업을 시작했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스티브의 뒤를 봐주는 정치세력이 누구인지 짐작은 하지만, 토니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치적인 압박이 SHJ의 상승세를 꺾을 수 없다고 봅니다. 비밀리에 개발되고 있는 컴페니언-5에 맞설 차기작은 준비되고 있는 겁니까?”
한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스티브를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토니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화제를 급히 돌렸다. 아직 배당금과 이사 선임 문제는 꺼내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티브는 쉽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이팟으로 SHJ를 이긴다는 건 어렵다고 봅니다. 아이팟을 징검다리로 애플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스티브, 당신의 언변은 화려하군요. 당신이 그린다는 큰 그림이 도대체 뭡니까? 어물쩍 넘어간다면 1985년의 일이 재현될 수도 있습니다.”
“휴대폰과 MP3가 결합되면 시장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SHJ의 약점은 OS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린 맥 OS를 기반으로 한 모바일 OS에 전력투구 중입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독주는 몇 년 안으로 막을 내리게 될 겁니다.”
이날 토니는 스티브를 압박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스티브의 설득에 넘어가 애플의 차기 계획에 자금 투자를 승인하는 한편, 퇴직연금의 일부 자금도 투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는 서둘러 애플을 떠났다.
SHJ 제2 타운 부지선정과 KSTAR 투자계약을 마친 황태수가 돌아오자, 휴스턴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타운 건설과 오성전자의 초전도도체 기술개발 투자금과 KSTAR 투자금을 합쳐 10억 불을 SHJ 아시아본사에 송금해 공염불만 하는 기업이 아니란 것을 증명했다. 물론 일정에 맞춰 아시아본사에서 자금을 집행하겠지만, 단번에 10억 불을 투입한다는 건 한국정부나 한국 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오랜만에 황태수, 린다와 자리를 같이 한 경환은 대선과 맞물려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이를 SHJ의 위기로 인식하고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한국 투자 건은 예상외로 잘 마무리된 거 같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부회장님.”
“응당히 해야 할 일을 한 거뿐입니다. 앞으로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어야 할 텐데 걱정스럽긴 합니다.”
경환을 바라보는 황태수의 얼굴엔 희미한 불안감이 새겨져 있었다. 경환도 황태수가 느끼는 불안감을 이해하고는 있었지만, 판을 벌인 이상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SHJ퀄컴과 특히 SHJ구글의 지속적인 성장을 본다면 당장 투자자금에 큰 영향은 끼치지 못할 것으로 보지만, 부회장님이 걱정하듯이 핵융합에너지 개발은 핵융합로와는 차원이 다른 액수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대비는 해 두어야 합니다.”
경환은 턱을 손으로 괸 채 두 사람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성공의 확신을 가진 상태에서 SHJ를 경영해 왔다면, 핵융합에너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 문제는 이미 강을 건넜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SHJ의 사활이 걸려있는 만큼, 불안감보다는 자신감으로 일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두 분의 절대적인 지지도 필요하고요.”
“이런 걸 보면 우리가 상장하지 않은 게 큰 도움이 됩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이왕 시작하기로 한 이상 끝을 보겠습니다. 직원들을 다독거리겠습니다.”
황태수는 굳은 얼굴을 풀고 경환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린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두 사람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환은 굳은 표정의 린다를 바라봤다.
“린다의 표정이 좋지 못하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연방거래위원회에서 우리를 내사할 수도 있다는 말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마 주가의 하락을 우리를 통해 반전시킬 계획인 거 같습니다. 대선 레이스가 시작된 지금 IT 붕괴로 발생한 주가폭락은 민주당의 악재로 작용할 소지가 많다 보니 이번 압력은 민주당 앨 고어 캠프의 작품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경환은 작년 존 해밀턴과의 독대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딕의 백악관 입성을 막기 위해 앨 고어의 손을 거들고 있었지만, 앨 고어에게 뒤통수를 맞는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앨 고어의 멱살을 잡고 널 도와준 게 나란 말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MS는 건들지도 못하는 것들이 아주 쇼를 하고 있네요. SHJ를 공개하더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린다는 연줄을 이용해 연방거래위원회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작업을 하세요. 앨 고어의 입김은 다른 쪽을 통해 막아보겠습니다.”
“로펌과 텍사스 주 정부, 휴스턴 시 정부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 봐야죠.”
“한국에 설립될 기술연구소 문제는 어떤가요? 예상대로 인원 확보에 문제가 있나요?”
핵융합을 연구하는 인물들은 미국정부의 특별관리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SHJ가 미국 기업이라 하더라도 인력수급을 위한 접촉은 미국 정부기관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경환의 지시를 받은 린다는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아직 특별한 성과를 얻고 있지는 못했다.
“미국 내 연구소라면 모를까, 한국에서 근무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네요. 관련 연구원을 스카우트하는 과정에서 샌디에이고의 JWH라는 기업의 사장이 한국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황정욱이라고 하는데 저온핵융합 기술을 연구 중이라 합니다. 해군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어 해군연구소의 투자를 기다리는 거 같습니다.”
“그럼 KSTAR에서 추진하는 핵융합로 사업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저온핵융합이 성공한다면.”
“상온핵융합보다는 저온핵융합이 상용화 가능성이나 비용면에서 유리하다고는 합니다. 황정욱 박사도 우리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먼저 회장님을 만나고 나서 결정을 하겠다고 합니다.”
관심을 두고 이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고 있지만, 물리학은 경환에게 무리였다. 마땅한 기술연구소 소장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인인 황정욱 박사에 대한 소식은 경환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물론 애국심에 호소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과 전혀 인연이 없는 연구원보단 말은 통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룹사옥으로 이전하고 나서 남는 게 시간인데 못 만날 이유가 없지요. 린다가 황정욱 박사의 일정에 내 일정을 맞춰봐요. 필요한 사람이라면 무릎이라도 꿇을 자신 있습니다.”
경환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재 등용으로 메꾼다는 건 예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린다는 경환의 호기심이 황정욱 박사에게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회장실을 벗어나자, 그 뒤를 황태수가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회장실을 벗어나는 모습을 확인한 알이 경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SHJ를 압박하는 선봉장이 앨 고어라니 아이러니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앨 고어나 조지 부시나 결국 같은 족속일 뿐입니다. 딕에게 큰소리는 좀 쳐야 하겠지요?”
경환은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수화기를 들었다.
“딕? 오랜만입니다.”
‘어, 제임스 오랜만이네. 연락 한 번 없던 자네가 어쩐 일인가?’
수화기에서 들리는 딕의 목소리는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듯 집중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경환은 서둘러 용건을 꺼내 들었다.
“앨 고어 진영이 독점금지법으로 SHJ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제가 딕을 지원한다는 소문이 앨 고어 캠프에 들어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흠, 그런가? 내가 함 알아보겠네.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말이지.’
대선이 경환의 개입으로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SHJ까지 신경 쓸 인물이 못 된다는 건 경환은 알고 있었다. 말을 돌리는 딕의 행동에 경환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지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바쁘시니 이만 끊겠습니다.”
경환이 수화기를 내려놓자 알이 급히 다가왔다.
“회장님, 딕은 꼬리를 자르겠다는 거군요.”
“원래 기대도 안 한 인간입니다. 그나저나 앨 고어 이 양반이 아주 기세가 등등한 거 같군요.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났으니 슬슬 2차 계획을 진행하세요. 계획이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노출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2차 계획을 진행하겠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있던 8월 14일 LA에는 외료보험과 클린턴 정부 때 후퇴한 사회복지의 확충을 내 걸은 만여 명의 인파가 전당대회가 열린 스테이플스 센터 외곽에서 시위를 벌여 민주당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대규모 충돌이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전당대회를 통해 공화당과의 격차를 벌리려던 계획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앨 고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서류의 내용을 다시 살피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세력이 이 대선에 개입해 있다면 지금의 격차는 역전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앨 고어는 연락하겠다는 서류의 마지막 글을 노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