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80화 (157/264)
  • #180

    다시 사는 인생 - 180

    “회장님, 앨 고어가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거 같습니다.”

    경환의 집무실을 찾은 알이 조용히 말을 전하자, 읽던 책을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부시 진영에겐 재앙이겠지요. 책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유명작가다 보니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거 같습니다. 단번에 베스트셀러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경환은 TWINS라는 책의 겉표지를 넘겨 보았다. 이 소설의 저자는 군사 및 첩보소설의 대가인 톰 클랜시로 출입증 없이도 펜타곤을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는 소설가로 CIA와 FBI에서 수시로 강의를 할 정도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TWINS라는 소설은 석유, 방산업체와 결탁한 백악관이 미국에 대한 테러계획을 입수하고도 이를 방조해, 테러리스트에 의해 공중납치된 비행기가 뉴욕의 심장인 WORLD TRADE 빌딩과 충돌하는 내용으로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에 고전분투하는 FBI 요원의 활약상을 그린 소설이었다.

    경환은 당황할 딕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새로운 미국을 건설하기 위해선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내용은 네오콘을 등에 업고 대선을 준비하는 부시 진영에겐 큰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유명작가인 톰의 소설이 발표되자마자 골수팬들의 입소문을 거치며 빠르게 미국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톰 클랜시가 이 정도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인 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모르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 뒤를 밟히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번 일에 관련된 요원들은 한국지사로 발령을 냈습니다.”

    일 처리가 깔끔하고 입이 무거운 알이 진행한 일이라면 믿을 수 있었다. 경환은 딕과의 공생까지도 포함하여 고민했지만, 딕이 백악관을 장악하는 8년이란 시간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알도 알다시피 딕은 우리에게 절대 호의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백악관을 틀어쥐게 된다면 SHJ의 목줄을 쥐려고 할 겁니다. 앨 고어도 신뢰감이 가는 인물은 아니지만, 딕보다는 낫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전 회장님의 지시만 수행합니다. 판단은 회장님의 몫입니다.”

    경환은 알의 어깨에 손을 얹어 신뢰를 표시했다. 알은 고개를 숙여 경환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서로에 대한 신뢰를 말로 표시하진 않았지만, 두 사람의 신뢰는 말로써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황태수와 린다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끈끈한 믿음이 두 사람에게 흐르고 있었다.

    아직 러닝메이트가 결정되지는 않았지만, 딕이 러닝메이트가 될 거란 사실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시의 선거 캠프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딕,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야?”

    “우리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야. 앨 고어, 이 여우 같은 자식이 주식을 포기할 줄은 몰랐어.”

    민주당 전당대회를 D-DAY로 앨 고어의 흠집을 들어내겠다는 계획은 앨 고어가 주식을 기부하면서 물거품으로 변했다. 각종 민간업체를 통한 여론조사는 앨 고어의 승리를 점치고 있어 부시와 딕의 초조함은 깊어지고 있었다.

    “딕, 내가 말하는 건 앨 고어를 말하는 게 아니야. 문제는 톰 클랜시야, 톰 클랜시.”

    부시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딕 앞으로 책을 집어 던졌다. 대선 정책과 전략이 딕과 네오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시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자네가 화내는 건 이해하네. 이 인간이 이런 정보를 어디에서 입수했는지, 우리도 그 인간의 뒤를 뒤지는 중이야.”

    “이 소설의 내용이 너무 적나라하잖아. 우리 쪽에서 새 나가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라고. 소설이 출간되고 나서 올라가던 지지도에 비상이 걸렸다는 걸 자네도 알 거 아닌가. 도대체 대책이 있기는 한 건가?”

    딕은 죽을 맛이었다.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지금 공화당 대선후보는 자신이 아닌 부시였다. 우선은 부시를 진정시킬 필요를 느낀 딕은 굳었던 얼굴을 풀 수밖에 없었다.

    “아직 역전할 기회는 충분하다고 보네. 자네의 지금 이 모습을 가장 기뻐할 인간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판단해 보자고. 우선 정보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벌레를 잡기 위해 내부 청소를 시작했으니, 조만간 소식이 들어올 거야. 그리고 톰 클랜시는 다른 조직에서 은밀히 내사를 벌이게 될 거야.”

    “앨 고어를 찍어내기 위해서는 네거티브 전략이 필요한 거 아닌가?”

    딕은 답답했다. 멍청한 놈이라고 욕지거리라도 퍼부어대고 싶었지만, 딕은 억지로 참아내고 있었다.

    “민주당의 전당대회가 시작하지도 않았어. 우리가 네거티브를 시작하면, 앨 고어의 이름값만 띄어줄 뿐이라고. 지금은 철저히 앨 고어를 무시하는 전략을 취할 때란 말일세. 어중간한 네거티브는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도 있다고 보네.”

    “젠장, 내가 먼저 죽게 생겼는데 다른 놈 사정 봐주게 생겼느냐고.”

    부시의 신경질은 가라앉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계획된 전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앨 고어의 주식 기부를 시작으로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부시의 잔소리는 딕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지! 과자 달라는 애들처럼 보채지 좀 말게! 민주당이 바라는 게 뭔지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순간, 딕을 바라보는 부시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딕, 난 아직 러닝메이트를 선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자네 뒤에 네오콘이 있다 해도 내가 백악관에 입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야 할 거야. 그만 나가 보게.”

    말을 마친 부시는 싸늘한 표정으로 딕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려던 딕은 부시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딕, 언성이 높아지던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된 건가?”

    “톰 클랜시가 TWINS를 집필한 시간이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소설의 소재를 외부에서 얻었다는 걸 주변 탐문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톰 클랜시가 횡재를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 외부가 어딘지 철저히 조사해. 필요하다면 블랙워터를 동원해서라도.”

    부시와의 관계에 미세하게 생기기 시작하는 균열은 결코 자신에게 좋은 조짐은 아니었다. 러닝메이트로 낙점된 자신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골통인 부시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려는 놈을 잡기라도 한다면 갈아마셔 버리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딕은 이빨을 힘껏 깨물었다.

    위스키 한 병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말짱해지고 있었다. 처음 시킨 안주는 건드린 흔적없이 테이블 위에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고, 꼿꼿이 술을 마시던 김혜리의 자세도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한 병 더 마시고 싶어요. 괜찮죠?”

    “많이 마신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승연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김혜리는 술 한 병을 더 주문해 버렸다. 법조계 사람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안주도 거른 채 독한 양주를 물 넘기듯 마시는 김혜리가 승연은 신기해 보이기까지 했다. 새로 올려진 양주를 급히 잔에 따른 김혜리는 승연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입에 부어 넣었다.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하는 일이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히 심한 직업이에요. 출장이긴 하지만, 부산에서 바닷바람을 쐬다 보니 마음이 풀어졌었나 봐요. 일탈을 꿈꿨던 거 같기도 하고요.”

    승연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몸을 섞은 걸 부정하거나 회피할 생각은 없었지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일 아닌 듯 대범하게 넘겨야 할지 적당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김혜리를 따라 승연은 말없이 술을 마실 뿐이었다.

    “명함을 보니 SHJ구글에 다니시더군요. 미국에서 성장했나요?”

    “아닙니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군요.”

    짧은 대화 속에 두 사람의 대화는 단답형으로 끝나고 있었다. 승연은 김혜리의 술잔에 술을 따른 다음 건배를 제의했다. 작은 스트레이트 잔이 서로 부딪치자 맑은소리가 두 사람 주위로 퍼졌다. 목을 열어 단번에 술을 털어 넣은 승연이 김혜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책임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거나, 하룻밤의 우발적 사고로 넘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어 오늘 연락을 드린 겁니다.”

    “후후, 제가 변호사란 걸 잊으셨나 보네요. 책임이라는 말 얼마나 무서운지 아세요? 우발적 사고라는 말,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우린 우발적 사고 맞아요. 그냥 몸 한 번 섞은 사이일 뿐이라고요.”

    감정이 격해지는지 아니면 취기가 올라와서인지 김혜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있던 연인들이 짐승 쳐다보는 눈빛으로 승연을 태워 죽일 듯이 쳐다보자 승연은 눈을 찔끔 감고 깊은 한숨을 뿜어냈다.

    “알겠습니다. 더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혹시라도 연락할 일이 생기시면, 명함에 있는 주소로 연락 주십시오.”

    “나쁜 놈.”

    자리를 정리하려던 승연은 순간 움찔거렸다. 고개를 떨구며 술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김혜리는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친형인 경환을 따라잡기 위해 변변한 연애 한 번 해보지 못한 승연은 이 자리를 풀어 간다는 게 곤혹스러울 따름이었다.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거보다 리만 가설을 입증하는 게 더 빠르다는 선배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려던 승연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이 나쁜 놈아. 내가 얼마나 비싼 여잔 줄 알아? 나 시간당 10만 원 받는 여자란 말이야!”

    말을 마친 김혜리는 탁자에 고개를 파묻고 작은 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승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혀가 살짝 꼬부라진 김혜리의 우렁찬 목소리로 바 안의 손님들 시선은 모두 승연과 김혜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시간당 10만 원의 여파는 바 안을 술렁이게 하기 충분했다. 혀를 차는 손님들로부터 음흉한 눈빛으로 김혜리의 전신을 훑는 손님들까지 각양각색의 반응들로 승연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취하셨네요. 바람이나 쐬러 나갑시다. 김혜리 변호사님!”

    승연은 변호사란 말에 힘을 주었다. 10만 원이란 오해는 풀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취기가 올랐는지 탁자로 엎어진 김혜리는 쉽게 몸을 가누지 못했다. 계산을 서둘러 마친 승연은 김혜리를 둘러업고서야 간신히 바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나쁜 놈, 나쁜 놈.”

    등에 업힌 김혜리는 승연의 머리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졌지만, 주위 시선에 머리가 터질 거 같은 아픔을 승연은 참아야만 했다. 겨우 모범택시를 잡아탄 승연은 아까의 복수라도 하듯 김혜리의 뺨을 감정을 실어 치기 시작했다.

    “김혜리 씨, 집이 어디예요? 정신 좀 차려봐요. 김혜리 씨!”

    “손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좌석에 널브러진 김혜리는 승연의 구타에도 미동조차 없었다. 택시 기사의 독촉이 심해지자, 삶을 포기한 사람의 표정을 한 채 힘 빠진 목소리로 목적지를 알려 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리츠칼튼 호텔로 가 주십시오.”

    ‘부스럭, 부스럭.’

    소파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승연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반쯤 열어 소리를 찾아 고개를 살짝 돌렸다. 침대에서 큰 대자로 잠을 자던 김혜리가 조심스럽게 헝클어진 옷을 정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구두를 양손에 들고 까치발로 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말도 없이 먼저 가는 건 여전한가 봅니다. 시간당 10만 원짜리 아주 비싼 김혜리 변호사님.”

    스탠드의 불을 켜고 승연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조용히 방을 빠져나가려던 김혜리의 몸은 얼음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가물거렸지만, 승연의 입에서 10만 원이란 말이 나오자 김혜리는 똥 씹은 얼굴을 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하, 제가 어제 좀 취했나 보네요. 중요한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우리 쿨하게 잊어버리는 게 어때요?”

    “글쎄요. 제가 어제 당한 게 하도 많아서, 쉽게 잊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팔짱을 낀 채로 무뚝뚝하게 서 있는 승연의 매서운 눈초리를 벗어나기 위해 김혜리는 천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문고리가 손에 잡히자 몸을 돌리던 김혜리의 숨이 턱 막히며 승연의 손에 잡힌 어깨가 돌아가 버렸다.

    “그냥은 못 보냅니다. 부산에선 서로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맨정신이란 사실 기억하세요.”

    김혜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승연의 입술이 김혜리의 입술을 덮쳤다. 밀쳐내기 위해 승연의 가슴 밀어봤지만, 승연의 혀가 자신의 입술을 타고 넘어오자 김혜리의 몸은 힘이 빠져나간 듯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서서히 눈을 감았다. 승연의 손이 블라우스를 헤집고 들어와 브래지어 안쪽을 파고들어서야 김혜리는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침, 침대로 가 줘요.”

    한껏 몸이 달아오른 승연은 김혜리의 입술을 탐하며 침대 위로 김혜리를 넘어뜨렸다. 불빛에 드러난 김혜리의 늘씬한 나신을 감상하던 승연은 김혜리를 향해 몸을 덮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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