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5화 (152/264)
  • #175

    다시 사는 인생 - 175

    엄청난 공포감을 조장하며 떠들었던 Y2K 버그 공포는 IT버블에 한 몫을 담당하며 개인과 기업들이 불안감에 빠지게 했지만, 우려했던 대형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채, 새로운 천 년의 2000년이 시작된 지도 삼 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Y2K의 공포가 사라지면서 1999년 한해에만 주가지수가 85% 상승하면서 최고점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던 주가는 3월을 기점으로 동력을 상실하며 급속히 하강을 시작하고 있었다. 주주들의 비난과 뭇매를 맞으면서도 IT 닷컴에 투자하지 않은 워런 버핏의 IT 버블론이 다시 주목을 받으면서 투자의 귀재라는 호칭을 다시 찾고 있었다. 한국의 상황 또한, 미국과 별 차이가 없었다. 벤처 열풍의 동력을 장착한 한국 코스닥 시장은 2920 포인트를 정점으로 많은 졸부를 양산한 후 미국 시장과 함께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경환의 저택을 찾은 린다는 주가 폭락을 예측한 경환의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작년 말 구글이 오랜 월세살이를 끝내고 SHJ타운으로 이전한 후부터, 경환은 SHJ타운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있었다. 구글과 퀄컴을 오가며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차기 모델 개발을 독려할 뿐, 그룹의 전반적인 운영은 황태수와 함께 린다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그룹사옥은 지하공사가 지연되는 관계로 아직 완공되지 않아 중요한 업무가 있는 날이면 오늘처럼 저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린다는 크리스토퍼의 안내를 받으며 경환의 서재에 들어섰다.

    “제임스, 회사에도 가끔은 얼굴을 보이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하하하, 다음 달 본사사옥이 완공되면 지겹게 얼굴을 볼 텐데, 이 기회에 린다도 좀 쉬면서 일해 봐요.”

    “휴우, 말을 하는 내가 바보 같네요. 제임스가 없는데 부회장과 제가 쉴 수 있겠어요?”

    “SHJ를 감시하는 조직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한 노력이니 불편하더라도 좀 참아 줘요.”

    퀄컴과 구글의 일부 연구원을 SHJ시큐리티 소속으로 변경해 최첨단 보안시스템을 개발해 SHJ타운을 철벽 방어하고 있었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끊임없는 싸움을 위해 경환은 NSA의 첨단 도청시스템인 에셜런의 방어를 목표로 무한대의 자금을 풀어 보안시스템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120개의 위성을 이용해 전 지구에서 이용되는 통신을 감청하는 시스템인 에셜런은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정보수집 능력과 독해 능력을 갖추고 있는 시스템으로 에셜런만 방어할 수 있다면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SHJ의 작년 총 매출은 234억 불입니다. 총 매출이익은 78억 불이고, 순이익은 56억 불입니다. 주식 처분으로 예상보다 많은 25억 불을 확보했기에 SHJ타운의 2차 계획공사 자금과 한국의 투자자금엔 문제가 없는 수준입니다.”

    “다들 고생한 결과라고 봅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300% 성장에 대한 보너스 지급은 추진되고 있습니까?”

    그동안 이익 대부분을 재투자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이익배분을 할 여력이 되지 못했었다. 경환은 300%의 성장률과 함께 가용자금이 늘어난 지금 미뤄놨던 이익배분을 지시한 상태였다. 연봉제로 운영되는 고용체계 속에서 경환의 지시를 경영진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진정한 가족이라면 직원과의 이익배분에 인색하면 안 된다는 경환의 지론에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 때문에 결재를 받으려고 온 거예요.”

    작년 말 출시한 세틀러-4는 노키아와 오성전자의 후속 모델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근소한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컴페니언-3,4 시리즈는 특별한 경쟁 없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특히 터치스크린 액정을 사용한 컴페니언-4는 컴페니언 마니아들의 호평 속에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애플의 아이팟이 SHJ의 눈치를 보며 출시일을 조정하고 있는 지금 린다의 목소리엔 스트레스로 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이대로 실행하시면 되겠네요. 매출에선 뒤지지만, MS보다 높은 순이익을 달성했으니, 입 찢어질 빌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MS와의 공동전선을 구축한 관계로 애플이나 다른 경쟁업체들은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출혈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요?”

    SHJ의 매출실적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발표되면서 MS보다 높은 순이익을 기록하자, SHJ의 가치가 저평가되었다는 기업분석가들의 발표가 이어졌고, 버크셔해서웨이의 회장인 워런 버핏은 SHJ의 상장만이 추락하는 주식시장에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최고의 투자처는 SHJ밖에 없다는 말을 공식 석상에서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SHJ와 지분교환으로 주주들의 비난에 시달렸던 빌은 반대파를 일시에 잠재웠다.

    “린다, 혹시 말입니다. 부시와 고어를 놓고 봤을 때, 누가 우리에게 유리하겠습니까?”

    존 매케인의 추격을 일찌감치 따돌리고 지난주 필라델피아의 전당대회에서 조지 부시는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되었다. AEI에 2년째 기부를 하며 딕 체니와의 개인적 교분을 알고 있는 린다는 경환의 질문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실 조지 부시는 총명한 사람은 아닙니다. 러닝메이트로 거론되는 딕 체니가 실질적인 브레인이란 얘기가 들리더군요. 그에 비해 앨 고어는 너무 똑똑한 게 문제죠. 주관이 너무 뚜렷하거든요. 제임스가 딕 체니와 개인적인 교분이 있으니 공화당 정권이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번 대선은 앨 고어가 승리한다는 분석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너무 똑똑해도 문제는 문제지요.”

    말에 여운을 남기는 경환의 눈을 바라보던 린다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을 다문 채, 미간을 좁히는 경환의 표정 뒤에는 자신은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린다는 경환의 다음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보고사항은 있나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퀄컴과 구글의 인수전은 곧 진행할 예정입니다. IT버블이 터지면서 상대업체가 더 적극적입니다. 좀 뜸을 들인다면 예상치보다 낮은 금액으로 인수할 수 있을 겁니다.”

    “본사사옥이 완공되는 다음 달까지 수고해 주세요. 애플의 MP3 출시가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은데 주시하시고요.”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자 린다의 눈빛은 불안감에 살짝 흔들렸지만, 경환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결재서류를 정리한 린다는 가벼운 눈인사를 마치고 경환의 서재를 벗어났다.

    “회장님, 부회장과 쿡 사장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문제의 소지가 줄어듭니다.”

    린다의 뒤를 이어 서재에 들어온 알이 조용히 경환의 곁으로 다가왔다. SHJ시큐리티는 한국 특전사 인원을 대폭 증강하면서 그 인원이 천 명을 넘어서고 있어, 홀리버튼의 지원으로 설립된 블랙워터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SHJ시큐리타와 블랙워터가 PMC(민간군사기업)로 변질되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SHJ는 SHJ시큐리티는 SHJ타운과 계열사의 보안업무와 경호업무만 전담한다는 발표와 함께 PMC 가능성을 일축해 버렸다. 아이러니하지만, SHJ시큐리티가 장비와 인원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뒷면에는 딕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달했습니까?”

    “이상 없이 전달했습니다. 출처는 절대 알 수 없도록 조처했습니다.”

    오랜 고민과 망설임 끝에 경환이 조준한 활의 시위는 당겨졌다.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에 대해서는 경환도 자신할 수 없었지만, SHJ의 성장에 방해될 인물들은 이쯤 해서 정리를 해야만 했다. 상대가 경환의 노림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묻어둘 생각이었다.

    “알은 사장 자리가 아깝지도 않습니까?”

    “전 처음부터 사장될 재목은 아닙니다. 오히려 카일이 제격입니다.”

    알과의 대화는 항상 단답형으로 끝나곤 했다. 경환의 경호에 집중하기 위해 알은 SHJ시큐리티 사장 자리를 카일에게 미련없이 넘겨 버렸다. 경환은 알의 어깨를 두드리며 신뢰감을 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3월 말로 접어든 워싱턴DC는 추위가 풀리면서 벚꽃이 활짝 피었다. 공화당은 전당대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대선에 뛰어들 채비를 하자 백악관 부통령 사무실은 비상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며 기존업무와 대선 작업으로 사흘 만에야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던 마이클 펠드만은 녹초가 된 몸을 벽에 기대며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지친 마이클의 몸을 더욱 무겁게 했다.

    옷걸이에 걸기 위해 코트를 벗으려던 마이클은 현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서류봉투를 발견하고 몸을 숙여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봉투에는 ‘WHAT HAVE YOU GOT TO LOSE?’라는 프린팅된 글씨가 적혀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발악을 하나 보는군. 밑져야 본전이라니.’

    마이클은 밀려오는 짜증에 제법 두둑한 서류봉투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짜릿함이 몰려오며 마이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젠장. 섹스를 못 한지도 석 달이나 지났군.’

    묵직해지는 자신의 분신을 손으로 움켜쥔 마이클은 석 달 전 몸을 섞었던 스튜어디스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키며 소파에 무거운 엉덩이를 내려놓은 마이클의 눈에는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서류가 들어왔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려 눈을 돌렸지만, 평소 궁금증을 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 마이클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몇 번을 망설이다 소파에서 일어난 마이클이 쓰레기통에 박혀있는 서류봉투를 조심스럽게 찢었다. 열 페이지 정도로 작성된 문서를 꺼내 신경질적으로 넘기던 마이클의 손동작이 서서히 느려지기 시작하며, 밑져야 본전이라는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한 마이클은 벌어진 입을 손으로 막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파트 입구에 설치된 자동문이 급히 열리고 코트도 걸치지 않은 마이클이 시끄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이클의 승용차가 자리를 이탈하자,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두 명의 사내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다니엘, 웬일인가? 눈 좀 붙이려고 했더니, 쉽게 안 되는군.”

    “죄송합니다. 부통령님. 잠시 확인할 일이 생겼습니다.”

    8월에 있을 민주당 전당대회와 대선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24시간도 모자랄 정도로 하루를 보내고 있는 앨 고어는 자신을 급히 깨우는 수석 비서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잠옷 가운만 걸친 채, 다니엘을 따라 나섰다. 집무실에 들어선 앨 고어의 눈에 보좌관인 마이클의 흥분한 표정이 들어왔다.

    “부통령님,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이 서류를 한번 봐 주십시오.”

    마이클이 건넨 서류를 받아든 앨 고어는 서류에 적힌 밑져야 본전이란 글씨가 먼저 눈에 띄자, 어이가 없었다.

    “자네들 나하고 장난하자는 말인가?”

    “부통령님, 안의 문서를 먼저 확인해 주십시오.”

    화를 억지로 참아가며 봉투 안의 문서를 꺼낸 앨 고어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던 앨 고어의 표정이 심각해지며 다 읽은 서류를 조용히 책상 위에 놓았다.

    “이 서류가 공화당 진영의 역공작이라면 우리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도 있는데, FBI에 출처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나?”

    “부통령님, 출처가 의심스럽긴 하지만, 허무맹랑한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선 우리의 대선 전략은 핵심인원을 제외하고는 알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또한, 부시 진영이 IT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NMD(국가미사일방어) 시스템을 주요 이슈로 삼는다는 것은 저희도 파악하지 못한 내용입니다.”

    마이클은 클린턴 행정부와 선을 긋기 위해 클린턴 행정부의 업적 홍보를 대선 전략에서 제외, 대선 패배의 원인이 된다는 분석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득표에선 앞서고 선거인단 수에선 패배한다는 결론을 믿을 수는 없지만, 압박감을 주기에는 충분한 내용이었다.

    “마이클, 혹하는 내용이긴 하지만, 난 이 서류를 신뢰할 수는 없네. FBI에 출처와 배후에 대해 의뢰하는 게 좋겠네,”

    “부통령님, 전부를 신뢰할 수 없지만, 이 서류에서 나오듯이 전당대회가 열리는 8월 14일 만여 명이 참가하는 시위가 있을 거라는 내용에 주목해야 합니다. 시위 중에 옥시덴털 피트롤리엄 문제가 쟁점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습니다.”

    앨 고어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아버지인 앨버트 고어 상원으로부터 옥시덴털 피트롤리엄의 50만 불 상당의 주식을 물려받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자신의 치부가 시위의 쟁점으로 돌출된다면 대선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럼 어쩌자는 건가?”

    “제 느낌으론 이 시위가 부시 진영의 공작일 수도 있습니다. 문서를 전달한 사람이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8월 14일 시위가 발생한 후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니,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봅니다.”

    “좋네. 우선 이 서류는 우리 세 명만 아는 거로 하세나. 그리고 마이클 자네는 이 문서에 나온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방안을 만들어 보고.”

    앨 고어는 이 문서가 독을 품은 잔이 될지 승리를 가져다줄 축배일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 문서를 건넨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질수록, 대선 승리에 대한 욕심이 앨 고어를 휘감았다. 늦은 시간인데도 부통령 집무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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