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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74화 (15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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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사는 인생 - 174

    노을이 짙게 깔린 휴스턴 남쪽을 향해 한참을 달린 리무진 한 대와 SUV 한 대가 갈베스톤 선착장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선착장에는 외형을 봐도 최고급이라고 할 수 있는 3층 높이의 호화스러운 요트 한 척이 정박해 있었고 그 주위에 사설 경호원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주변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SUV의 문이 열리고 서너 명의 사내가 리무진의 앞 뒤에서 주위를 살피자, 턱시도 차림으로 리무진에 내리는 경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즈풍의 음악과 함께 턱시도 차림의 남성들과 몸매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파티드레스 차림의 여성들이 요트 위를 걸어 다니는 모습이 경환의 눈에 들어왔다.

    “제임스 리 회장님, 저를 따라오세요.”

    잇몸이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음을 짓는, 푸른 눈을 가진 금발 여성의 안내에 따라 알과 함께 요트에 오른 경환은 웨이터가 건네는 샴페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였다. 특급호텔의 프레지덴셜룸보다 화려하게 치장된 내부엔 휴스턴의 기업 CEO들이 삼삼오오 모여 입담을 과시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들이 짙은 향수 냄새와 함께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며 사내들의 혼을 빼놓고 있었다. 참석인원 모두가 백인들이었지만, 184CM로 동양계로는 비교적 큰 키의 경환은 그들 사이를 여유 있게 걸어나갔다. 안면이 있던 몇몇 CEO들과 눈인사를 나누던 경환 앞으로 이번 모임을 주최한 딕이 다가왔다.

    “하하하, 제임스. 오늘 모임에 참석해 줘서 고맙네. 그리고 SHJ의 활약이 너무 대단해.”

    “딕,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휴스턴에 내놓으라는 거물들은 다 모인 거 같군요.”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이 많아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네. 잠시 목이나 축이고 있게. 심심하면 맘에 드는 아가씨를 골라보고. 하하하.”

    사라지는 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환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곧 다가올 대선을 준비하기 위해 홀리버튼 사장직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는 딕은 친분이 있는 휴스턴 기업인들의 지지와 정치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은 초대를 받는 순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하는 2000년을 한 달 남겨둔 시점에서 딕의 행보는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경환은 느끼고 있었다.

    묵직한 엔진 소리와 함께 요트가 바다를 향해 출항하자, 요트 내부에 잔잔하게 흐르던 재즈 음악은 시끄러운 기계음이 섞인 빠른 비트의 음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가슴이 드러날 정도의 아슬아슬한 파티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성들이 하나둘 중앙으로 모여 남자들을 유혹하는 듯 몸을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경환을 향해 몇 명의 여자들이 끈적거리는 시선과 함께 손을 뻗쳤지만, 경환은 웃음을 보이며 정중히 거절할 뿐이었다. 그러나 경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환의 아랫도리는 흐느적거리는 뇌쇄적인 여자들의 몸짓에 서서히 반응하고 있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휴우, 나도 남자라고 늘씬한 여자를 보니 반응이 오네요. 정신 좀 차려야겠습니다.”

    어두운 조명과 젊은 여자들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야릇한 향수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경환은 서둘러 밖으로 나오자 알이 급히 다가왔다.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한 경환은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 요트의 최상부인 3층으로 향했다. 실외에서 대기하던 알과 함께 요트 3층에 오른 경환은 요트 가운데 위치한 자쿠지에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급히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자쿠지 안에 있는 일부 여자는 상의를 풀어헤쳐 풍만한 젖가슴을 그대로 노출하며 경환을 향해 들어오라며 손짓까지 하고 있었다.

    웨이터가 건네준 위스키를 단번에 마신 경환이 자리를 옮기기 위해 몸을 돌리자, 40대 후반의 남성이 경환에게 다가갔다.

    “SHJ의 제임스 리 회장님이시군요.”

    “제가 기억력이 떨어지다 보니, 실례지만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

    “내년부터 AEI(미국기업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게 될 데이비드 프럼입니다.”

    경환은 어정쩡한 자세로 악수를 받으며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AEI의 소장이라면 네오콘의 전략을 수립하는 연구소로 데이비드 역시 네오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딕 역시 AEI의 이사인 관계로 데이비드가 AEI의 소장으로 부임한다는 것은 대선을 준비하는 포석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축하합니다.”

    “리 회장님의 지원이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변함없이 같은 금액을 기부해 주셨더군요. AEI를 대신해 감사를 전합니다.”

    경환은 데이비드를 향해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경환은 딕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올해도 민주, 공화 양당에 SHJ 명의로 500만 불, AEI엔 경환의 명의로 200만 불을 기부했다. AEI의 일 년 예산이 2천만 불임을 고려할 때, 200만 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이뤄진 기부였지만, 경환은 울분을 삭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AEI의 연구 방향이 제 관심을 끌었을 뿐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정책을 연구해 주십시오.”

    데이비드와의 합석이 불편했던 경환은 말을 끊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 바람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도수 높은 안경을 매만지던 데이비드는 자리를 벗어나려는 경환을 향해 충격적인 말을 건넸다.

    “리 회장님을 AEI 이사로 선임하려고 딕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사들 간의 이견을 조율 중이긴 하지만, 딕이 나선 이상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래요? 금시초문입니다. 제가 AEI 이사라니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경환은 어이가 없었다. 네오콘의 싱크탱크인 AEI에 이사로 선임하려는 계획은 결국 안정적인 연구소 운영자금을 경환의 주머니에서 뽑아내겠다는 딕의 생각이란 사실에 화가 솟구쳤지만, 데이비드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권 교체가 이뤄진다면 미국의 정책은 크게 변하게 될 것입니다. AEI에 큰 지원을 해 주신 회장님 같은 분이 이사로 선임이 된다면 저희도 큰 힘을 받게 될 거라고 봅니다.”

    경환은 가타부타 말없이 데이비드를 향해 가볍게 고개만 숙인 후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끄러운 1층의 분위기를 피해 2층으로 자리를 옮긴 경환은 반라의 여자 손에 이끌려 요트 안에 마련된 방으로 사라지는 남자들 사이를 지나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국제정세는 요동치게 되고, 9·11사태로 발생하는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SHJ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딕의 제안을 받아들여 AEI 이사에 선임된다면 당분간 막대한 이득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은 아니었다.

    “제임스, 여기 있었군. 한참 찾아다녔네.”

    “촌스럽게 뱃멀미가 와서 쉬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천하의 제임스가 뱃멀미라니 재밌군. 맘에 드는 아가씨는 없었나?”

    “제 아내보다 예쁜 아가씨는 없더군요.”

    일 년 후면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통령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딕이었지만, 클린턴 행정부의 정책들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으며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 싸움은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다는 분석이 도처에서 나오면서 딕의 초조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데이비드는 이미 만났다고 하던데, 내가 추진하는 계획이 맘에 들지 않는 건가?”

    “물론 제 개인적인 정치성향으로 AEI를 지원하고 있지만, 기업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대선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는 최대한 딕을 후방에서 지원할 생각입니다. AEI 이사 건은 당분간 접어 주십시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던 조지 소로스를 내치면서까지 잡았던 경환이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딕은 아쉬운 표정을 보였다. 그러나 개인 자격으로 대선에 한 손 거들겠다는 경환의 말에 딕은 아쉬움을 애써 감출 수밖에 없었다.

    “제가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민주당의 주목을 받게 될 것입니다. AEI 이사 선임은 우리 두 사람에게 좋은 결정은 아니라고 봅니다.”

    딕이 대선에 가까워지면서 홀리버튼의 회계조작과 적성국가들과의 불법거래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CEO인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고 있었다. AEI 이사 선임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회자된다면 결코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는 경환의 말에 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뜻을 알겠네. 그건 그렇고 내가 자네를 찾은 이유는 누굴 소개해 주고 싶어서야. 마침 그 친구도 올라왔으니 인사나 나누게.”

    경환은 딕의 뒤로 다가오는 남자를 확인하고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네스 레일 회장님,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제임스 리입니다.”

    “오, 휴스턴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SHJ의 오너를 만나게 돼서 저도 영광입니다.”

    휴스턴에서 가장 뜨거운 뉴스를 일으키고 있는 기업을 꼽자면 경환의 SHJ와 케네스의 엔론이었다. 엔론은 미국 최대의 에너지 기업으로 각광을 받으며 포춘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가운데 7위의 초우량 기업으로 리스팅될 정도였다. 경환은 케네스의 출현으로 이 초호화 요트와 모임이 딕이 아닌 케네스가 만든 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2년 후면 300억 불이 넘는 부채와 함께 사라질 운명의 엔론이었지만, IT버블의 최고조에 도달한 지금 엔론의 도산을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SHJ는 소유한 주식을 모두 정리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분석으로는 성급한 결정이라고 하던데,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가요?”

    딕의 눈빛까지 반짝이며 경환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두 사람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나오자 경환은 숨을 고르며 위스키를 입술에 적셨다.

    “글쎄요. 저희는 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분석에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느 정도 이익도 실현했고 일부 자금도 필요하다 보니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IT버블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99년 하반부터 나오기 시작하며 FRB는 과열된 주식시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인상하는 정책으로 주식으로 몰리는 투기자본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과열될 대로 과열된 주식시장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한번 부풀어 오른 거품은 터질 때까지 기다릴 뿐 없애는 방법은 없었다.

    “제임스, 엔론에 대해선 자네도 잘 알 거라 믿네. 자네가 필요하다면 엔론에 투자하는 길을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네의 부탁이고, IT를 선도하는 SHJ의 투자라면 내 기꺼이 환영하겠네.”

    경환은 기가 막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80불에 달하는 주가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40센트로 떨어져도 거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환은 두 사람의 작당에 호구가 된 기분이었다. 경환은 딕과 케네스는 이미 엔론의 내부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만큼 두 사람은 죽이 척척 잘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이런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무척 아쉽습니다. 세틀러-4와 컴페니언-3,4 시리즈가 출시되고 다음 모델을 개발하려다 보니 자금이 상당히 달립니다. 돈 벌 기회를 눈앞에서 놓치다니 정말 억울한데요.”

    “여유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잘 고민해 보게. 필요하다면 나한테 연락하고. 그나저나 SHJ가 지금보다 안정적인 성장을 하려면 주식이 활황인 이때에 기업공개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금이 있어야 성장도 있다는 건 기본인데 그걸 자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지.”

    경환은 딕의 이 말을 한 귀로 흘릴 수 없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딕의 기업공개에 대한 말이 경환을 신경 쓰이게 했다. 경환의 딕의 의중을 살필 필요를 느꼈다.

    “제가 욕심이 좀 많습니다. 지금 SHJ를 공개해 봐야 푼돈밖에 손에 쥐질 못하는데 이 정도에 만족하려면 시작도 안 했습니다. 적어도 MS에 근접했다는 분석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입니다. 딕과의 약속은 잊지 않고 있으니 딕도 때를 기다려 주십시오.”

    “사람하고는, 하긴 그 정도 배포는 가지고 있어야지. 자네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거의 내 또래와 대화를 나누는 거 같은 착각에 빠지더라고. 나도 힘껏 자네를 도와주겠네.”

    진심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경환은 딕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뜬금없이 케네스와 작당해 엔론의 블랙홀에 빠트리려는 모습이 진심인지 도와주겠다는 모습이 진심인지 쉽게 구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요트 안엔 광란의 밤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엔진 소음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요트가 선착장에 접안을 하자, 젊은 여성들과의 밀회를 끝낸 사내들이 하나둘 방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대선준비로 바쁜 딕과는 당분간 부딪힐 기회는 없었다. 경환은 딕의 백악관 입성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정도로만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딕과의 만남을 끝으로 길었던 1999년은 서서히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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