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다시 사는 인생 - 173
아시아본사를 위해 출장을 다녀온 지 반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고 우려했던 중국의 보복조치는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었다. SHJ는 중국의 보복을 대비하는 매뉴얼을 항시 가동하고 있었고 일본에 이어 한국과 중국에 서비스를 시작한 구글은 구글스토어와 애드센스의 영향력에 힘입어 그 사용자를 크게 늘려갔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구글 이메일이 반체제 세력들의 연락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점을 들어 SHJ에 서서히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CDMA로 SHJ퀄컴의 협조가 필요한 상태에서 SHJ를 제재하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중국정부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었다.
한국정부는 대후그룹의 자구계획을 받아들여 일시적으로 자금을 풀어주었고, 소유한 지분과 개인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경영에서 물러난 김현태를 대신해 김준성이 대후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SHJ는 이에 화답하며 대후건설과의 합작을 통해 사우디 해수담수화플랜트와 나이지리아 FPSO 입찰에 성공했고 앙골라에서 발주한 FPSO 입찰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대후통신과 대후정보시스템의 지분을 주식매수청구권을 통해 100% 인수, SHJ퀄컴에 합병시키고 대후그룹의 유동자금에 숨통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대후엔지니어링의 인수작업은 우리사주 측의 과도한 요구와 한국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인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했지만, 대후그룹은 경영정상화를 위해 뼈를 깎는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시아본사를 한국으로 결정한 SHJ는 1차로 50억 불의 투자금을 조성 단계적인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SHJ퀄컴의 생산공장은 대현그룹의 부지를 임차하는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어 더 이상의 증축이 어렵다고 판단, 제2의 SHJ타운이 조성될 부지를 서둘러 확보할 예정이었다. 이런 소문은 죽어가던 부동산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지만, SHJ타운이 들어설 지역이 어디일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아시아본사의 한국유치로 일본정부의 불만이 극에 달했지만, SHJ는 일본 휴대폰 제조사와의 합작을 늘리고 JSC와 LNG 플랜트공사를 시작으로 플랜트 부문의 기술제휴와 합작을 증가하는 선에서 일본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다.
디지털카메라를 장착한 세틀러-3의 성공은 휴대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면서 경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 지고 있었다. SHJ퀄컴은 카메라 화질을 높이고 선명한 화질을 위해 TFT LCD 액정과 함께 간단한 게임을 포함한 폴더형태의 세틀러-4를 준비하고 있었고, 아직 마땅한 적수가 없는 MP3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오성전자에서 개발한 4G 플래시메모리를 장착한 컴페니언-3와 터치스크린 방식의 컴페니언-4의 동시 출시를 계획하고 있었다. 아직 스마트폰의 기초가 될 OS의 개발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틀러를 추격하기 위한 경쟁업체들의 물량공세를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출근하며 저택 서재에서 그룹을 경영하던 경환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린다, 황태수와 함께 검게 탄 얼굴을 한 잭이 경환을 맞이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잭,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이번 해수담수화플랜트 입찰 성공은 잭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쉬게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불러들여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휴스턴은 아직도 불편합니다.”
거칠면서도 호탕하고 친절한 텍사스 주민들이라 하더라도 배신자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를 하지 않았다. 그건 멕시코와의 영토분쟁 시 알라모 전투에서 3천 명의 멕시코 병사를 맞이해 187명의 인원으로 십 일을 버티다 몰살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항복과 배신을 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삼자인 경환의 입장에서는 멕시코의 땅을 무력을 통해 빼앗은 치졸한 영토전쟁이었지만, 알라모 전투에 대한 텍사스 주민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KBR을 배신했다는 낙인이 퍼진 잭을 휴스턴은 자유롭게 놔두지 않았다.
“시간이 아직 더 필요할 뿐입니다. 조안나와는 상의해 보셨나요? 잭의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잭, SHJ에서만큼은 잭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는 더는 존재하지 않아요. 회장님도 잭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한다고 했고요.”
능력 있는 잭을 사우디에 박아둔다는 것은 성장해가는 SHJ에 큰 손해라고 경환은 판단했다. 그룹기획실과 SHJ플랜트를 맡은 황태수의 과도한 업무를 풀어주기 위해 경환은 SHJ플랜트와 SHJ아시아본사의 사장 자리를 놓고 잭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잭은 큰 한숨을 내쉬면서 어렵게 입을 열었다.
“힘들긴 했지만, 사우디가 저에겐 편했습니다. 그러나 식구들과 오래 떨어져 있다는 게 쉽지는 않더군요. 조안나는 제 의견을 따라 주겠다고는 하지만, 아직 휴스턴이 불편한 것도 사실입니다. 회장님께서 반대하지 않으신다면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
“하하하, 제가 왜 반대를 합니까? 오히려 잭의 바지를 붙들고 부탁해야 할 상황인데. 한국은 제 모국이기도 하지만, 제2의 SHJ타운을 조성할 정도로 우리에겐 상당히 중요합니다. 잭이라면 저도 걱정 안 하고 맡길 수 있을 거 같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환은 아시아본사를 한국으로 결정하고 잭을 사장으로 미리부터 점찍어 놓았다. SHJ아시아본사의 한국 설립이 발표되기 무섭게 한국정부는 자기 사람을 SHJ에 심기 위해 이력서 몇 부를 보내는 민첩함을 보여 줄 정도로 SHJ의 투자에 관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복잡한 한국의 정치 상황과 국제관계를 풀어가기에는 코이치나 박화수는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이런 문제를 강단 있게 풀어갈 인물로 잭만 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잭, 고맙습니다. 당분간 조안나와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세요.”
경환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 예약된 하와이 왕복 항공권과 호텔바우처를 잭에게 건네주었다. 아람코의 텃세에도 사우디 합작공장을 궤도에 올려놓는 일은 잭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망설이며 경환이 내민 봉투를 받아든 잭은 경환과 악수를 한 후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제임스. 잭에게 항상 빚을 지고 있었어요.”
“린다는 별말을 다 하네요. 이제부턴 잭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SHJ홀딩스는 어렵겠지만, SHJ플랜트의 일정지분을 잭에게 주는 방안을 검토해 보세요.”
“알겠어요. 그런데 제임스는 아시아본사를 어느 규모로 키울 생각인 거예요?”
“휴스턴 본사와 같은 규모라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린다는 잠시 머리에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한국정부와 매번 각을 세우는 경환이지만, 경환이 모국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르다는 것은 외환위기에 개입하는 걸 보며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과 중국을 들러리 세우면서까지 아시아본사가 한국에 설립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었다. 린다는 농담처럼 던지는 경환의 말을 흘려듣지 못했다. 경환은 린다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자 급히 화제를 바꿨다.
“며칠 전 제이콥스 사장과 식사를 같이 하며 SHJ퀄컴의 수익이 대폭 증가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금년도 예상치는 어느 정도인가요?”
“목표치를 훨씬 웃돕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폭발적인 수요도 있었지만, 오성전자와 금성전자의 CDMA 휴대폰 판매가 성장한 이유도 있습니다. 10월 기준으로 매출 102억 불, 영업이익은 25억 불입니다. SHJ구글 또한, 올해 53억 불의 매출을 기록해 적자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플랜트 부문은 작년보다 조금 높은 55억 불입니다.”
남은 두 달의 매출을 합친다면 올해 목표치인 100억 불을 넘어, 220억 불 달성은 무난해 보였다. 작년의 74억 불과 비교해 세 배 가까운 성장을 했지만, 280억 불에 달하는 오성전자의 매출에도 아직 미치지 못했기에 경환의 표정은 그리 밝을 수 없었다. 그나마 SHJ구글이 40배를 넘기는 성장을 했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었다.
“보유한 주식 처분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지난달부터 처분하고 있습니다. 이번 달 말쯤이면 계획대로 모두 처분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주식 처분을 완료하면 22억 불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업체를 선정해 내년 말부터 매입을 시작하세요. 그리고 확보된 자금 일부는 설립된 재단에 납입하세요.”
아시아본사가 결정된 후, SHJ는 사회에 이익을 환원한다는 계획하에 K & S 재단을 미국과 한국, 동시 설립을 추진했다. 비영리 재단인 K & S는 경환의 사비를 이용해 설립된 재단으로 경환은 미국과 한국의 재단에 각 1억 불의 현찰과 경환이 소유한 SHJ홀딩스의 지분 3%씩을 기부하여 재단이 자금압박을 받지 않고 운영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경환은 재단을 통해 미국과 한국의 공과대학과 손을 잡고 신기술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한편, 직업훈련원을 설립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시켜 주었다. 물류와 플랜트, 기계조립과 환경 등으로 과목을 세분화해 기업들이 필요한 실무를 가르쳤고, 직업훈련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학생들은 SHJ에 입사를 보장해 주어 학생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SHJ와 별개라고는 하지만, 부회장님이 재단 업무를 챙겨주십시오. SHJ가 좀 더 성장한다면 K & S를 각 나라로 확대할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잭이 플랜트를 맡아 준다면 재단 일에 저도 한 손을 거들겠습니다.”
“그리고 빌이 전달해 준 정보로는 애플이 내년 상반기에 신형 MP3를 선보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린다는 애플이 선보일 MP3와 관리 플랫폼이 우리가 가진 특허를 원천사용료를 내지 않고 침해했는지를 살펴, 의혹이 있다면 바로 소송을 진행하세요. 초장에 애플을 잡지 못하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습니다.”
“MS에서 받은 정보를 토대로 퀄컴과 구글, MS의 연구진들까지 합류해 침해 여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발견된다면 로펌과 소송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퀄컴과 구글이 대규모 기업 인수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애플도 일 년을 앞당겨 아이튠즈와 함께 아이팟을 선보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맥의 약발이 떨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아이팟의 개발은 스티브 잡스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경환은 스티브 잡스가 컴페니언과 구글스토어가 만든 시장에서 날뛰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타당성을 검토해 필요한 기업이라면 승인하겠습니다. 앞으론 기술과 디자인 싸움입니다. 내년 IT버블이 터지는 시점을 이용한다면 낮은 가격으로 인수합병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모자란 기술을 확보하는 일이라면 돈을 아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두 회사 경영진들에게 확실히 주지시키십시오.”
“알겠습니다. 한국의 IMT 2000 사업은 제일텔레콤과 금성텔레콤 신세계가 CDMA 2000을 선택할 거 같습니다. 그리고 IMT 2000에 맞춰 동영상 멀티서비스가 가능한 세틀러-5의 개발은 이미 완료한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만족합시다. 지금부터는 SHJ구글의 OS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컴페니언과 세틀러는 그 밑바탕을 깔기 위한 서막에 불과하니까요.”
경환은 자신의 회귀로 인해 기술의 진보가 빨라지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내년에 있을 주식의 폭락 등 전 세계가 동요하는 굵직한 사건들은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것도 SHJ의 성장과 함께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경환은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회장님.”
내년에 있을 애플과의 본격적인 경쟁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에 대해 고민하던 경환에게 황태수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네, 부회장님. 중요한 얘기는 끝낸 거 같은데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지난번 지시하신 존 해밀턴 대령과 관련된 일입니다.”
경환은 하던 일을 멈추고 황태수를 바라봤다. 경환은 존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황태수에게 지시했고, 황태수는 알의 협조를 받아 SHJ시큐리티의 정보팀을 움직일 수 있었다. 반년이 지난 후까지 특별한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경환은 존의 일을 잊고 있었다. 최첨단 장비와 최고의 인력으로 구성된 정보팀을 활용하고도 반년이 지난 후에야 보고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경환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특별한 내용이 있나요?”
“저, 그게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회장님께서 만났던 존 해밀턴이란 인물은 실체가 없는 인물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제가 만난 인물은 누굽니까?”
“펜타곤에 존 해밀턴 대령은 실존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대조한 결과 다른 인물로 판명되었습니다. 제이콥스 사장에게 확인한 바로는 우리가 퀄컴을 인수한 시점에 펜타곤의 연락관이 존 해밀턴으로 대체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 탐문을 하고 있으니 정보가 입수되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SHJ시큐리티는 이 문제를 계기로 보안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있습니다.”
경환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한국정부 내부의 정보를 입수할 정도라면 단순한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자신을 숨기며 접근한 인물을 신뢰할 수는 없었다. 경환은 한국에서 전달받았던 문서의 내용을 머리에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