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2화 (149/264)

#172

다시 사는 인생 - 172

다음 날 정아의 결혼식으로 경환은 한바탕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양가 친척들만 참석하는 조촐한 결혼식을 계획하고 축의금과 화환도 일절 받지 않겠다고 선포했지만, 상황은 경환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나신호텔 보안팀들은 SHJ시큐리티의 요청에 따라 제출된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을 호텔 입구부터 차단하고 있었지만, 경환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아침부터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호텔 입구는 입장을 막는 자와 들어가려는 자들 간에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경환과 일면식도 없는 야당과 여당의원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회장님, 죄송하지만, 잠깐 시간을 내셔야겠습니다.”

평소에 만나기 힘들던 친척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있던 경환에게 하루나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하루나가 자신의 시간을 방해할 정도면 급한 일이란 것을 알아챈 경환은 하루나를 따라 호텔에 준비된 접견실에 들어섰다.

“하하하, 이 회장님. 동생분의 결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대통령께서는 화환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셨지만, 회장님의 의견을 존중해 빈손으로 왔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조용히 치르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다 보니 일본대사도 보이더군요. 일본으로 SHJ 아시아본사가 유치된다는 소문이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 하하하.”

대통령 비서실장인 김우상의 방문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어제 있었던 해밀턴 대령과의 만남으로 한국정부의 입장변화를 알고 있었고 자신감 넘치는 김우상의 태도에서도 무슨 말이 입에서 나올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한국에 대한 지나친 개입으로 SHJ가 주목받게 된 상황은 경환 자신에게도 큰 약점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눈을 가리기 위해서는 최대한 SHJ가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아직은 모든 게 미정입니다. 저는 SHJ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장님께서 어려운 발걸음을 하신 걸 보면 아마 좋은 소식이겠군요.”

“흠, 흠. 이해합니다. 대후그룹은 한 달 안으로 그룹 회장의 퇴진과 함께 자구책을 내놓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SHJ에서 요청한 대후건설과의 합작에 따른 이행보증은 주거래은행을 통해 진행될 겁니다. 정부가 나선다는 게 형평성에 어긋나기도 하고요.”

강경할 줄 알았던 한국정부의 태도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경환은 고민이 앞섰다. GM만 하더라도 눈엣가시인 대후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대후의 해체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한국정부의 결정은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제가 관심 가질 부분은 아니지만, 대후자동차의 어떤 식으로 처리될 거 같습니까?”

“작년에 인수한 쌍용자동차를 다시 매각하는 수준의 자구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김우상의 말로 GM의 대후자동차 인수는 사실상 진행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대후그룹의 자구 노력이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대후를 압박할 수 있는 여지를 있어 보였다. 그러나 경환은 이 정도 선에서 물러날 생각이었다. 한국정부의 이행보증은 받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대후의 계열사를 인수하고 플랜트공사가 시작된다면 급한 자금압박에선 벗어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김현태 회장이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국정부의 양보를 다시 얻는다는 건 불가능했고 경환 자신도 두 번 다시 대후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통령께서는 큰 결단을 하셨습니다.”

김우상은 우리도 할 만큼 했으니 너도 줄 건 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듯이 경환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 결정이 한국정부의 의지인지 다른 세력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인지 지금 경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대후 해체로 인해 한국 경제가 후퇴하고 중국으로 대후의 기술이 빠지는 것을 막았다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이 이상의 감정싸움은 한국정부를 자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제를 생각하시는 대통령님의 결단에 기업인으로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 SHJ의 투자방향은 제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발표되겠지만, 한국의 생산기반이 타국으로 이전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 그럼 SHJ 아시아본사가 한국으로 결정되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경환은 김우상의 독촉에도 말을 아꼈다. 이 자리에서 확답을 주기라고 한다면 한국정부는 서둘러 유치 결정을 발표할 것이고 이것은 일본과 동남아시아 시장을 자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종 판단은 SHJ 경영진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한국정부의 노력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SHJ의 결정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정치 연륜이 많은 김우상은 경환의 말뜻을 이해하며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일을 만족스럽게 끝낸 김우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환에게 악수를 건넸다. 가장 힘들게 생각했던 한국정부와의 협상은 서로 만족할 만한 선에서 타결을 본 경환은 접견실을 빠져나가는 김우상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결정이 한국정부 스스로 판단한 선택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김우상과의 만남을 끝내고 식장에 돌아온 경환은 웨딩드레스를 입고 식장에 들어가는 정아와 하객들의 축하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부모님을 보며 막연한 불안감이 경환을 사로잡았다. 희수를 다시 보기 위해 선택한 회귀였고 그 바람을 모두 이뤘다는 기쁨보다는 지금 가진 이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민하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이것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경환은 자신에게 되묻고 있었다.

“아빠, 안아줘.”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경환에게 희수가 아장아장 걸어와 팔을 벌렸다. 경환은 희수를 번쩍 안아 들고는 볼에 입을 맞췄다.

“고모 예쁘지? 희수가 결혼하면 아빠 많이 슬플 거야.”

“난 싫어. 아빠하고 살 거야.”

경환은 씩 웃으며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어떤 놈이 희수를 데려갈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은 그놈을 절대 좋아하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희수는 큰 눈을 끔뻑거리며 조그만 입을 오물거렸다.

“아빠, 나 불쌍한 애 봤어. 아빠가 껌 다 사주면 안 돼?”

“희수야. 그게 무슨 말이야?”

경환은 희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희수를 안은 상태로 급히 수정을 찾았다. 희수를 데리고 친구들과 만나러 간 자리에서 정우 또래의 아이가 껌 파는 것을 보고 껌을 사라며 떼를 부렸다는 수정의 말에 경환은 마음이 찡해옴을 느낄 수 있었다.

“껌 파는 아이가 불쌍해 보였니?”

“응, 걘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잖아. 근데 엄마가 껌 안 사 줬어. 아빠 돈 많으니까 아빠가 사 줘. 알았지?”

“그래, 알았어. 아빠가 다시 만나면, 꼭 다 사줄게.”

경환은 먹먹해지는 가슴을 고쳐 잡으며 희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남을 위해 희생만 하던 희수의 옛 모습이 떠오른 경환은 희수로 인해 막혔던 생각이 뚫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수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까지 한 경환은 희수를 품에 안고 정아의 결혼식을 끝까지 지켜보며 전생과는 달리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십여 일의 길다면 길었던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경환과 가족들은 크리스토퍼의 환대를 받으며 저택에 들어섰다. 영국왕실의 집사는 괜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택 내부와 외부의 정원은 깔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며칠 가족과 휴식을 취하며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던 경환은 SHJ 계열사 경영진을 저택 회의실로 소집했다.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SHJ 그룹사옥이 완공되기 전까지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번 출장을 통해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번 출장의 성과와 중국과의 감정싸움으로 인해 불거질 중국정부의 보복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햐, 제가 만들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정말 멋있는 저택이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서 사시는 우리 회장님, 부럽습니다.”

“그럼 바꿔 드릴까요?”

최석현이 회의실에 들어오며 너스레를 떨자 경환은 먹잇감을 찾은 하이에나의 음흉한 눈빛으로 농담을 받아 주었다.

“거, 최 사장은 회장님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꼭 매를 벌어요.”

“하하하.”

황태수가 나서 핀잔을 주자 회의실의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한국에 나가 있는 코이치와 박화수를 제외하고 SHJ의 공신들이 다 모인 자리는 경환을 든든하게 해 주었다. 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춘 경환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꼭 먼저 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SHJ에 닥칠 수도 있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있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익을 나누는 사이가 아닌 진정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가족이 잘 먹고 잘살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린다를 비롯해 어윈과 에릭은 경환의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었다. 기업은 고용인과 피고용인으로 구분되고 피고용인의 노력을 고용인이 금전으로 보장해 주는 것으로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단순한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를 떠나 자신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개인적인 문제에도 귀 기울여 주는 경환의 변함 없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SHJ타운이 완공되고 모든 직원이 한울타리 안으로 모인다면 가족이라는 의미는 직원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지길 바라고 있었다.

“그럼 먼저 쿡 사장님이 정리를 좀 해 주십시오.”

“오늘 한국정부에서 대후에 대한 자구노력을 위해 한 달을 유예기간으로 주고 유동자금 압박을 일시적으로 풀어줬습니다. 또한, SHJ와 대후건설의 플랜트합작이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한국정부의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일본의 파격적인 조건이 있긴 하지만, SHJ퀄컴의 생산기반이 한국에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본사는 한국에 설립하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경환의 마음을 읽었는지 린다는 아시아본사를 한국에 설립한다는 계획을 수립해 경환에게 보고했다. 경환은 황태수를 바라봤다.

“회장님, 동경지사를 확대하고 SHJ퀄컴과의 기술제휴를 확대하는 조건이라면, 일본정부의 불만은 잠재울 수 있다고 봅니다.”

“알겠습니다. 아시아본사에 대한 계획 발표는 부회장님이 주관해 주십시오. 그리고 가장 골치 아픈 중국과의 불협화음은 어떻게 정리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중국이라는 큰 시장은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끝내 중국정부가 SHJ와 평행선을 유지하겠다고 한다면 경환은 미련 없이 중국을 포기할 뜻도 가지고 있었다. 마땅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자 어윈이 급히 나섰다.

“중국과는 테스트 기간을 거쳐 올해부터 본격적인 CDMA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GSM의 독과점에 치를 떠는 중국엔 아직 우리가 필요합니다. 혹시라도 보복조치를 취한다면 치사한 방법이긴 하지만, CDMA 칩셋 수출을 중단하고 중국과의 기술제휴를 보류할 수도 있습니다. 로펌과 상의해 혹시 모를 소송에 대한 법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장 보복조치가 이뤄지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만, 준비는 해 놓으십시오. 한국정부와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시고 불법복제와 관련해 MS에 협조를 구하십시오.”

경환은 중국정부가 명분을 얻기 전에는 보복조치를 쉽게 강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정부와 SHJ 누구에게 명분이 먼저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경환은 미끼를 던져 볼 생각으로 에릭에게 질문을 던졌다.

“슈미트 사장님, 최소한의 자본으로 중국 진출을 검토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물론 중국정부에서 인터넷 통제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것은 알지만, 로펌을 통해 계약서 조항을 최대한 두루뭉술하게 만들어서요. 중국이 구글 서비스를 중단한다면 명분이 우리 손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중국사용자들의 불만을 조성할 수도 있고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손해 봐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자금으로 명분을 얻게 된다면, 결코 실패한 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의 OS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구글이 중국에서 버텨주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회장님, 지시하신 재단 설립과 관련해 몇 가지 방안을 만들었습니다.”

황태수가 건네는 재단설립 계획서를 받아든 경환이 천천히 서류를 넘겼다. 경환의 의견과 세무변호사의 조언을 가미한 계획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창피하긴 하지만, 이 재단 설립과 관련해서 제 딸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단순한 보여주기 위한 재단보다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재단이 되도록 할 생각입니다.”

“네? 희수가 도움을 줬다고요?”

아직 세 살인 희수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에 최석현이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경환은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자, 그렇게들 알고 계시고 식사가 준비되어 있으니, 같이 술 한잔 하면서 회포나 좀 풉시다.”

저택 외부에 조성된 연회장으로 경영진을 이끈 경환은 SHJ타운이 완공되기 전까진 본사 출근을 최소한으로 자제하고 저택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을 밝힐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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