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71화 (148/264)

#171

다시 사는 인생 - 171

SHJ의 전세기와 경환의 전용기가 차례로 창이국제공항에 도착했다. SHJ가 중국정부와의 대립으로 눈에 띄는 결과물 없이 중국을 떠났다는 사실은 싱가포르엔 희소식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싱가포르는 중국과는 반대로 실질적인 투자와 고용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SHJ에 집중하자 빌 게이츠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경환의 일정에 동행하며 숟가락을 얹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SHJ와 합의한 일정에 더해 전 총리인 리콴유까지 나서 경환과 단독면담을 할 정도로 SHJ의 투자를 이끌어 내기 위해 공을 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SHJ는 싱가포르의 정성에 화답하듯 SHJ 싱가포르지사 설립을 결정하고 SHJ구글의 동남아시아 서비스 거점을 싱가포르로 선정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싱가포르가 원하는 SHJ 아시아본사 유치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중국과 달리 시간단위로 이뤄지는 빡빡한 일정으로 SHJ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 싱가포르정부는 급기야 싱가포르국립대학교에서의 강연까지 요청해와 경환을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빌은 예정된 골프까지 취소한 경환에게 하소연했지만, 중국에서 대접받은 거로 비긴 셈 치자는 경환의 말에 투덜거리던 입을 닫아버렸다. 대학강연까지 포함해 빡빡한 2박 3일의 싱가포르방문을 마친 경환은 린다와 함께 실무진을 휴스턴으로 보낸 후 정아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서울로 향했다.

“회장님, 이번 싱가포르 방문은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고 봅니다.”

SHJ시큐리티 인원보강을 위해 한국 특전사 출신을 채용하는 일은 최종면접만 남겨 놓고 있었다. 최석현은 알과 함께 최종면접을 진행하기 위해 전용기에 동승해 있었다. 경환은 읽던 책을 갈무리하고 최석현을 바라봤다. 싱가포르의 환대를 성과라고 생각하는 최석현의 말에 경환은 인상을 찡그렸다.

“싱가포르도 화교자본으로 움직이는 국가입니다. 초록은 동색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싱가포르지사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아우르며 화교자본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 점을 항상 기억하세요.”

동남아시아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며 뿌리 깊게 박혀있는 화교자본은 유대 자본만큼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화교자본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이 유일할 정도로 아시아 내에서의 화교자본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경환의 질책에 최석현은 헛기침을 연신 내뱉으며 경환의 시선을 피하며 알의 뒤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알, 직원 채용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한국 출신들의 실력이 의외로 상당해서 놀랐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직원들의 실전을 방불할 정도의 테스트를 대부분 통과했다고 합니다. 1차로 백 명 정도 채용할 예정입니다. 성과를 봐서 인원을 늘릴 생각입니다.”

“개인적인 실력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람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영어 교육과 함께 충성심을 높일 수 있는 교육에 중점을 두세요.”

“알겠습니다. 카일이 새로운 방식의 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 SHJ시큐리티 인원은 건물 경비를 제외하고 실제 전투에 투입할 수 인원만 육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지만, 경환은 엄청난 숫자에도 인원을 충원하라는 지시만 내리고 있었다. 최석현과 알은 경환이 SHJ시큐리티에 집착하며 규모를 키우려는 의도가 궁금했지만, 경환에 대한 믿음 때문인지 반론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최석현은 SHJ 그룹사옥과 경환의 저택 지하로 연결되는 공간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추측만 할 뿐 경환이 무엇을 대비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며 미국의 SEAL이 가지고 있는 장비 이상으로 SHJ시큐리티를 무장시키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회장님, 한 시간 후에 김포공항에 도착합니다. 가볍게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김혜원 사무장. 커피만 한 잔 주세요.”

며칠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경환은 수정과 아이들이 몹시 그리웠다. 첫사랑과 사는 게 이런 기분일지는 모르겠지만, 경환은 수정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경환은 앞좌석에서 일정을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는 하루나를 슬쩍 쳐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경환은 준비된 리무진을 이용해 나신호텔로 향했다. 아직 한국정부의 답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오성그룹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환은 오성그룹의 요청을 받아들여 내일 있을 정아의 결혼식을 나신호텔에서 하기로 하고 수정과 아이들의 숙소를 나신호텔로 옮겼다.

호텔에 도착한 경환은 식구들과 잠시 시간을 같이 보낸 후 이번 출장에 동행한 존 해밀턴 대령과의 만남을 위해 호텔에 준비된 사무실로 내려갔다. 경환이 중국과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동한 한국에 남아 있던 존은 이미 회의실에 도착해 경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제임스 리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해밀턴 대령님. 급한 용건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제가 다른 일정이 있어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는 없습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존은 다부진 체격과 함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어 한 눈에도 군인임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존을 움직이는 조직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경환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펜타곤이나 NSA, CIA 소속이라면 딕과 어느 정도 선이 닿고 있는 인물이라는 판단이 들긴 하지만, 원만한 관계가 형성된 딕이 존을 이번 출장에 동행시켰다는 정황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의 일은 상당히 의외였습니다. 중국이 SHJ에 대한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대책을 강구하셔야 될 것입니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맙긴 하지만, 펜타곤에 도움을 요청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정보를 주시기 위해 바쁜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닌 거 같습니다만.”

경환의 살갑지 않은 말에 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기술력을 바탕으로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SHJ는 미국의 각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SHJ의 기술을 빼내려는 경쟁국들의 움직임이 여러 곳에서 포착되고 있어 미 정보기관들을 긴장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존은 그 사실을 경환에게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저희는 SHJ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회장님과 단둘이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 자리를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존을 경계하며 경환의 뒤를 호위하고 있던 알을 의식해서인지 존은 경환과의 단독대화를 원했다. 경환은 어떠한 지시도 내리지 않은 채 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자리에서 말하기 곤란하다면 저도 듣고 싶은 생각이 없네요.”

“흠, 회장님께서 믿는다고 하시니 더는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한국정부와의 일은 SHJ의 뜻대로 원만하게 진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로 SHJ는 기업공개에 대한 압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경환은 존의 존재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한국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경환은 존의 정체가 궁금했다. 단순히 펜타곤의 연락관 신분으로 한국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SHJ가 기업공개 압박을 받게 된다는 말이 경환의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SHJ가 한국의 외환위기에 개입하면서 헤지펀드와 불편한 관계에 놓였다는 것은 회장님도 아시리라 봅니다. 대후그룹에 개입하면서 문제가 복잡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경제는 보이지 않는 통제에 의해 운영이 됩니다. 그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SHJ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도 기업공개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존이 단순한 군인의 신분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경환이 한국의 외환위기와 대후그룹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이익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목적보다도 SHJ를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의 통제 속에 넣지 않기 위해 기업공개에 반대한 이유가 컸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빨리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경환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었다. 경환은 알을 슬쩍 바라보며 눈으로 말을 건넸고 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방은 완벽하게 도청이 차단돼 있습니다.”

“좋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했습니다. 그럼 한가지 묻겠습니다. 해밀턴 대령은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펜타곤이라고 말한다면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경환은 도청이 차단되고 있다는 존의 말을 믿지 않았다. 보안팀과 함께 회의실 전체를 탐색한 후 SHJ퀄컴에서 개발한 도청방지 장치를 벽에 장치한 후 경환은 입을 열었다. 존은 경환의 철두철미함에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여러 경로를 통해 SHJ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려 했지만, 내부의 깊은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SHJ가 남들보다 빠른 정보로 플랜트시장을 접수하고 퀄컴을 인수할 때부터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기업공개로 떼돈을 벌 기회도 마다하며 SHJ를 조직화하고 SHJ타운과 SHJ시큐리티를 무장하는 것을 보고 우리와 뜻을 같이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헤지펀드와 대립하면서까지 한국 문제에 개입하는 것도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했고요.”

“저는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SHJ의 이익을 위해 뛸 뿐이지, 알지도 못하는 조직과 뜻을 같이할 생각은 없습니다.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존과의 만남은 자신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경환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존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경환에게 나지막이 질문을 던졌다.

“회장님은 누구십니까? 남들보다 한발 앞서는 정보와 기술은 모두 회장님의 머리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IT로 주가가 천정부지로 솟구치는 이때에 SHJ는 발을 빼시더군요. IT버블이 내년에 꺼진다는 걸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느닷없는 존의 질문은 밖으로 향하던 경환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뒤들 돌아본 경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감을 느낄 수 있었다.

“경제를 아는 사람이라면 IT가 세력에 의해 부풀려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는 겁니다.”

존은 자신의 속마음을 쉽게 보이지 않는 경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이 손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알이 급히 경환의 앞에 나서며 존을 막아섰다.

“목숨을 맡겼다는 말이 틀리지는 않군요. 시간 나실 때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저희는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에이브러햄 링컨, 존 F. 케네디와 뜻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존을 멍하게 바라본 경환은 존이 건넨 문서를 열었다. 문서를 확인하는 경환의 미간이 급히 좁혀지며 가벼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급히 존이 건넨 문서를 불살라버린 경환은 지금의 이 변수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미안, 일이 좀 있어서. 정우하고 희수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데리고 계세요.”

존과의 만남이 길어진 통에 정아와 석우와의 약속에 늦은 경환은 수정의 핀잔을 웃음으로 넘겼다. 내일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출국이 예정되어 있어 간단히 저녁을 하기 위해 두 사람을 호텔로 불러들였다.

“형님, 저희 결혼식까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살겠습니다.”

“어이, 매제. 정아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면, 밥숟가락 놓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아랫도리 항상 조심해.”

“석우 씨, 우리 오빠 말 잘 새겨들어. 밥숟가락 놓지 않으려면.”

두 남매의 협박에 석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군대 동기지만, 대통령과도 단독으로 만날 정도로 커버린 경환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아와의 결혼을 심각하게 고민도 해 봤지만, 경환의 뒤끝 있는 성격을 알고 있는 석우는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자긴 말을 그렇게 험악하게 해요? 아가씨, 어서 앉아요.”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준비된 음식이 나오고 수정과 정아는 결혼식을 안주 삼아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말없이 식사에 열중하던 경환은 오랜만에 만난 석우의 안부를 물었다.

“보좌관 생활은 어때?”

“저, 그게 여당이든 야당이든 하나같이 개새끼들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국민들을 위해 한목숨 바치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지들 밥그릇 챙기느라 바쁜 놈들입니다.”

졸업 후 여당 2선 의원의 보좌관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 석우는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를 거치면서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9년 전 경환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이 적응하며 그들을 따라갔겠지만, 경환이 자신의 뒤에 있는 지금 상황은 석우를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다.

“정아와 결혼하면 정치권에서 너 끌어들이려고 혈안이 될 거야. 이참에 보좌관 그만둬라.”

“네? 그, 그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정치를 그만두라고 하면.”

석우는 손에 쥐었던 포크를 급히 접시에 내려놓으며 경환을 쳐다봤다. 썩은 정치판이지만, 자신의 꿈인 정치가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경환은 그런 석우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SHJ 재단이 한국에 곧 설립하게 될 거야. 재단 이사장은 장인어른이 될 거고. 네가 장인어른을 도와 재단을 운영해 봐. 외부와 타협하지 말고, 소신껏 약자를 위해서 재단을 운영한다면, 십 년 후면 네가 원하는 길이 열리게 되지 않겠냐?”

경환의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석우는 이어지는 경환의 말에 집중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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