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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인생-170화 (147/264)
  • #170

    다시 사는 인생 - 170

    중국정부와의 기 싸움으로 인해 경환은 예정된 일정을 하나도 소화하지 못한 채 마치 죄인처럼 호텔 안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었다. SHJ의 기자회견으로 중국정부의 눈 밖에 났다는 억측들과 함께 중국과의 힘겨루기는 SHJ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란 기사가 외신을 통해 보도되었지만, 이번 사태의 피해자인 오성전자와 모토로라는 중국당국에 협조하겠다는 짤막한 논평에만 그쳐 SHJ의 행보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경환은 태연하기만 했다. 중국에 대한 기대감을 버려서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밀렸던 업무를 살피며 휴식을 취해 장기간의 출장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고 있을 뿐이었다. 총리 비서실은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중국의 총리가 일개 미국기업의 총수에 끌려다닐 수는 없었기에 급히 정보통신부 부장인 우지추완을 호텔에 파견해 일정조정을 시도하려 했지만, 경환이 일찍잠들었다는 이유로 만남 자체를 거절당했다.

    업무가 시작되기도 전인데도 불구하고, 중남해 총리집무실엔 주룽지와 쉬바이성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SHJ는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저, 그게 이경환 회장과 SHJ 직원들이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전용기와 전세기는 출국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룽지는 SHJ의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가늠하기가 고민스러웠다. 일정을 변경하기 어렵다는 SHJ의 통보를 받긴 했지만, 다른 서방 기업들이 그렇듯이 결국엔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거대 소비시장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총리와 맞선다면 중국시장에서 퇴출당할 각오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SHJ는 마치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쳐 놓은 그물 사이를 쥐새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경환 회장이 결국 내 제안을 거부하고 출국할 것으로 보입니까?”

    “죄송하지만, 일정을 변경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 참.”

    주룽지는 기가 막혔는지 더는 말을 잇지 않고 SHJ의 중국 판매실적 보고서를 들춰 보기 시작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98년 총 판매대수는 154만 대로 큰 점유율은 아니었지만, 올해 99년은 300만 대로 두 배 가까운 성장이 예상된다는 보고서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거기에 더해 SHJ퀄컴에 지불하는 로열티까지 포함한다면 10억 불을 훨씬 상회하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꼬투리를 잡아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수입을 금지하고 싶었지만, GSM의 독과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준비한 CDMA 서비스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주룽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 총리. 이경환 회장이 끝내 일정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우리 입장도 난처해질 수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SHJ는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고 방중한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대사관이 정식으로 항의를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도 들어왔습니다.”

    “MS는 미국기업이 아니랍니까? 빌 게이츠를 이용하려다 우리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느낌입니다.”

    자국 기업 보호에 철저한 미국이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을 거란 건 주룽지도 잘 알고 있었다. SHJ의 앞서 가는 기술을 얻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생산시설을 중국 안으로 끌어들여야 했지만, SHJ는 모두가 들어오기 위해 안달인 중국시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주룽지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끝내 중국 총리와의 면담은 성사되지 못할 거 같습니다. 중국정부의 후폭풍이 거셀 텐데 대책을 강구해야 되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출국을 준비 중인 경환에게 걱정스러운 모습의 린다와 어윈이 다가왔다. 경제 대국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에서 SHJ가 도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외신을 통해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중국은 한 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속옷까지 벗겨갈 나라입니다. 외형이 커질 수는 있겠지만, 그 외형이 우리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저는 중국이란 늪에 빠지는 거 보다는 그 외형을 포기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중국이란 거대 소비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경환의 주장이 안타까운 듯 조심스럽게 어윈이 입을 열었다. 경환도 중국이란 시장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중국에 끌려다니며 피를 빨리고 싶지도 않았다. 확실한 원천기술을 가지고 있는 CDMA는 문제라고 볼 수 없겠지만, 휴대폰과 MP3는 상황이 달랐다. 결국은 기술만 뺏긴 채 중국 기업의 배만 불려줄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싱가포르에서 고민해 봅시다. 이틀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호텔 룸에만 있어서 그런지 좀이 쑤시네요. 어서 공항으로 출발합시다.”

    불안한 표정의 린다와 어윈을 다독이며 호텔을 나선 경환은 입국 때와는 다르게 호텔 주위를 삼엄하게 경비하는 공안들을 볼 수 있었다.

    “회장님, 중국 공안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우리를 공항까지 인도하겠다고 합니다. 나쁜 조건은 아닌 거 같아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경호팀을 선도하며 경환의 주의를 경호하던 알이 나지막이 공안의 제안을 전달했다. 무엇인가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경환은 알의 보고를 고개를 끄덕여 승인한 뒤 서둘러 리무진에 탑승하자 공안들도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 중앙선에 50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공안들의 수신호를 받으며 차량은 통제된 도로를 막힘 없이 공항을 향해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공항에 도착한 일행은 출국수속을 서둘렀고 경환은 알과 하루나의 안내를 받으며 VIP 전용 출국장으로 향했다.

    “제임스, 공항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싱가포르에서는 같이 움직입시다.”

    경환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빌이 경환을 향해 멋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빌의 중국방문은 경환의 일정에 큰 차질을 빚게 만들다 보니 경환은 반갑게 빌을 맞아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빌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빌, 저보다 바쁜 일정을 보내셨더군요. 보너스는 얼마나 준비했습니까?”

    “하하하, 제임스 눈에서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네요. 이거 두둑한 보너스를 준비하지 않으면 타 죽을 수도 있겠는데요? 제니퍼가 정우와 결혼이라도 한다면, 우린 식구가 되는데 좀 살살해 주세요.”

    “뭐, 뭐라고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사랑은 움직이는 거겠지만, 또 누가 압니까? 제 딸이라서가 아니라 제니퍼도 한 고집 합니다. 그리고 정우가 여름에 놀러 오라고 제니퍼를 초청했다고 하는데, 전 보낼 생각입니다.”

    경환은 빌의 농담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정우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면 누가 되었건 반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건 성인이 된 후에 고민할 문제였다. 자신의 방중으로 경환의 일정이 엉망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던 빌은 딸을 팔아가며 어색한 자리를 모면하고 있었다. 빌의 달변을 이길 생각이 없었던 경환은 손사래를 치며 농담하지 말라고 나무랐지만, 빌은 묘한 웃음만 경환에게 보여주었다. 그때, 하루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경환에게 메모지를 전달했다.

    “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래요. 중국정부가 SHJ를 무시할 수는 없겠죠. 싱가포르에서 봅시다.”

    무슨 일이지 아는 듯 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빌을 뒤로한 채, 경환은 VIP 공간에서도 따로 마련된 장소로 삼엄한 경호원들의 눈초리를 받으며 이동했다. 경환의 경호원들이 중국 경호원들과 기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우지추완이 경환을 마중하기 위해 급히 달려왔다.

    “하하하, 이 회장님. 정보통신부 부장 우지추완입니다. 같이 들어가시죠. 총리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중국에 대한 미련을 버린 상태에서 총리가 공항까지 나오리라곤 전혀 생각 못 한 일이었다. 이미 도착해 있던 린다와 어윈, 에릭과 함께 접견실에 들어서자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의 주룽지가 경환을 반겼다. 경환은 중국 총리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먼저 다가섰다.

    “SHJ 회장 제임스 리입니다. 총리께서 공항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반갑습니다. 주룽지입니다. 이경환 회장님. 앉아서 얘기를 나눕시다.”

    주룽지의 맞은 편에 자리를 잡은 경환은 작은 눈의 주룽지를 주시했다. 인민은행장을 거치며 중국 역사상 가장 공명정대하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주룽지였지만, 경환에 있어서 주룽지는 중국과 SHJ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경쟁자일 뿐이었다. 경환은 제임스라는 미국이름에도 한국명인 이경환으로 호칭하는 주룽지의 치밀함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SHJ가 우려하는 불법복제에 대해서 중국정부도 심각하게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강력한 단속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총리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대가 큽니다. 중국 소비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주룽지는 통역 없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경환이 쉽지 않은 인물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주룽지는 경환이 작성한 두 편의 제안서를 떠올리며 중국에 정통한 경환을 그 당시 중국이 잡았다면 SHJ는 미국기업이 아닌 중국기업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을 삼켰다.

    “초청하고도 바쁜 일정 때문에 오늘에야 만나게 된 점 이해 바랍니다. 중국정부는 중국통인 이 회장님이 중국에 어느 정도 투자를 할지 관심이 많습니다.”

    “SHJ도 중국 투자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행조건이 해결되지 않아 고민이 많습니다.”

    “선행 조건이라뇨?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미 보고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룽지는 놀란 표정으로 경환에게 되물었다. 자존심을 버리면서까지 공항에 나온 이유는 자신이 예뻐서가 아닌 SHJ의 신기술이 아직은 탐나기 때문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까지 주룽지의 자존심을 뭉개버린다면 SHJ와 중국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는 것이 경환을 신중하게 만들고 있었다. 경환은 주룽지의 뻔뻔함을 미소로 흘리며 답변을 시작했다.

    “저희는 독자투자를 원합니다. 물론 중국의 외상투자법에 저촉되기는 하지만, 중국정부의 의지만 있다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합작법인 설립도 검토는 하고 있지만, 저희는 경영권 간섭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방침입니다. 또한, 100% 내수판매도 가능한 법인을 원합니다.”

    “중국은 자국 기업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SHJ처럼 신기술로 무장한 제품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내수판매 비율은 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국은 수출을 장려하고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 투자로 설립된 공장들에 대해 생산품의 50% ~ 80%를 수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법인설립을 허가해 주고 있었다. 이런 조건으로 중국에 SHJ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면, 아시아와 동유럽 수출을 담당하는 한국 공장은 경쟁력이 떨어져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었다. 경환은 중국의 내수시장을 위해 투자를 고려할 뿐, 중국을 수출 전진기지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총리의 고민은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수출 전진기지로만 중국을 이용하며 착취를 당한다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정서와는 맞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중국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내수시장을 개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제도는 점차 사라지겠지만, 지금 중국엔 필요한 제도입니다. 독자투자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또한, 수출비율도 최저로 적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룽지는 독자투자를 허용하더라도 내수시장을 100% SHJ에 내 줄 생각은 없었다. 독자투자로 SHJ가 중국에 들어오더라도 기술을 빼낼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 관세를 내고도 엄청난 판매를 보이는 세틀러와 컴페니언에 내수시장을 개방한다면 서서히 싹이 돋고 있는 중국 기업들을 밟아 버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SHJ 아시아본사 유치는 진즉 포기를 했지만, SHJ퀄컴의 생산 공장만 유치하게 된다면 한국 공장은 자연스럽게 중국으로 이전된다는 것까지 계산하고 있는 주룽지의 미간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경환과 주룽지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기 시작했다. 이어 SHJ구글의 진출과 관련해 정부의 인터넷통제 문제가 화두에 올랐지만, 주룽지는 통제 없는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말로 경환이 요청한 SHJ구글의 자유로운 서비스 보장을 일축해 버렸다.

    “총리의 제안 검토해 보겠습니다. 단지 시간이 없어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없어 아쉽습니다.”

    “SHJ의 현명한 결정을 기대하겠습니다.”

    CDMA에 대한 합작을 제외하고 서로의 이견만 확인한 채 주룽지와의 만남은 마무리되었다. 주룽지는 경환과의 만남을 통해 미국대사관의 항의를 무마했다는 성과를 얻었고, 경환은 중국 투자 보류에 대한 명분을 확보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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