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인생-169화 (146/264)

#169

다시 사는 인생 - 169

SHJ의 불법복제 관련 기자회견은 큰 파문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중국의 불법복제로 막대한 피해를 본 미국과 유럽의 언론들이 일제히 중국의 불법복제 실태와 함께 중국정부의 방관을 비판하는 기사를 북경발 뉴스로 전송하며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언론은 정부의 통제에 순응하며 SHJ의 회견내용을 보도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SHJ의 기자회견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주룽지는 빌 게이츠와의 단독면담을 급히 중단한 채 집무실로 향해 사태 파악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SHJ가 불법복제를 들어 중국정부와 정면대결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WTO 가입과 관련해 저작권 문제가 대두하고 있는 상황에서 SHJ의 기자회견은 큰 악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쉬 국장은 SHJ의 회견내용을 사전에 파악도 못 했단 말입니까?”

“단순한 기자회견으로 생각했습니다. SHJ에서 불법복제를 들고 나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총리.”

주룽지는 회견내용이 찍힌 동영상을 살피며 인상을 구겼다. SHJ의 기를 죽여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 했던 회심의 한 수가 SHJ의 선수에 막힌 상황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예정대로 내일 CCTV의 고발 프로를 방영한다면 불법복제에 대한 대처보다는 불법복제를 묵인하고 조장한다는 오해까지 받을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다고 오만방자한 SHJ를 놔둔다면 자신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부패척결과 공명정대함을 무기로 쌓아올린 명성에 치명타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주룽지의 말 못할 고민은 깊어만 갔다.

“CCTV에 연락해 내일 방영 예정이었던 프로를 중단하라고 하세요. 이경환 회장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총리,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룽지 또한 이대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서 흐지부지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때가 너무 좋지 않았다. 해외투자 유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SHJ에 보복성 조치를 취한다면 거센 후폭풍을 맞게 될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생각할수록 절묘하게 이루어진 SHJ의 선공이 뼈아플 수밖에 없었다.

“때를 기다립시다. 홍콩을 돌려받기 위해 백 년을 기다린 우리 중화 민족입니다. 햇병아리인 SHJ를 길들이는 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에요. 그나저나 정황으로 봐서는 SHJ에 정보가 흘러들어 간 거 같은데, 집히는 거 없습니까?”

“이경환 회장은 입국 후 가족들과 통화를 나눈 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이번 기자회견은 미국에서부터 준비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주룽지는 심한 두통이 몰려왔는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SHJ가 괘씸했지만, 참고 때를 기다리자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주룽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쉬바이성이 입을 열었다.

“저, 총리. 한국을 담당한 3국의 보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으로 수출되는 우리 농산물로 인해 한국정부는 농민들의 저항에 부딪히고 있다고 합니다. 이걸 기회로 삼으면 SHJ에 타격을 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쉬바이성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한 주룽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쉬바이성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한국정부는 농민들의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우리 농산물에 고관세를 부여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입니다. 우리는 한국산 폴리에틸렌을 수입 금지해 보복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여기에 휴대폰을 추가한다면 중국으로 수입되는 SHJ 휴대폰이 한국에서 생산되는 만큼 SHJ도 그 피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찡그렸던 주룽지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을 담당하고 있는 3국의 분석이 끝났다면 한국을 길들이기 위한 무역분쟁은 때만 기다리면 되는 문제였다. SHJ가 중국에 생산시설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카드를 손에 쥐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문제로 서방언론들이 시끄러우니, 공상총국 국장 명의로 불법 복제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한다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아깝기는 하지만, 휴대폰 제조사 두 곳 정도를 엮어 넣으라고 지시를 내리세요.”

앓던 이가 빠진 거처럼 시원함을 느낀 주룽지는 깊게 들이마신 담배 연기를 세차게 뿜어내기 시작했다.

중국정부의 대응을 기다리며 룸으로 돌아온 경환은 조용히 혼자만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이미 이 룸 어딘가에는 자신을 감시하기 위한 도청장치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경환은 개의치 않았다.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도청장치로 중국정부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SHJ의 선공으로 인해 중국정부에 당혹감을 줄 수는 있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특성상 중국정부의 역공을 대비해야만 했다. 그러나 어떤 도발을 해 올지는 경환도 자신할 수는 없었다.

‘따르릉, 따르릉.’

식사를 즐기던 경환은 무의식적으로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프런트와 하루나에 의해 두 번 걸러진 전화가 울린다는 건 자신이 받아야만 되는 전화라는 뜻이었다.

“제임스 리입니다. 말씀하세요.”

‘하하하, 제임스. 나 빌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돼, 제임스에게 좀 미안하네요.’

예상하지 못한 빌의 전화에 경환은 씁쓸한 인상을 지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처럼 빌의 중국방문으로 꼬여버린 계획으로 인해 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경환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갈 수는 없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들립니다. 그나저나 MS가 할 일을 SHJ가 대신해 줬는데 보너스 없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불법복제로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곳은 우리 MS인데 SHJ가 대신 나서주니 보너스라도 줘야겠지요. 정보통신부에서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해야 해서 길게는 통화 못 합니다. 싱가포르에서 골프나 같이 칩시다.’

“난 현찰이 좋습니다. 두둑한 보너스 기대합니다.”

뭐가 좋은지 연신 웃음을 그치지 않는 빌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 급히 전화를 끊은 경환은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컴컴한 북경의 야경을 주시했다. 아직은 경제 대국이라 말할 수 없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중국은 화려하게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될 것이었다. 중국시장을 포기하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었지만, 포기하기엔 중국이라는 떡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중국정부의 비위를 맞춰가며 간, 쓸개를 모두 빼다바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경환은 회귀 전 중국의 동북공정에 이를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규정, 한국의 역사를 백제와 신라로 국한해 고대 중국의 영토를 평양까지 확보하려는 중국의 치밀한 전략에 울분을 토해내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도 식민사관의 잔재에 빠져 자신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한국을 생각하니 경환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큰 결심을 하지 않고서는 중국의 손바닥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한 경환에게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란 글자가 떠올랐다.

다음 날, SHJ의 기자회견이 외신을 통해 이슈화되는 것과는 달리 중국 언론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환을 제외한 SHJ 실무팀들은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며 중국기업들과의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회장님, 중국정부가 대범하게 이번 일을 넘길 생각인가 봅니다.”

“아닐 겁니다. 아직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한 거겠지요. 중국인들이 대범하다는 생각은 지워버리세요. 오늘이 될 수도 있고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어제의 일에 대한 복수를 하려 들 겁니다. 이 점 잊지 마시고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린다는 경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양인의 입장에서 중국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경환은 중국인이 대륙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어 호방하고 대범하다는 린다의 말엔 절대 동의하지 않았다. 대륙적인 기질이란 허울 좋은 눈속임으로 상대방의 눈을 멀게 만들어 상대방의 이익을 갈취하는 중국인들을 자주 경험해 왔기 때문이었다.

“다각도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빌 게이츠가 중국정부의 환대를 받는 것과 너무 대조적입니다. 오전에 확인을 한 바로는 회장님과의 면담은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도 급할 거 없습니다. 만남에 목매달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일정대로 내일 싱가포르로 출국합니다. 더 이상 중국정부와 연락을 취하지 마세요.”

중국인들과의 협상은 중국인들보다 한 박자 늦게 움직이고 빠른 결론은 삼가야 한다는 생각이 경환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경환은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는 말로 자신의 결심을 대신하며 린다의 초조함을 달래주었다.

“회장님, 티비를 틀겠습니다. 좀 보셔야 될 거 같습니다.”

급히 들어온 하루나가 티비를 틀었다. CCTV에선 공상총국의 국장이 불법복제를 제조하는 업체를 강력하게 단속하겠다는 성명과 함께 불법복제 휴대폰을 제조하는 업체를 기습하는 공안들의 모습이 화면에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밀수한 부품으로 제조된 휴대폰도 강력하게 단속을 하겠다는 성명이 뒤를 이었다. CCTV 기자는 공상총국의 성명을 다시 보도하며 홍콩과 심천을 경유해 부품을 밀수한 모토로라와 오성전자를 공상총국에서 조사 중이며 밀수가확인되면 엄청난 액수의 과징금과 함께 형사처분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다.

중국어를 모르는 두 사람에게 간단히 설명해준 경환은 생각보다는 빠르면서도 치졸한 중국정부의 대응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WTO 가입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던 중국정부로써는 SHJ의 기자회견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기에 단속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이 또한 눈 가리고 아웅 식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아니었다. 원가를 줄이기 위해 하청업체들의 부품 밀수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SHJ의 기자회견 여파를 줄이고 물타기 하기위해 원청인 오성전자와 모토로라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경환은 알 수 있었다.

“오성전자의 가전과 모토로라의 휴대폰이 큰 타격을 입겠는데요.”

사실 여부를 떠나서 두 업체의 중국시장 점유율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경환은 도청을 신경 쓰지도 않고 방송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두 사람에게 피력했다.

“아마 우리의 기자회견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거겠지요. 제가 린다에게 준비하란 말을 이 방송을 통해 알았으리라 봅니다. 중국은 특히 기업논리보다는 정치논리가 강조되는 국가입니다. 이런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되어 이번 방문은 유익했다고 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중국에 대한 기대를 접겠습니다.”

애꿎은 오성전자와 모토로라가 피해를 보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두 업체도 겪어야 할 일이었다고 경환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상황이 SHJ로 인해 앞당겨져 준비할 시간을 벌지 못했다는 점에선 경환도 일말의 미안함은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의 정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공명정대하기로 소문난 주룽지도 결국은 중국인이었고 중국의 발전과 중국기업의 성장을 위해선 이런 치졸한 수까지 동원한다는 것이 경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룽지와의 면담에 어느 정도 기대를 했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

“자, 중국 일정을 정리합시다. 큰 소득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피해를 본 것도 없으니 이 정도면 성공한 방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회의는 내일 싱가포르에서 진행하겠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려는 경환의 의도를 눈치챈 린다와 하루나는 서둘러 호텔 룸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노크와 함께 하루나의 부하직원이 메모지를 전달했다.

“회장님, 중국 총리 비서실에서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다른 일정으로 면담이 불가하니 내일 오후에 시간을 내겠다고 합니다.”

“예정된 출국시간이 언제죠?”

“오전 10시입니다.”

도청을 통해 경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중국정부의 꼼수를 느낄 수 있었다. 자존심과 체면을 살리기 위해 출국이 10시란 사실을 알면서도 오후에 시간을 내겠다는 중국정부에 경환은 비위가 상했다. 힘으로야 중국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주룽지와의 자존심 싸움에선 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십시오. 싱가포르의 일정도 중국만큼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정입니다. 설령, 중국시장을 잃게 되더라도 우리는 예정대로 오전 10시에 북경을 떠날 겁니다.”

경환의 지시를 받은 하루나가 급히 빠져나가자 린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중국정부의 안하무인 식의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과격한 경환의 대응도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세틀러와 컴페니언의 중국 매출이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와중에 중국시장을 포기한다면 그 대체시장을 확보할 때까지 고전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린다의 한숨에도 경환은 아무런 동요 없이 휴식을 위해 책을 집어들 뿐이었다. 린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환의 휴식을 위해 조용히 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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